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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을 정의한 패션 이슈 5

2024.12.31

2024년을 정의한 패션 이슈 5

한 해의 마지막 날은 언제나 특별합니다. 백지장처럼 깨끗해 무엇이든 써 내려갈 수 있는, ‘365일’이라는 이름의 선물이 우리 앞에 서 있으니까요. 12월 31일은 직전의 364일을 어떻게 보내왔나 돌아보기 가장 좋은 날이기도 합니다. 올해의 패션계는 어땠을까요? 샤넬은 2024년 막바지에 다다라서야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미우미우는 또 한 번 왕좌를 지켜내는 데 성공했고요. 마냥 희망적인 소식만 전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몇몇 그룹은 실적 부진을 이유로 CEO 교체를 단행했고, 며칠 전 <보그 비즈니스>는 ‘트렌드의 종말’을 선언했죠. 2024년 패션계를 정의한 이슈 다섯 가지를 소개합니다.

#1 마티유 블라지의 샤넬행

Bottega Veneta 2025 S/S RTW
Carven 2025 S/S RTW

지난 6월, 버지니 비아르가 샤넬에 안녕을 고했습니다. 이후 샤넬이 ‘넥스트 칼 라거펠트’를 찾아 헤맨다는 소식은 수많은 루머를 양성했죠. 마크 제이콥스, 니콜라 제스키에르, 에디 슬리먼, 시몽 포르트 자크뮈스 등 수많은 디자이너가 물망에 올랐지만, 결국 샤넬의 선택은 마티유 블라지였습니다. 보테가 베네타는 까르벵을 이끌던 루이스 트로터를 새로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선임했고요.

마티유 블라지의 샤넬행을 첫 번째 이슈로 꼽은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 사건이 패션계 전체에 ‘패러다임 시프트’를 일으킬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죠. 버지니 비아르가 30년 가까이 같은 하우스에 머무르며 칼 라거펠트의 ‘오른팔’로 불렸던 것에 반해, 마티유 블라지는 라프 시몬스, 메종 마르지엘라, 그리고 셀린느에서 경력을 쌓았습니다. 샤넬 하우스가 수십 년 만에 외부인을 맞이하게 된 것이죠. 그의 데뷔 컬렉션은 2025년 9월, 파리에서 이뤄집니다.

‘샤넬 대란’뿐만이 아닙니다. 올해 하반기에는 유독 디자이너와 브랜드의 만남과 이별이 잦았죠. 존 갈리아노킴 존스는 각자 마르지엘라와 펜디를 떠났고, 톰 포드는 하이더 아커만을 새로운 수장으로 맞이했습니다. 드리스 반 노튼은 은퇴를 선언했고, 헬무트 랭은 피터 도와 작별했죠. 셀린느에 새로운 전성기를 안겨준 에디 슬리먼, 그리고 25년이 넘도록 발렌티노를 이끈 피엘파올로 피촐리의 행보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죠. 패션계의 지각변동은 이제 막 시작됐을 뿐입니다.

#2 케어링과 리치몬트의 CEO 교체

케어링 그룹의 오너, 프랑수아 피노의 개인 미술관 ‘부르스 데 코메르스(Bourse de Commerce)’. Getty Images

인사이동의 바람은 디자이너에게만 불어닥친 것이 아닙니다. 올 한 해 CEO 교체 소식도 끊이지 않았죠. 지난 10월, 케어링은 전체 매출의 약 50%를 담당하는 구찌 그룹의 새로운 CEO로 스테파노 칸티노(Stefano Cantino)를 임명했습니다. 발렌시아가와 생 로랑 역시 내년 1월 2일부터는 새로운 CEO와 함께하게 됐고요. 저 멀리 제네바에 위치한 리치몬트 본사에서도 1년 내내 비슷한 소식이 전해져왔습니다. 반클리프 아펠 출신의 니콜라스 보스(Nicholas Bos)가 새로이 그룹 CEO로 임명됐고, 예거 르쿨트르와 바쉐론 콘스탄틴의 CEO 역시 교체됐죠.

이들이 일제히 CEO 교체를 단행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실적 부진이죠. 올해는 2008년 미국발 금융 위기, 2020년 팬데믹 이후 럭셔리 시장이 처음으로 매출 감소를 겪은 해였습니다. 럭셔리 이커머스 역시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고요. 리치몬트 그룹이 최근 네타포르테를 매각하고, 한때는 시장을 선도하던 매치스패션이 웹사이트 운영을 중단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포브스>는 중국인의 소비 패턴 변화, Z세대 고객층 이탈, 그리고 브랜드들의 지나친 가격 상승을 시장 축소의 원인으로 꼽았는데요. 내년에는 럭셔리 시장이 반등을 이뤄낼 수 있을지도 지켜봐야겠습니다. 어쩌면 앞서 언급한 누군가의 데뷔 컬렉션이 패션계 전체에 활기를 불어넣을지도 모르는 일이고요!

#3 “트렌드의 시대는 끝났다(Trends are Over!)”

모든 스타일이 한곳에 존재하는, 패션 위크의 스트리트 포토는 ‘트렌드 종말론’의 완벽한 증거입니다. Courtesy of Phil Oh
Courtesy of Phil Oh

미국 <보그>는 1년을 마무리하는 ‘패션 여론조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에디터, 스타일리스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포토그래퍼 등 300명이 넘는 업계 관계자가 투표 대상자였죠. <보그>는 그들에게 올해의 디자이너, 탐나는 브랜드, 최고의 컬렉션 등 총 14개의 굵직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올해 최고의 트렌드는(The Year’s Best Trend)?’ 역시 그중 하나였고요. 당당하게 1위를 차지한 답변은 ‘트렌드의 시대는 끝났다(Trends are Over)’였습니다. 50.2%의 득표율로, 16.3%에 그친(?) ‘보호 시크의 귀환’을 압도적으로 제쳤죠.

