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한 배꼽을 가진 자의 항변
배꼽 수술이 성형 분야의 새로운 토픽이다. 해괴하다고 놀리지 말길. 억울한 배꼽을 가진 자들은 지금 몹시 진지하다.
겨울은 배꼽을 떠올리기 좋은 계절이다. 크롭트 톱과 보디 프로필 유행은 2025년에도 계속될까? 지금 손을 대면 봄부터는 사방을 둘러봐도 아동복처럼 ‘짧뚱한’ 상의만 파는 세상에 짜증이 덜 날까? 비키니 시즌 전에 멍 자국을 없애려면 언제까지 결단을 내려야 할까? 꿰맬까, 당길까, 피어싱을 할까?
인체 모든 부위에 미의 기준이 존재한다는 건 세상의 비밀이 아니다. 이제는 배꼽이다. 이효리의 세로 배꼽이 세상을 충격에 빠뜨리고 성형 논란을 일으킨 2000년대 초만 해도 지금보다는 상황이 나았다. 당시 언론은 ‘배꼽의 경제학’을 떠들어댔고, 한국 대중은 배꼽도 디자인이 가능하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당시 이효리 역시 “그런 수술도 있느냐”는 반응이었다). 하지만 신체를 나노 단위로 품평당하고 그걸로 돈을 버는 연예인이 아니고서야, 배꼽 정도는 가리면 그만이었다.
너도나도 소셜 미디어에 일상을 전시하고 콘텐츠로 돈벌이를 하면서 연예인과 일반인의 경계가 흐려진 지금은 다르다. 중년쯤 되면 적당히 미모 경쟁에서 은퇴하던 예전과 달리 11자 복근을 뽐내는 ‘핫 걸’ 스타일 40~50대 여성을 보기도 쉬워졌다. 그러니 한번 콤플렉스는 영원한 콤플렉스다. 세상 여자들이 나 빼고 모두 ‘관리’라는 걸 하며 사는 것 같고, 그 성공의 증표로서 잘록한 허리와 둥근 골반 사이에 생크림 케이크 위 체리처럼 예쁜 배꼽이 있다.
허리를 강조하는 X자 패션 실루엣의 유행도 거들었다. 최근 몇 년 사이 옷 가게에 가보면 멀쩡한 길이의 티셔츠를 발견하기가 어려웠다. 모두 만들다 만 것처럼 아래가 댕강 잘려 있었다. Y2K 스타일이 유행하고 안무가 과격해지면서 K-팝 아이돌들은 볼륨 있는 상하의 사이로 자주 맨 허리를 드러냈다. 그 세계에서도 지나친 노출은 천박해 보인다는 인식, 복부를 전부 드러내기보다 상복부만 노출하는 편이 비율 좋아 보인다는 상식이 자리 잡으면서 배꼽까지 드러내는 경우는 드물었다. 하지만 어쩌다 한 번이라도 세상 구경을 나온 배꼽은 여지없이 품평 대상이 된다. K-팝을 추종하는 여성 스트리트 패션 트렌드에서는 당연히 배꼽이 토픽일 수밖에 없다.
영국인 여성 크로스핏 선수 커스티 스트라우드(Kirsty Stroud)는 배꼽이 없다. 태어날 때 생명을 위협하는 질환을 치료하기 위해 응급 수술을 받은 후 배꼽 없이 살아오며 어릴 때는 놀림도 많이 받았다. 하지만 근육을 키우고 대회에 참가하면서 오히려 그 독특함 때문에 스타가 되었다. 배꼽은 중요한 게 아니라는 교훈 같지만 그의 몸을 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의 우락부락한 초콜릿 복근은 시선을 압도한다. 그 정도는 되어야 배꼽이 잊힌다. 운동으로 그런 몸을 만들려면, 아니 시대의 이상에 들어맞는 11자 복근과 동그란 엉덩이 근처라도 가려면 나의 땀으로 한강을 가득 채울 각오를 해야 한다. 잘빠진 배꼽은 이 수고를 덜어준다. 길쭉한 배꼽은 없는 복근도 있어 보이게 해주는 ‘치트 키’다.
