아트

프라하의 가을 풍경을 뒤로한 채, 매일 가상현실로 들어갔다

2024.12.31

프라하의 가을 풍경을 뒤로한 채, 매일 가상현실로 들어갔다

VR 영화의 현주소를 알 수 있는 ‘ART*VR’ 축제가 체코 프라하에서 열렸다. 360도 몰입형 공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엔 한계와 매력이 함께했다.

VR 영화를 즐기는 관객.

프라하의 가을 풍경을 뒤로하고, 나는 매일 헤드셋을 끼고 가상현실로 들어갔다. 그곳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참호였다가, 심해였다가, 자연 유산한 어머니의 침실이기도 했다. 체코 프라하의 DOX 현대미술센터에서 2024년 10월 15일부터 11월 17일까지 동유럽 최대 규모의 XR 영화제인 ‘ART*VR’이 열렸다. (XR(확장현실)은 VR(가상현실), AR(증강현실), MR(혼합현실)을 포괄한다.) 이곳에서 상영된 영화는 헤드셋을 착용한 관람자가 360도 몰입형 공간에서 주체적으로 이야기를 체험하도록 했다.

영화제 소식은 김진아 감독 덕분에 입수했다. 그녀의 작품 <아메리칸 타운>(2023)이 ART*VR에 공식 초청되었기 때문이다. <아메리칸 타운>은 김진아 감독의 미군 위안부 VR 3부작 <동두천>(2017), <소요산>(2021)에 이은 세 번째 작품으로, 주한 미군의 향락을 위해 정책적으로 세워진 기지촌 ‘아메리칸 타운’을 재현한다. 미군이 살해한 한국 여성 성 노동자를 내세운 <동두천>은 제74회 베니스국제영화제 VR 경쟁 부문에서 베스트 VR 스토리상을 수상했으며, <소요산>은 미군 위안부 여성들을 감금·치료한 ‘몽키 하우스’라는 수용소를 재현하며 제27회 제네바국제영화제에서 VR 경쟁 부문 최우수 작품상을 받았다. 이번 ART*VR의 주제가 ‘Women in XR’인 만큼 김진아 감독의 작품은 관객이 대기할 만큼 많은 관심을 받았다.

여성이 받는 억압을 실사와 애니메이션을 섞어 연출한 <Draw for Change! We Exist, We Resist>.

페스티벌은 15개 작품이 출품된 경쟁 부문과 ‘Beyond the Glass Ceiling(유리 천장 너머)’이라는 주제전으로 구성된다. 김진아 감독의 <아메리칸 타운>은 주제전에서 관객과 만났다. 다른 작품 역시 여성이 마주한 불평등과 억압을 다루고 있었다. 인상적인 작품은 “멕시코에서는 매일 10명의 여성이 살해당한다”는 내레이션으로 시작한 <Draw for Change! We Exist, We Resist>. 멕시코의 젊은 아티스트 마리아나 카데나스(Mariana Cadenas)는 자신의 경험을 애니메이션과 실사 영상을 섞어 구현했다. 갑자기 어두워진 거리, 낯선 남자가 다가온다. 화면에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물음이 뜬다. 이어 두 가지 선택지가 나온다. 1 길을 건너 도망친다. 2 전화로 도움을 청한다. VR 컨트롤러를 이용해 1번을 눌렀지만 나는 죽임을 당한다. 2번 버튼을 선택해도 마찬가지다. 작품 말미에는 여성의 날에 멕시코시티를 행진하는 여성 수천 명 속에 내가 있다. 그들과 실제로 같이 있는 것처럼 벅찼다. 이처럼 VR 영화는 다른 매체보다 더 몰입할 수 있는 힘이 있다. 관람자를 360도로 구현된 상황에 데려다놓고, 움직임에 따라 변하기 때문이다. ART*VR에서 상영된 대다수 작품 역시 관객을 어떻게 더 절절히 체험케 할 것인가에 매진한 듯 보였다.

아예 체험 자체가 목적처럼 보이는 작품도 있다. 캐나다 출신 셰라니 보댕 캥탱(Chélanie Beaudin-Quintin), 카롤린 로랭 보카주(Caroline Laurin-Beaucage)의 <Bodies of Water>는 수영장에서 시체들이 군무를 펼친다. 나도 함께 물속에서 공연을 관람하는 듯하다. 하지만 체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이것을 영화라고 불러도 될까? 그나마 흥미로웠던 작품은 일명 ‘천국의 계단’으로 불리는 유산소 운동 기구에 올라 감상한 <Duchampiana>. 헤드셋을 끼자 하늘로 올라가는 계단이 펼쳐진다. 꼭대기가 궁금해 운동 기구를 밟고 또 밟아 가상현실의 계단을 올라갔다. 프랑스 화가 마르셀 뒤샹은 계단을 내려오는 벌거벗은 여인을 입체파 표현 기법으로 그린 적 있다. 감독 릴리안 헤스(Lilian Hess)는 “그림 속 인물에게 새로운 서사를 부여하고 싶어서” 이 작품을 만들었다.