US Vogue

미니멀, 오피스 웨어, 보헤미안 시크, 웨스턴…. 올 한 해 <보그 코리아>는 참 많은 ‘트렌드’를 소개했습니다. 브랫 그린, 몹 와이프 그리고 드뮤어처럼 SNS를 중심으로 퍼진 트렌드도 빼놓을 수 없고요. 이 모든 스타일이 ‘유행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자신 있게 ‘메가 트렌드’라고 부를 만한, 광범위하고 대중적인 유행이 부재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 역시 없죠. 패션업계 종사자들이 트렌드의 시대는 끝났다고 말한 까닭입니다. 이제 트렌드란 거역할 수 없는 흐름이 아닙니다. 우리는 단지 잔잔하게 흐르는 수많은 물길 중 하나를 취향껏 골라, 몸을 맡기기만 하면 될 뿐이죠.

#4 K-Supremacy

Photo: Getty Images/Artwork: Vogue Business
프라다 2025 S/S 쇼에 참석한 엔하이픈. Photo by Vittorio Zunino Celotto/Getty Images for Prada

루이 비통, 프라다, 구찌, 로에베, 발렌티노, 디젤, 프레드, 오메가…. 올 한 해 K-팝 스타, 혹은 한국인 셀럽을 앰배서더로 발탁한 브랜드 목록입니다. 2024년 패션계에는 말 그대로 K-앰배서더 광풍이 불어왔습니다.

인플루언서 마케팅 전문 플랫폼 레프티(Lefty)는 PR 에이전시 카를라 오토(Karla Otto)와 함께 패션 위크가 종료될 때마다 브랜드별 언드 미디어 가치(Earned Media Value, EMV)를 측정해 발표하고 있습니다. EMV란 기업이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 외부에서 생성되거나 공유되는 미디어를 의미하는데요. 레프티와 카를라 오토의 발표에 따르면, 2024 F/W 시즌 중 가장 높은 EMV를 창출한 브랜드 1위부터 10위 목록은 이랬습니다. 디올, 루이 비통, 생 로랑, 로에베, 베르사체, 미우미우, 돌체앤가바나, 샤넬, 타미 힐피거, 그리고 발렌시아가. 그중 루이 비통과 타미 힐피거를 제외한 모든 브랜드에서 K-팝 아이돌이 당당하게 EMV 창출 기여도 1위를 차지했죠.

패션계에서 점점 커져만 가는 K-팝 아이돌의 위상을 보여주는 사례는 또 있습니다. 몇몇 스타는 단순한 앰배서더를 넘어 디자이너에게 직접적인 영감을 주는 ‘뮤즈’로 거듭나고 있거든요. 3월에는 스트레이 키즈의 필릭스가 니콜라 제스키에르의 루이 비통 부임 10주년 기념 쇼에 모델로 등장했고, 10월에는 민니가 미우미우의 모델로 나섰죠. 내년에도 K-팝 스타들은 쇼장 앞을 거대한 함성 소리로 뒤덮을 예정입니다.

#5 미우미우 전성시대

Miu Miu 2024 F/W RTW
Miu Miu 2025 S/S RTW

아직 반환점도 돌지 않았지만, 지금까지의 미우미우는 가히 ‘2020년대의 지배자’라고 칭할 만합니다. 패션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브랜드와 아이템의 순위를 분기별로 발표하는 리스트 인덱스(Lyst Index)만 봐도 이는 분명하죠. 아직 4분기 결과가 발표되지 않았지만, 2024년 가장 인기 있는 브랜드 순위에서 미우미우는 3분기까지 각각 1·2·1위를 차지했습니다. 2023년 순위는 2·4·1·2위였습니다. 다채로운 컬러와 기발한 스타일링, 아이디어가 넘쳐나는 미우미우의 런웨이는 늘 화제를 모으죠. 프라다 그룹은 2024년 3분기, 미우미우가 직전 분기에 비해 무려 105% 성장했다고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미우미우는 무엇이 다르기에, 몇 년 동안 패션 피라미드의 꼭대기에서 군림할 수 있는 걸까요? 미우미우는 알고리즘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몰개성화 시대에 대항하는 대표적인 브랜드입니다. 미우미우가 유행시킨 폴로 셔츠, 안경은 개성을 드러내도록 도와주는 아이템입니다. 1년에도 수십 가지 트렌드가 새로이 등장하는 요즘, 자신만의 개성으로 소비자가 느끼는 피로감을 해소해주고 있다는 점을 빼놓을 수 없죠.

지난여름, 제인 버킨이 세상을 떠난 이후 다시금 주목받고 있는 ‘가방 꾸미기’ 트렌드 역시 미우미우와 밀접하게 맞닿아 있고요. 패션 피플이 은근한 방식으로 취향을 드러낼 방법을 찾는 와중에, 미우미우는 몇 시즌째 다양한 ‘백 액세서리’를 출시하고 있습니다. 이제 막 시작된 ‘바지 꾸미기’ 유행에서도 미우미우가 활약할 여지는 충분하고요. 시대정신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그에 맞는 처방을 내린 미우미우는 2025년에도 고점을 경신할 수 있을까요?

사진
Getty Images, GoRunway, Phil Oh
디자인
US Vogue, Vogue Busi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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