탯줄을 제거하는 방식이 배꼽 모양을 결정한다는 신화적 믿음이 있다. 하지만 아기 배꼽에 붙은 탯줄은 의사가 잘라내는 게 아니라 생후 6~8일 만에 말라서 떨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의사들은 배꼽 모양이 유전의 영향을 더 크게 받는다고 설명한다. 복부 근육과 탄력 정도도 영향을 미친다. 여기에 동양인의 설움이 있다.
인체 대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체질량 지수(BMI), 연령, 성별이 같을 때 아시아인이 백인에 비해 체지방률이 높고 복부 비만이 두드러진다고 말한다. 간 지방 함량도 더 높다. 우리의 알뜰한 몸이 가을 다람쥐처럼 배에 지방을 차곡차곡 쌓는 바람에 팽팽하게 당겨진 복근과 배꼽을 갖기가 더 어려운 것이다.
내 배꼽은 원래 가로였다. 2023년 유튜브 ‘차린건 쥐뿔도 없지만’ 채널에 출연한 비비는 자기가 ‘억울한 배꼽’을 가졌다고 고백했다. 진행자 이영지도 맞장구를 쳤다. “내가 보디 프로필을 위해 한 20kg을 뺐다. 그래도 계속 가로 배꼽이었다. 복근이 생겨도 이랬다.” 나는 음주 방송을 싫어하는데 그들의 대화에는 깊이 공감해 모니터 너머로 함께 소주잔을 들었다. 심지어 내 배꼽은 너무 깊어서 꼼꼼히 물기를 제거하기도 어려웠다. 저체중일 때도 그랬다.
그나마 가로 배꼽은 배 한가운데 웃는 입처럼 보여 귀엽기라도 했다. 그래, 얼굴이 무뚝뚝하니까 배꼽 너라도 활짝 웃으렴, 이 헤픈 계집애야, 그랬다.
그랬는데, 복강경으로 자궁근종 수술 후 내 배꼽은 울상이 되었다. 상단이 찌그러진 T자형 배꼽이 된 것이다. 배꼽 위쪽이 미세하게 불룩했고, 깊은 배꼽 안에 울퉁불퉁한 흉터 살까지 생기면서 때를 제거하기는 더 어려웠다. 며칠 방심하면 악취가 난다. 면봉과 오일을 동원해 꼼꼼히 청소해도 흉터 살 주변으로 항상 이물질이 남아 있다. 나는 남편의 얕은 O자형 배꼽마저 부럽다. 얕은 O자형 배꼽은 탈장 흔적일 수도 있지만 최소한 관리는 쉽다.
다른 모든 부위가 그렇듯 배꼽도 한번 신경 쓰이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다. 어딜 가나 배꼽만 보인다. 운동 후에는 배를 위쪽으로 살짝 당겨본다. 배꼽이 길쭉해지면서 복근 가운데가 멋지게 갈라진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잠시 행복하다. 하지만 손가락을 놓는 순간 배꼽은 다시 울상을 짓는다. ‘배꼽 응시(Navel-gazing)’라는 영어 표현은 자만에 빠지거나 안주한다는 의미인데, 어째서인지 내 배꼽은 응시할수록 자신감을 떨어뜨린다. 출산이나 급격한 체중 변화로 배꼽 형태가 변형된 사람들은 스트레스가 클 것이다.