책을 집는 간단한 행동도 어려운 해리 장애를 관객에게 체험케 한 <Turbulence : Jamais Vu>.
책을 집는 간단한 행동도 어려운 해리 장애를 관객에게 체험케 한 <Turbulence : Jamais Vu>.

체험을 통해 창작자의 메시지가 더 강력하게 전해지는 수작도 있다. ART*VR에서 베스트 디자인상을 받은 <Turbulence : Jamais Vu>는 친숙한 환경이 갑자기 낯설어지는 세계로 초대한다. 호주 XR 아티스트 벤 조세프 앤드류스(Ben Joseph Andrews)는 해리 장애를 겪으면서 커피 잔을 집는 간단한 행동조차 쉽지 않았던 자신의 경험을 관객이 체험하도록 한다. 나 역시 가상현실에서 물건 하나 잡기 어려웠고, 해리성 장애가 조금이나마 느껴졌다.

기술력은 훌륭하더라도 이야기가 약한 작품도 꽤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을 다룬 <Battlefield>는 전장의 참호 속에 병사들과 함께 있는 것 같지만, 식상한 전개에 금세 흥미를 잃었다. 현장에서 만난 영화 프로그래머는 “기술에 집중하다 보니 내러티브가 부족해지기 쉽다”고 말했다.

게임이나 애니메이션 기술자들이 VR 작품에 자주 참여하기에 ART*VR에서도 관련 형식이 많다. 하지만 과연 이것을 게임이 아니라 영화라고 해도 될까 싶은 작품도 꽤 있었다. 그저 버튼을 눌러 다음 단계로 진입하고 적을 물리치거나 신비한 세계가 나타나는 설정이다.

애니메이션 작품은 2D가 아니라 VR로 만들어야 하는 당위성을 찾지 못했다. 할머니가 인생을 반추하는 <Nana Lou> 등은 360도 어디로 고개를 돌려도 애니메이션 화면이 펼쳐진다는 것 외에는, 지루한 전개에 35분여의 러닝타임도 길게 느껴졌다. 오히려 무거운 헤드셋을 벗고 편안하게 감상하면 이보단 나은 평가가 나올 것 같았다.

중요한 것은 주제 의식, 말하고 싶은 것이다. 이를 효과적으로 관객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치밀한 전개와 완성도가 필수다. 또한 2D 영상, 음악, 문학 혹은 VR 중에 어떤 수단이 최적일지는 창작자의 몫이다. 이 이야기를 관객에게 선보이는 데 VR이어야 하는 이유가 명확해야 한다.

VR 트렌드에서도 명상과 힐링은 주요 관심사였다. 인기 작품 중 하나는 침대에 누워 시작하는 <A Dream of Fish: Prologue>였다. 3시간을 대기한 후에야 입장했다. 헤드셋을 끼고 침대에 눕자 천장에 양 떼가 나타난다.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흘러나와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읊조리라 권하고, 양 떼를 세보라고도 한다. 감독 루카스 히조투(Lucas Rizzotto)는 스트레스와 불면증 해소에 일조하고 싶다고 설명했다.

여러 명이 가상 현실에 진입해 명상을 하는 <Otherworlds>.

소피아 불가코바(Sophia Bulgakova)의 <Otherworlds> 역시 집단 명상을 위한 작품이다. 커다란 나무를 상징하는 기둥에 헤드셋 6개가 걸려 있다. 각자 헤드셋을 끼고 가상현실로 함께 들어가자 신나는 음악과 춤판이 벌어진다. 관객은 현실 공간에서는 거리를 둔 채 말없이 헤드셋을 쓰고 있지만, 가상현실에선 어우러지며 논다. 최고조에 다다르고 운이 좋다면 무아지경에 빠져들 수 있다. 이 작품은 우크라이나 전통 의식에서 영감을 받았다. 가상현실에서는 누구든 될 수 있다. 각자 원하는 인격체가 되어 현실에서는 전혀 몰랐던 타인과 격의 없이 어울리는 경험은 무척 인상 깊었다.

며칠째 VR 영화를 감상하며 기묘해지곤 했다. 가상의 나는 춤판을 벌이고, 천국의 계단을 오르고, 제1차 세계대전에도 참전했지만 현실의 나는 프라하 DOX 현대미술센터의 흰색 의자에 앉아 헤드셋을 끼고 있으니까. 출품작 <Shadowtime>은 이렇게 묻는다. “우리는 앞으로도 가상과 실재 사이를 오갈 것입니다. 둘 다 진짜 나일까요?” 동시에 다른 곳에 존재하는 여러 명의 나, 모두 나라고 답하고 싶다. 가상의 나 덕분에 현실의 내가 변하기도 하니까. 김진아 감독의 미군 위안부 3부작을 본 뒤로 철거와 보존 공방 중인 몽키하우스 기사를 그냥 지나칠 수 없다. (VK)

피처 디렉터
김나랑
COURTESY OF
MARIANA CADENAS, BEN JOSEPH ANDREWS, SOPHIA BULGAKO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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