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지구의 기억을 돌아보다, ‘언두 플래닛’

2025.01.08

지구의 기억을 돌아보다, ‘언두 플래닛’

얼마 전에 들은 어느 중견작가의 말이 기억에 남습니다. 젊은 미술가들이 기후변화와 생태계 문제를 더욱 활발하게, 적극적으로 다루길 바란다는 얘기였습니다. 현대미술의 영역은 나날이 확장되고 있지만, 그에 비해 전시장에서 이런 문제를 제대로 다룬 작품을 언제 봤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 게 사실이지요. 그것이 현 인류의 가장 시급한 문제라는 건 인정하지만, 미술로 다룰 경우 지나치게 교훈적이라는 오해가 있기 때문일까요. 어쨌든 당면한 생태 문제를 예술적으로 잘 풀어내 세상과 나누는 건 요즘 현대미술에 주어진 과제 중 하나입니다.

나나 엘빈 핸슨, ‘그라운딩스’, 2024, HD, 스테레오, 43분. 작가 제공

아트선재센터에서 오는 1월 26일까지 열리는 그룹전 <언두 플래닛>은 예술을 매개로 지구라는 행성의 기억을 돌아보고 새롭게 도래할 생태계의 가능성을 상상해보는 전시라는 점에서 꼭 추천하고 싶습니다. 제목의 ‘언두(Undo)’는 ‘원상태로 하다’라는 뜻이지만, 동시에 ‘열다’, ‘풀다’의 의미도 있다는 점에서, 현재 우리가 무엇을 풀고 열어야 하는지 현대미술가들의 통찰을 빌려 돌아볼 수 있는 기회죠.

<언두 플래닛>이 흥미로운 이유는 큐레이팅에 의존하는 게 아니라 작가들의 실천이 만들어낸 전시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2023년부터 강원도 철원군에서 진행한 장소 특정적 연구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는데요. 양혜규, 댄 리, 타렉 아투이, 홍영인 그리고 이끼바위쿠르르는 각각 서울대학교 기후연구실, 철원석담짚풀전수회, 철원 소재 어린이 합창단 ‘평화를부르는아이들’, DMZ두루미평화타운, 양지리 마을공동체 등과의 협업을 통해 리서치와 워크숍을 진행했습니다. 전시는 2023년부터 현장 연구를 진행한 작가 5인(팀)을 포함, 작가 총 17명(팀)의 예술적 연구와 결과를 ‘커뮤니티(Community)’, ‘비인간(Non-human)’, ‘대지 미술(Land Art)’ 등의 주제로 펼쳐 보입니다. ‘공동체 정신’, ‘인간 중심적 사고를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 ‘생태와 환경에 대한 이전의 미술사적 시도’ 등으로 번역되는 세 가지 주제는 작금의 생태계 문제를 각기 고유한 시선으로 대면하고자 하는 작가의 행보입니다.

댄 리, ‘익명의 개체들 1’, 2021, 종이에 목탄, 소프트 파스텔, 수채화, 76×56cm. 바바라 빈 갤러리 제공. 사진: Nick Ash
타렉 아투이, ‘더 하이브—워크숍’ 기록, 2023. 리얼 디엠지 프로젝트 제공. 사진: 아인아
이끼바위쿠르르, ‘랩소디’, 2024, 영상: 2 채널 비디오, 4K, 컬러, 사운드, 7분 19초, 4분 32초 루프 / 그래피티: 식물, 한지 위에 아크릴, 150×210cm 3점. 작가 제공

특히 저는 ‘비인간’을 주제로 한 작가들의 작품과 1970~1980년대 대지 미술을 함께 만날 수 있다는 것이 흥미로웠습니다. 지난 수십 년 전부터 미술가들은 이미 생태와 환경에 관심을 가져왔고, 다양한 미학적, 과학적, 참여적 도전을 수행했습니다. 이들은 대지로 상징되는 자연 전체를 작업의 주제와 소재로 다뤄왔는데요, 로버트 스미스슨, 낸시 홀트, 임동식, 시마부쿠, 하셀 알 람키, 데인 미첼 등의 작품이 어제와 오늘을 이어냅니다. 이렇게 자연의 섭리를 온전히 존중하는 일련의 작업은 오늘날에 이르러 아예 인간과 함께 살고 있는 동식물을 ‘비인간’으로 상정, 인간 중심의 시선 자체를 전복합니다.