일부 의사들은 이런 상황을 손쉽게 해결할 수 있다고 조언한다. 손가락 대신 복부 실 리프팅으로 몇 년 동안 배를 당겨 올릴 수 있고, 배꼽을 절개하고 지방을 채워 넣어서 영구히 배꼽 모양을 바꾸는 것도 가능하다. 서울 강남에는 배꼽 성형으로 유명해진 병원이 최소 세 군데 있다. 배꼽 수술은 역사가 짧고 데이터가 많지 않아서 추천하기는 어렵다. 부작용 때문에 재수술을 거듭하는 사례도 종종 본다. 하지만 성형 정보를 공유하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배꼽 성형 병원의 목록이 비밀이 아니다.
나는 발리에 산다. 매일 세계 방방곡곡에서 날아온 비키니 걸들을 본다. 다양한 배꼽을 보고 있노라면 조금 정신이 차려진다. 여기선 한국 여자와 무슬림 여자를 제외하면 모두 아랫배가 나와도, 왁싱을 안 해도, 엉덩이에 셀룰라이트가 덕지덕지 붙어 있어도, 비키니를 입고 돌아다닌다. 그래도 잘만 놀고, 연애하고, 셀피를 찍는다.
풍채 좋은 여자가 비키니를 입고 호탕하게 웃을 때, 포동포동한 뱃살 사이에서 함께 미소 짓는 가로 배꼽은 오히려 육감적이다. T자건 O자건 별 모양이건 마찬가지다. 당당한 배꼽은 다 아름답다. 이때의 당당함이란 ‘나는 내 몸을 사랑한다’는 ‘보디 포지티브’와는 또 다른 의미다. TV, 인터넷, 잡지, 광고 속 2D 이미지와 확연히 구별되는 리얼리티, 신체의 미추를 초월한 자유로운 영혼이 주는 울림이다. 그 옆에서 밥을 굶어가며 만든 가녀린 몸은 애처롭고, 철저한 관리로 만든 근육질 몸매는 존경스러울 뿐 인간미가 없다. 그럼에도, 부끄럽지만, 내가 그들의 배꼽을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
나는 완벽한 몸매가 아니면 타인에게 드러낼 가치가 없다고 세뇌받으며 자란 전형적인 한국 여자다. 내가 타인의 몸을 의식하듯 타인도 나의 몸을 품평할 거라는 두려움도 크다. 나는 패션 잡지 에디터였기 때문에 미디어의 멋진 몸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안다. 화보에서는 모델의 복부에 메이크업을 하고 조명으로 근육의 음영을 강조하고 때로 배꼽 모양도 포토샵으로 수정한다. 그런데도 내 눈은 여전히 이런 2D 이미지에 속는다. 누구나 노력하면 피트니스 강사들처럼 멋진 몸을 가질 수 있다는 세상의 격려는 오히려 평범한 몸에 죄책감이 들게 한다. 우울한 배꼽이 내 게으름의 증거 같아서 부끄럽다.
이러느니 복부 실 리프팅이라도 하면 어떨까, 자꾸 관심이 간다. 연예인 비비조차 억울한 배꼽으로 워터밤 무대에 서고, 배꼽이 콤플렉스라는 화사도 노출 의상을 잘만 입는데 나 따위가 뭐라고, 싶다가도 거울 앞에서 윗배를 손가락으로 끌어당기는 순간 유혹이 밀려든다. 이렇게나 달라 보인다고? 그런데 그게 힘 안 들이고 가능하다고? 그럴 때면 다시 해변의 리얼리티로 눈을 돌리려고 노력한다. 대체 배꼽이 뭐라고 이 난리인가 싶다.
패션 트렌드가 바뀌면 우리는 배꼽을 잊게 될까? 배꼽이 지나가면 또 새롭게 집착할 부위가 생길까? 예컨대 스키니 진과 레깅스 너머로 드러나는 서혜부 돌출 정도가 미의 기준이 되고 발 빠른 성형외과 의사들이 경쟁적으로 대처법을 내놓는 세상이 하루아침에 오지 말란 법은 없다. 나날이 추가되고 수시로 급변하는 미의 기준을 계속 따를 것인가, 이쯤에서 포기할 것인가, 배꼽이 내게 묻는다.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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