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적이면서도 변태적인 면이 있죠” 션 맥기르의 맥퀸이 기대되는 이유
2023년 10월, 션 맥기르는 가장 감각적인 패션 하우스로 꼽히는 맥퀸의 수장으로 발탁되며 모두를 놀라게 했다. 〈보그〉는 이 상냥한 아일랜드 청년이 맥퀸의 다음 장을 어떻게 써 내려가는지 대화를 나눴다.


파리에는 일주일 내내 비가 내렸다. 튈르리 정원의 플라타너스가 잎을 전부 떨굴 만큼 계속된 비였다. 하지만 션 맥기르(Seán McGirr)가 루브르 건너 센강 좌안의 에콜 데 보자르에서 맥퀸의 2025 봄/여름 컬렉션을 선보인 날 밤, 도시는 9월의 황금빛 햇살로 물들었다. 불과 1년 전 JW 앤더슨 스튜디오에서 발탁된 서른여섯 살의 더블린 출신 디자이너는 침착한 모습으로 케어링 그룹 회장 겸 CEO 프랑수아 앙리 피노(François-Henri Pinault)를 맞았다. 그는 옷걸이에 걸린 수많은 헤리티지 디자인을 보여주며 부드러운 아이리시 억양으로 하우스 유산을 어떻게 재해석했는지 설명했다. 고급 남성복 매장이 모인 저민 스트리트에서 영감을 얻은 턱시도에 소용돌이 형태 라펠을 더하고, 영성체 때 입는 새하얀 커뮤니언 드레스에 도발적인 반투명 크레이프 원단을 적용하며, 럭비 톱을 이튼 스쿨 스타일 프릴로 장식했다.
맥기르의 차분한 태도는 상대적인 것일 수 있다. 쇼를 앞둔 20분 동안 VIP 게스트가 도착할 때마다 파파라치의 외침이 신고전주의풍으로 꾸민 에콜 데 보자르 안뜰에 메아리쳤기 때문이다. 백스테이지에서는 손목에 핀쿠션을 낀 맥퀸 스태프들이 어깨에 두른 줄자를 휘날리며 바삐 움직였다. 가운 차림의 모델들은 차렷 자세로 대기 중이었고, 한구석에서는 자수 작업자가 쇼 피날레를 장식할 머리 장식의 은색 술을 다듬고 있었다.
소란 속에서도 이 마지막 의상의 디테일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한때 런던 밤거리를 수놓은 반항아들에게 바치는 헌사이자 레스터 스퀘어의 나이트클럽 카페 드 파리(Café de Paris)에서 선보였던 알렉산더 ‘리’ 맥퀸의 두 번째 런웨이 쇼, 1994 가을/겨울 컬렉션 ‘밴시(Banshee, 아일랜드 민화에 등장하는 여자 요정)’에 대한 오마주다. 하지만 오늘 밤은 30년 전 쇼를 보러 왔던 이들보다 더 많은 경비 인력이 에콜 데 보자르의 높다란 철문을 지키고 있다. 백스테이지 밖으로 나가자 셀마 헤이엑이 도착했고, 저물녘 파파라치들이 터뜨린 플래시로 그녀의 시퀸 드레스가 디스코 볼처럼 반짝였다. 다시 쇼장 안으로 들어왔을 때 맥기르는 백스테이지로 슬쩍 빠져나가 패션계의 평가에 대비해 마음을 다잡고 있었다.
