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고요한 읽기

2025.01.10

고요한 읽기

2024년 12월 31일 밤, 가만히 한 권의 책을 펼친다. 하나의 세계와 만나는 일이다. 2025년 1월 1일, 다시 그 한 권의 책을 펼쳐 읽다 멈춘 문장을 다시 읽기 시작한다. 천천히 그다음 문장으로 이어 읽어나간다. 하나의 세계와 만나는 일일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하나의 수행. 고요해지기 위한 기도. 고요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잠행. 고요의 세계로 가는 기행(紀行). 이승우 작가의 <고요한 읽기>(문학동네, 2024)다. 이때의 고요란 달리 말하면 집중하기다. 집중한다는 것은 또 다르게 말하면 생각하기일 것이다. 이 책 <고요한 읽기>는 ‘Cogito(생각하다)’의 어원이 ‘흩어져 있는 것들을 한데 모으다’에서 유래했음을 말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흩어져 있는 것을 한데 모으기 위해서는 집중해야만 한다. 집중하는 것은 고요해지는 것이다. 집중과 고요 속에서 얻은 생각은 문장을 통해 비로소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 오랜 집중과 고요의 시간이 쌓이고 쌓여 한 권의 책이 된다. 하나의 세계가 된다.

이승우 <고요한 읽기>(문학동네, 2024)

그 과정 끝에 이 세상에 온 책이 <고요한 읽기>다. 작가 이승우가 집중해 한데 모은 생각의 조각들이자 그 고요의 상태에 관한 내밀한 고백이다. 동시에 <고요한 읽기>는 작가를 그와 같은 고요한 상태에 이르게 한 책들이 남긴 강렬한 흔적이고 고요한 읽기를 통과한 후 읽고 쓰기란 무엇인지에 관한 작가의 대답이며 작가와 세계 사이의 관계에 관한 질문이다. 한 사람이 그 자신이라는 불가사의한 세계를 탐구하기 위하여, 한 명의 작가가 자신의 작가 세계를 짓기 위하여, 그리하여 자기 밖 세계와 마주하기 위하여 어떤 생각의 과정과 성찰의 경로를 밟아왔는가를 엿볼 수 있다. 지적이면서도 인간적이며 아름답기까지 한 이 과정에 동행하는 것만으로도 벅차고 충만해진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마르셀 프루스트가 작품이란 “그 책이 없다면 스스로 보지 못했을 것을 볼 수 있도록 작가가 독자에게 제공하는 일종의 광학기구”라고 했던 말을 인용하는 <고요한 읽기>야말로 내게는 또 하나의 미더운 광학기구다.

<고요한 읽기>를 이제 막 한차례 완독했을 뿐이다. 읽고, 쓰고, 생각하는 한 사람으로서 나는 이 책을 두고두고 다시 읽기로 마음먹었다. 아직 나는 이 책의 상태를 온전히 이해하지도, 체감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세계는 넓고도 깊다. 소포클레스, 호메로스, 헤르만 헤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프란츠 카프카, 밀란 쿤데라, 장 폴 사르트르, 에마뉘엘 레비나스… 작가 이승우가 경유하는 저 개별 작가들의 고요의 상태를 어찌 다 짐작할 수 있을까. 작가의 밀도 높은 집중의 시간을 어찌 다 이해했다고, 알아들었다고, 함께했다고 할 수 있을까. 가능하다면, 더디고 느리게, 가능하다면, 최대한 집중해가며 한 문장 한 문장을 다시 읽고 싶다. 그래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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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독자적이고 개별적인 실체가 아니라 그가 읽은 놀라운 책들의, 우리가 형언할 수 없는 신비스러운 작용에 의해 이루어진 환영이다.”(51쪽) 나는 자처해 기꺼이 이 환영들에 둘러싸인다. 생각에 골몰하고 그 끝에 고요해질 수 있는 이만한 길이 또 어디 있겠는가. 이 책을 두고 책에 관한 책이라고 말하는 건 잘못된 표현이다. 이 책은 사유의 가능성을 타진하고 사유의 힘을 강하게 믿으며 사유하지 않음이 불러일으킬 무시무시함을 정확하게 경계한다. 어쩌면 이것은 이 시대의 윤리이자 도덕론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새해 인사와 안부를 <고요한 읽기>로 대신 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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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24,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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