로버트 스미스슨, ‘나선형 방파제(필름)’, 1970, 16mm 필름을 변환한 영상, 35분. ©홀트/스미스슨 재단. 라이선스: 뉴욕 Artists Rights Society. 배포: 뉴욕 Electronic Arts Intermix
낸시 홀트, ‘태양 터널(필름)’, 1978, 16mm 필름을 변환한 영상, 컬러, 사운드, 26분 31초. ©홀트/스미스슨 재단. 라이선스: 뉴욕 Artists Rights Society. 배포: 뉴욕 Electronic Arts Intermix
임동식, ‘고개 숙인 꽃에 대한 인사’, 2005, 캔버스에 유화, 182×227cm. 작가 제공
시마부쿠, ‘세우기’, 2017, 디지털 잉크젯 프린트, 70×105cm. 작가 제공
하셀 알 람키, ‘오르팔레스’, 2024, 직물에 자연 원료와 오일, 가변 크기. 작가 제공

양혜규는 ‘봉희’라는 꿀벌을 주인공으로 분단과 냉전, 긴장과 충돌로 점철된 세상을 돌아보는 ‘황색 춤'(기초 연구)(2024), 양봉용 기성품 벌통과 본인의 기존 작업을 접목한 신작 조각 두 점을 선보입니다. 홍영인은 철원으로 날아오는 겨울 철새인 두루미를 탐조해 두루미 가족을 위한 신발을 왕골로 제작했고요. 시몽 부드뱅은 유럽 곳곳에 출몰한 붉은여우 이야기를, 실라스 이노우에는 미생물이 번식하는 소형 생태계를 조성하는 작업을 공개합니다.

양혜규, ‘황색 춤’, 2024, 싱글 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6분 31초, 가변 크기. 이 영상 작업은 자이언트스텝의 기술 협찬으로 제작되었습니다. 음악: 윤이상, 오보에 독주곡 ‘피리’, 1971. 녹음: 하인츠 홀리거 1977년 9월 17일, ©국제윤이상협회 2005, CD IYG 004. 악보: 보테앤복/부지앤훅스, 베를린(2025 신판). 영상 작품 출처: 김범, ‘“노란비명” 그리기’, 2012
홍영인, ‘학의 눈밭’, 2024, 왕골, 자연 염색한 왕골, 스테인리스 스틸, 두루미를 위한 여덟 쌍의 신발 설치, 가변 크기. 협업 제작: 짚풀공예 명인, 이충경. 리얼 디엠지 프로젝트 및 작가 제공. 사진: 아인아
시몽 부드뱅, ‘브뤼셀 붉은여우’, 2024, 싱글 채널 비디오, 15분. 지원: 대안공간 루프(서울), Fondation des Artistes(파리), Fondation Thalie(브뤼셀). 작가 제공

2024년 끝자락은 정치와 일상의 재난으로 침울한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현실 세계의 재난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면 그 한가운데에는 지나치게 인간 중심적인 사고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술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예술을 대면해야 할까요? 미술가들의 고민도 더 깊어지고 있을 것이고, 그래서인지 이들이 상상하고 제시하는 새로운 시간, 새로운 미래를 향한 공감의 영역은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지속 가능한 삶에 대한 화두를 건네는 <언두 플래닛>이 현 세계를 향한 애도의 예술적 메시지로 다가오는 요즘입니다.

정윤원(미술 애호가)
사진
아트선재센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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