나는 지난해 몇 개월 동안 디자이너를 따라다녔다. 3월 데뷔 쇼 이후 중요한 컬렉션이 될 9월 쇼를 준비하면서 그가 압박감을 드러낸 건 9월 쇼 직전의 순간이었다. “오늘 아침 7시에 출근해서는 내 오른팔인 직원에게 전화해 ‘전부 무너뜨리고 다시 쌓아야 해’라고 말했습니다.” 쇼가 72시간도 채 남지 않은 시점이었지만 그는 평소처럼 가벼운 말투로 말을 꺼냈다. 맥퀸의 생제르맹 임시 스튜디오 3층 소파에 앉은 우리 주위는 모델 보드와 단추 바구니가 가득했다. 맥기르는 스스로를 ‘패션 위크 한정 흡연자’라고 밝혔지만, 최근 며칠 동안 자는 시간보다 말보로 골드를 피우는 시간이 더 많은 듯 보였다. 하지만 그는 모든 것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찬 상태였다. 가죽 깃털로 만든 모호크족 스타일의 버디(Birdee) 힐부터 조각가 루이즈 부르주아(Louise Bourgeois)에게 영감을 받아 새로 개발한 거미줄 레이스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창백한 피부, 짙은 머리칼, 대서양같이 푸른 눈동자, 끊임없이 움직이는 듯한 인상 등 맥기르는 전형적인 아일랜드인의 특징을 지녔다. 오늘 그는 가슴에 거꾸로 뒤집힌 해골을 자수로 새긴 맥퀸의 타이다이 티셔츠와 스키니 진, 스니커즈 차림이다. “입어야 할 맥퀸 옷이 많아서 좀 바빴습니다. 어떤 핏인지 확인하고 개선하는 게 중요하거든요. 때로는 생각대로 나오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요.” 그는 거리낌 없이 자주 미소 지었다. 웃을 때마다 오른쪽 뺨에 생기는 보조개가 요정 같은 얼굴을 돋보이게 했다.
맥기르는 상대방을 무장 해제시킬 정도로 다정하지만 일 처리엔 철두철미하다. 아래층 아틀리에에서는 그의 지시에 따라 아이보리색 캐시미어로 해골 마스크를 짜고, 오간자 원단을 손으로 찢어 양털처럼 보이도록 연출하고 있었다. 팀원 모두 사흘에 걸쳐 피팅을 막 끝낸 상태였지만, 맥기르는 하룻밤 만에 전부 다시 맞춰보기로 결정했다. 작업을 방해하려는 게 아니라 모든 T-바 디테일이 의도대로 표현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라고 나를 재차 안심시켰다. 이 과정은 센트럴 세인트 마틴에서 디자인 천재를 대거 배출한 전설적인 인물 루이스 윌슨에게 철저히 훈련받은 결과다(윌슨의 제자 중에는 크리스토퍼 케인, 조나단 선더스, 시몬 로샤, 1992년 그녀가 맡은 첫 졸업반에 속한 리 맥퀸도 있다. 맥기르는 2014년 그녀가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 졸업생이다).
“개별 지도 시간에 윌슨 선생님은 ‘아니, 이게 아니야. 아직 아니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축구 훌리건처럼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거친 표현을 써가면서 말이죠.” 맥기르는 자신이 겪은 가장 큰 인내력 테스트였다고 회상했다. “선생님은 ‘닥치고 그냥 해. 그냥 하라고’라는 식이었어요. 아주 현실적이셨죠.”
2023년 케어링에서 사라 버튼이 맥퀸을 떠날 것이라 발표했을 때 많은 이들이 외부 디자이너가 이 유명한 하우스를 이끌 수 있을지에 의문을 가졌다. 패션계를 ‘코드’로 설명하자면, 맥퀸의 코드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에게 특히 어려운 도전 과제이기 때문이다. 2025년 2월이면 리 맥퀸이 세상을 떠난 지 무려 15주년이 되지만, 문화 전반에 그가 미친 정서적 영향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가 선보였던 ‘하일랜드 레이프(Highland Rape)’ 쇼와 ‘헝거(The Hunger)’ 쇼는 X세대 에디터들에게 1990년대 패션의 가장 감격스러운 순간으로 남아 있고, 레이디 디올 백과 2.55 백을 구별하는 것조차 어려운 밀레니얼 세대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의상 연구소의 ‘새비지 뷰티(Savage Beauty)’ 전시를 보기 위해 수천 명이 6시간 동안 줄을 섰다. Z세대 틱톡커들은 맥퀸의 2003년 해골 스카프를 정체성으로 삼고 있다(그들 중 일부는 카렌 엘슨이 해적 스타일 반바지에 그 스카프를 두른 채 런웨이를 활보할 때 태어나지도 않았지만 말이다).
