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은 무슨 일을 하는가
새해니까. 새로이 뭔가를 시작하는 것도 좋겠지만, 지난해 못다 한 일이나 미뤄둔 과제를 하나씩 끄집어내 완수하는 것도 괜찮겠다. 완독하지 못한 책 읽기는 어떨까. 사라 아메드의 <감정의 문화정치-감정은 세계를 바꿀 수 있을까>(오월의봄, 2023)가 그중 하나다. 나는 감정과 정치, 그 각각의 것, 그리고 그 둘 사이의 연관성 내지는 상관성을 탐색하는 작업에 오래전부터 매혹돼왔다. 유동성, 움직임, 동태(動態), 흐름, 순환, 비정형성 등의 단어, 그 말이 가리키는 상태에 관심을 둬온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페미니즘, 퀴어, 현상학, 후기 식민주의, 다문화주의, 감정 연구 등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며 연구해온 저자 사라 아메드의 시선과 관심사가 눈길을 사로잡은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 책은 감정, 정치, 문화를 잇고 아우르고 교차하는 귀한 연구서로서 현실의 구체적인 사례를 끌어와 철학적이고 정치적인 화두를 던진다.
저자는 ‘감정이란 무엇인가’라고 정의(定義) 내리는 게 아니라 ‘대체 감정은 무슨 일을 하는가’를 집요하게 묻는다. 감정을 지극히 개인적인 느낌이나 인상 정도로 치부해버리고 사사로운 것이라고 평가절하하며 그만큼 타인과 공유될 수 없고 공적인 것으로는 고려될 수 없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아메드는 감정을 개인적이고 심리적인 것으로 다루는 방식을 비판한다. 동시에 아메드는 개인의 감정을 지나치게 구조적인 측면에서 바라보고 사회적으로 형성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입장에도 반대한다. 감정이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일어나고 강화되고 구조화되는가, 감정이 어떤 식으로 사회적 편견과 폭력을 형성하는가를 들여다보고 싶어 한다.
그에 따르면 감정 또는 감정의 속성은 개인 또는 집단이 지닌 고유한 특성이 아니다. 이러한 접근이 가능하려면 특정한 몸이 애초부터 ‘특정한 감정’을 지니고 있다는 전제가 필요한데, 아메드는 여기에 반기를 든다. 몸 ‘안’에 감정이 있는 게 아니라, 감정은 몸의 표면을 형성한다는 게 그의 입장이다. 이때 몸의 표면은 오랜 기간 행동이 반복됨으로써 타자를 향하거나 타자에게서 멀어지는 방향 설정을 통해 모양을 갖춘다. 즉 감정은 개별 인간 안에 있는 게 아니라 타자와 세계와의 관계에 따른 것이고, 몸 안에서 밖으로, 다시 밖에서 안으로 오고 가는 관계, 다르게 말하면 순환과 교환의 상태에 가깝다. 이러한 감정은 사람들을 묶어내는 접착제로서 기능할 때가 있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 이른바 주류 공동체가 형성, 재형성된다. 이 과정은 다르게 말하면 소수자에 대한 폭력이 정당화되고 사회규범이 재생산되는 과정이다.
‘감정을 즉각적인 것이 아니라 매개된 것으로 이해하는 일은 지식이 느낌과 감각으로 이루어진 몸이라는 세계와 분리될 수 없음을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지식은 우리를 땀 흘리게 하고 떨리게 하며 몸서리치게 만드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 모든 느낌은 무엇보다 몸의 표면에서 느껴진다. 몸의 표면은 우리가 세계를 어루만지고 세계가 우리를 어루만지는 곳이기 때문이다.’(366쪽)
몸과 타자 사이의 매개적, 관계적인 것으로서의 감정. 그중에서도 아메드는 고통, 증오, 공포, 역겨움, 수치심 같은 감정을 중요하게 살핀다. 그 각각의 감정이 어떻게 발생하고, 그런 감정이 어떤 식으로 매개되는지, 그에 따라 어떻게 때론 혐오와 차별을 강화하는 방식이 되는지에 관해서 말이다. 이를테면 ‘고통은 어떻게 정치적인 문제가 되는가?’ 고통 그 자체는 고통받는 당사자의 몫일 수밖에 없지만, 우리가 그 고통을 알 것 같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고통에 응답하는 윤리라는 게 있다면, 그것은 타인의 고통은 그저 타인만의 것으로 생각하는 것도 아니요, 그 고통이 나와 무관하다는 뜻도 아니다. 그것은 ‘개인이 알 수 없고 느낄 수 없는 것이 영향을 미치도록 자신을 열어둔다는 것’이라는 게 저자의 입장이다.(78쪽) ‘공감을 통해서도 전해질 수 없는 고통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주의 깊게 경청하는 일이 아니라 [몸, 역사, 공동체를] 다르게 살아내는 일이다. 이는 행동을 요구하고 집단적 정치를 요청한다. 고통은 화해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에 기초한 정치가 아니라 화해할 수 없다는 사실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정치, 다른 이들과 함께, 다른 이들 곁에서 살면서도 우리가 하나가 아님을 배우는 정치를 우리에게 요청한다.’(98쪽) 타인과 함께, 타인 곁에 있되,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하나’라는 식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 그 두 가지 상태가 동시에 가능하게 하는 정치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또 자신이 입은 상처를 자기 정체성으로 삼는 일이 상처를 물신화하는 일이라며 경계한다. 상처를 물신으로 만드는 일이 문제인 이유는 서로 다른 피해를 동등한 것으로 전제하며 모든 피해를 동등한 것으로 가정하게 되면 피해는 자격의 문제가 돼버린다고 일침을 가한다.
소수자, 이방인, 타자를 향한 혐오 감정을 느낄 때 몸이 반응하는 역겨움도 권력관계를 설명하고 강화하는 데 핵심적인 감정이다. 상대 앞에서 자신의 모습이 드러날 때 경험하는 감정인 수치심도 상대에 대한 사랑이나 욕망이 선행된다는 점에서 매개적이다. 감정과 몸, 몸과 권력, 감정과 권력이 상호 관계를 맺는 방식을 좇아가다 보면 우리가 당면한 현실 사회, 정치가 어떤 방식으로 작동되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그리하여 이 책이 궁극적으로 제기하는 질문은 이런 것이다. ‘도대체 사회적 변혁은 왜 이리 성취하기 어려울까? 왜 기존 지배 권력은 완고하게 계속되는 걸까?’ 여기에 대해 아메드는 투자, 끈적임, 애착이라는 또 다른 개념으로 설명해나간다. 구조적 모순을 발견하고 인식한다고 해도 우리가 그러한 규범에 여전히 투자하고 애착을 갖고 끈적이는 감정에 달라붙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세계의 변화를 이끌기 위해서는 규범을 따르지 않는 삶의 가능성을 만들어내기 위한 정치적 행동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이 책은 1999년부터 2003년까지 쓰였고 미국 사회, 특히 9·11 테러 이후 달라진 서구 사회에 대한 분석을 주요하게 다루지만, 여전히 사회적 참사와 공포가 난무하는 현실에 유의미한 분석 틀과 실천적 제언이 돼줄 것이다. 혼란과 교차성의 시대를 읽는 하나의 유용하고 흥미진진한 광학기구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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