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타: 마지막 기회의 땅’, 외국에서 남자들이 총 쏘는 이야기가 아니다
해외 로케이션, 유명 남자 배우, 그리고 총소리. 영화 <보고타: 마지막 기회의 땅>(이하 <보고타>) 예고편을 보고 느낀 짤막한 인상이다. 외국 어딘가를 배경으로 유명한 한국 남자 배우들이 총을 쏠 수밖에 없는 갈등에 휘말리는 이야기겠구나 싶었다. 그러고 보니 2023년에도 외국에서 남자들이 싸우는 내용의 한국 영화가 개봉되었다. 황정민과 현빈이 주연을 맡은 영화 <교섭>은 탈레반에 납치된 한국인들을 구하기 위해 외교관과 국정원 요원이 총을 쏘는 이야기다. 그런가 하면 <비공식 작전>은 하정우와 주지훈이 주인공을 연기했고 레바논에서 실종된 외교관을 구하기 위해 총알을 피하며 운전하다가 총도 쏘는 내용이었다. <보고타> 또한 그런 영화일 거라고 생각했다. 현지 범죄 세력과의 이권 다툼일까? 아니면 현지 경찰과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일까? 나와 비슷한 선입견을 가졌던 관객이라면 영화를 본 후 ‘의외’라는 반응을 보일 것이다. 외국에서 남자들이 갈등을 겪다가 총까지 쏘는 영화이기는 하지만, 갈등의 대상은 현지인이 아닌 한국인이기 때문이다.
배경은 1997년 IMF 사태 직후다. 한국에서 생활 기반을 잃은 주인공 국희(송중기)의 가족은 콜롬비아 보고타로 향한다. 그들은 콜롬비아를 미국으로 가기 직전에 거치는 ‘톨게이트’ 정도로 여긴다. 하지만 현실의 그들은 오갈 곳 없는 외부인일 분이다. 국희는 능력 없는 아버지 대신 현지에서 옷 장사로 크게 성공한 박 병장(권해효) 밑에서 일을 시작한다. <보고타>는 국희를 통해 이곳에서 한국인들이 만든 생태계를 자세히 보여준다. 한국에서 사들인 의류를 배에 태워 콜롬비아로 보내고 박 병장은 현지 세관과 군인에게 뇌물을 먹이며 물건을 밀수한다. 시장에 풀린 한국산 의류는 현지인에게 높은 품질과 세련된 디자인을 인정받으며 불티나게 팔린다. 박 병장을 대표로 내세운 한인 상인들은 그렇게 번 돈으로 또 다른 매장을 열고, 한국으로 달러를 보내며 세관 및 군인과의 관계를 다진다. <보고타>는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본 주인공 국희가 자신의 야심을 실현해나가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다. 국희는 가장 가난한 자들이 사는 1구역에서 가장 돈 많은 자들이 사는 6구역까지 가족의 거처를 옮기는 동안 자신의 꿈에서 한국을 지워간다.
아무것도 아니었던 주인공이 권력과 세력을 확장해나가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가 떠오르기도 하고, 이민자들의 꿈과 야망을 그린다는 점에서는 과거 할리우드에서 제작된 마피아 영화가 연상되기도 한다. 물론 <보고타>가 보여주는 갈등 양상은 그 영화들보다 규모가 작지만, 그래서 앞서 열거한, 외국에서 총 쏘는 한국 남자들의 이야기와 비교할 때 남다른 특징을 지닌다. <보고타>에서 가장 크게 부각되는 사건은 한인 상인들의 성장세를 가만히 두고 보지 않는 현지 상인들의 음모다. 하지만 국희에게 더 가혹한 건, 자신들이 살아온 방식에 변화를 주길 거부하는 한인 커뮤니티다. 모두가 더 큰 성공을 원하고, 그중 몇몇은 그런 사람들의 힘을 이용하기 위해 경쟁한다. 같은 민족인데도 학연과 혈연으로 이루어진 파벌의 세력 싸움이 벌어지는 가운데 국희는 그들로부터 외부인이라고 배척당한다. <보고타>의 긴장감은 일종의 총알받이로 국희를 이용하려는 그들의 계략과 그럼에도 그들의 신뢰를 얻어 끝까지 살아남는 국희의 투쟁에서 비롯된다. 개인적으로는 이민자끼리 서로 연대하며 살았을 것이란 따뜻한 감상을 끝내 허용하지 않는 시선이 흥미로웠다. 현지 로케이션으로 담아낸 공간의 생생함, 그리고 각각의 캐릭터가 지닌 치열한 욕망을 보여주는 송중기와 이희준, 권해효의 열연도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그처럼 흥미로운 구도를 갖춘 영화인 만큼 <보고타>가 관객에게 주는 선입견이 아쉬울 수밖에 없다. 다수의 관객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외국에서 달리고 총 쏘고 피 흘리는 남자들을 보여줄 수밖에 없었던 걸까. 한인 사이 갈등이라는 설정이 관객에게 비호감을 살까 우려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관객들에게 흥행에 실패한 영화들과 비슷한 인상을 주는 방식을 선택한 건 안타깝다. 조금 더 흥미로운 시도를 하려고 도전한 만큼, 이 영화를 알리는 방식에서도 좀 더 모험을 했다면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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