물론 리 맥퀸의 이야기는 잊기 어려우며, 그의 모순은 끝없이 신화화되었다. 새빌 로 견습생으로 영국식 드레이프 수트를 제작하며 재단을 익힌 그는 악명 높은 ‘범스터’ 바지를 탄생시켰고, 자신의 디자인에 대한 극단적인 반응을 갈망했다(“사람들이 내 쇼를 보고 떠날 때 구토하길 바랍니다. 심장마비나 구급차도 좋겠군요.” 맥퀸은 실제 이렇게 말한 적 있다). 하지만 동시에 대형 마트 브랜드 타겟(Target)과 함께 졸업식 드레스 라인도 론칭했다. 노동자 계층이 주로 거주하는 이스트엔드에서의 성장 배경과 켈트족 전통은 계급주의와 제국주의를 산산조각 내는 컬렉션으로 표출됐지만, 그의 유산은 이자벨라 블로우나 스텔라 테넌트 같은 영국 상류층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구축했다.
맥기르는 다른 누구보다 리의 사상에 충실하다. 최근 그는 1989년 글로스터 대성당에서 열린 블로우의 결혼식을 연구하고 있으며, 테넌트는 언제나 1순위 모델이다. 또한 그는 하우스 초창기의 장난스러운 공격성을 되살리고자 한다. “지적이면서도 변태적인 면이 있습니다. 내가 꽤 좋아하는 거죠.” 취임 직후 그가 내게 말했다. “절대 노골적으로 섹시함을 드러내지 않아요. 그 점이 매우 현대적입니다.” 올해 킹스크로스에 있는 하우스 아카이브를 자주 방문한 그는 상업적인 2000년대 컬렉션을 건너뛰고 리의 초기 드로잉에 집중했다. “리의 드로잉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자신감이 느껴집니다. 매우 날카롭고 건축적이죠.” 맥기르가 이렇게 덧붙였다. “맥퀸을 잘 모르는 젊은 세대도 있으니까요. 무슨 의미인지 아시죠?” 잘 알고 있다. 버튼의 지휘 아래 하우스는 성숙하고 정제된 접근을 우아하게 보여줬지만, 맥기르는 본인의 맥퀸이 젊은 에너지와 그가 ‘내면의 동물’이라고 부르는 것에 초점을 맞추길 원한다.

그렇다고 그가 버튼에게 ‘깊고 깊은 존경심’을 갖고 있지 않다는 건 아니다. 그녀는 센트럴 세인트 마틴에서 학위를 마친 이후 쭉 리의 오른팔이었고, 13년 동안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서 하우스를 자기만의 것으로 만들었다. 리가 당시 찰스 왕세자의 앤더슨앤셰퍼드(Anderson&Sheppard) 수트 안감에 자수로 욕설을 새기고 여왕의 경비병 모자에 음모를 넣자고 주장하는 쪽이라면, 버튼은 2011년 윈저 가문에 입성하는 케이트 미들턴의 결혼식을 위해 웨스트민스터 사원 계단에 280cm에 이르는 새틴 가자르를 펼치는 쪽이다. 리의 무드보드에 방탕주의를 대표하는 사드 후작(Marquis de Sade)의 소설 <소돔의 120일>과 초현실주의 작가 한스 벨머(Hans Bellmer)의 기형적인 인형 시리즈가 등장한다면, 버튼의 영감은 셰틀랜드 제도의 태티트(Taatit) 러그와 북아일랜드의 푸른 아마밭이었다. 맥기르의 과제는 버튼이 완성한 정교한 실행을 기반으로 리의 에너지와 감각을 포착하는 것이다. “맥퀸은 긴장에 관한 것입니다.” 그가 말했다. 매력과 혐오, 세련미와 잔혹성, 아방가르드와 상업적인 성공 사이의 긴장이다. 리 스스로도 언론이 그의 지방시 데뷔 컬렉션을 혹평했을 때 이렇게 말했다. “동시에 두 가지를 해내는 건 말도 안 되게 어려운 일이라고요!” 파리의 백스테이지, 나는 밴시 머리 장식이 합쳐진 드레스를 모델이 몸에 걸칠 수 있는지 의심하고 있었다. 그때 모토로라 헤드셋을 착용한 맥퀸 홍보 담당자가 옆으로 다가와 속삭였다. “이제 곧 시작합니다. 자리에 앉아주세요.”
창립자가 런던 남부의 허름한 아파트에서 원단을 자르기 시작한 지 33년이 지난 지금, 맥퀸 하우스 본사는 런던 클러큰웰에 있는 2,787㎡의 6층짜리 건물에 들어서 있다. 내가 처음 그곳을 방문한 건 봄/여름 쇼가 석 달도 채 남지 않은 지난 7월의 어느 흐린 날이었다. 본인 작업실을 임원 사무실이 있는 층에서 디자인 팀과 가까운 곳으로 옮긴 맥기르는 금빛 소나무 바닥에 아무렇게나 앉아 2025 리조트 선글라스의 소재를 살펴보고 있었다(맥기르는 자신의 디자인 접근 방식은 보통 아주 ‘바닥부터 시작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안전핀 브로치 샘플조차 그의 지문 자국 없이 생산 단계로 넘어가는 일은 없다). 그는 제왕나비 프린트를 마음에 들어 했다. “굉장히 맥퀸스럽죠, 그렇지 않나요?” 그가 내게 보여주며 말했다. 말라카이트는 맥퀸보다 구찌스럽다고 여겨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불꽃 모양 선글라스를 반대하는 건 아니에요.” 그가 덧붙이며 보조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조사차 로스앤젤레스로 여행 갔을 때 불꽃 선글라스를 봤고, 힙합 뮤지션 플레이보이 카티가 ‘멜로즈(Melrose)’를 부를 당시 팬들의 아편코어(Opiumcore, 어둡고 아방가르드한 록과 펑크 문화) 스타일과 대담한 차림에 매료되었다.
젊음이 맥기르의 창의적 영감의 원천인 만큼 그는 경험을 존중한다. “맥퀸은 아틀리에가 매우 중요합니다.” 그가 주장했다. 하우스에 자신의 디자이너와 재단사 몇 명을 들이긴 했지만, 버튼과 함께 일한 팀원 상당수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그중 일부는 리 맥퀸 시절부터 일해온 사람들이다. 그의 목표는 그들의 기술적 역량을 활용해 영국 패션에 다시 한번 대담함의 전율을 가져오는 것이다. “맥퀸은 실험과 창의성을 위한 실험실입니다. 우리 디자인 팀에도 이렇게 말하죠. 한번 놀아보자고요. 충분히 강렬하고 다른 곳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기분이 들 때까지 아이디어를 밀어붙이는 겁니다.”
리의 아이디어와 작업에 몰두하면서 맥기르는 ‘옷을 통해 무언가를 말할 수 있으며, 그 사실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깨달음 덕분에 그는 2007년 고등학교 졸업 후 더블린에서 영국으로 이주해 런던 칼리지 오브 패션에서 남성복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비록 도시의 쾌락주의가 학창 시절 수업보다 더 많은 깨우침을 줬지만 말이다. 그의 학생 아파트는 캠던의 음악 공연장 코코(Koko) 건너편에 있었는데, 에이미 와인하우스와 피터 도허티가 코코의 거대한 디스코 볼 아래 종종 등장하던 시절이었다. 당시의 영향은 그의 무드보드에 분명하게 드러난다. 맥기르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밤에는 소호 워더 스트리트의 게이 바에서 바텐더 겸 프로모터로 일했다. 그곳에서 케이트 모스와 알레그라 베르사체 같은 인물들이 파파라치에 쫓기는 모습을 보곤 했다(“그땐 그저 ‘오, 맙소사!’라는 생각뿐이었어요.”). 그 시기는 그가 자신의 성 정체성을 깨닫기 시작한 무렵이기도 하다. “어린아이의 커밍아웃은 정말 힘든 경험입니다. 특히 학교에 잘 적응하지 못한다면 말이죠.” 그는 부모님이 언제나 자신을 지지해주셨다고 재빨리 덧붙였다. 지금은 어떨까? “행복합니다. 매일 하느님께 감사드리죠. 저와 같은 성 정체성을 가진 이들이 저보다 앞서 성취한 일과 그들이 치른 희생을 사랑합니다. 영화감독 케네스 앵거(Kenneth Anger)와 데릭 저먼(Derek Jarman), 작가 수전 손택(Susan Sontag), 사진가 피터 후자(Peter Hujar) 등 다작하는 예술가에게 깊이 몰입하고 있습니다. 동성애자 집단을 대변하는 것이 의무라고 느껴요. 그들을 위해 목소리를 높이고 그들을 지지하는 거죠.”
웨스트엔드에서 일하던 시절, 맥기르는 늘 돈 걱정을 했다. 맥퀸이 태어난 이스트엔드의 클럽을 더 좋아해 붐박스(Boombox)와 포니스텝(Ponystep) 같은 클럽에서 밤을 보내던 중 윌슨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고, 그녀에게 배우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면접 기회를 얻었고, 익히 알려진 가혹한 질문 폭격에서 살아남은 뒤 복도를 통해 밖으로 나가던 그를 윌슨이 불러 세웠다. “‘이봐, 아일랜드 꼬맹이! 지금 당장 신청해야 할 장학금이 있어. 너 같은 애들은 내가 잘 알지. 게으름 피우다가는 이런 기회를 놓쳐버릴 거야’라고 소리쳤어요. 공부할 수 있도록 장학금을 주겠다는 그녀만의 독특한 대화 방식이었죠.”
장학금은 재정적으로 큰 도움이 되었다. 그는 2014년 세인트 마틴을 졸업할 때 피커딜리 거리의 매춘부와 영화 <아이다호>의 리버 피닉스에게서 영감을 얻어 볼펜으로 낙서한 청바지 컬렉션을 선보였고, 도쿄 부티크 캔디 니폰(Candy Nippon)에서 그 컬렉션을 전부 사들였다.
이후 10년 동안 맥기르의 삶을 관통하는 요소는 도심에 살며 청소년 문화를 연구한 것이다. 졸업 후 유니클로에 채용된 그는 도쿄 시부야의 작은 아파트로 이사했고, 츠타야 서점에서 새벽 2시까지 책을 보고 하라주쿠의 가와이 문화에 경탄했다. 2년 반 뒤에는 크리스토프 르메르와 유니클로 캡슐 컬렉션 작업을 더 긴밀히 하기 위해 파리로 이주했다. 그는 팔레 루아얄 근처 신발 상자처럼 비좁은 아파트에 살면서 시간이 날 때면 레옹 클라델 거리의 젊은이와 스케이트보더의 사진을 찍었다(맥기르는 2023년까지 디자이너 겸 사진가로 활동했고, 사진으로 수상한 적이 있으며, 사진집을 내기도 했다). 그다음 앤트워프로 옮겨 드리스 반 노튼과 일했고(그가 참여한 첫 번째 컬렉션은 크리스찬 라크로와와 협업한 2020 봄/여름 컬렉션이다), 다시 런던으로 돌아와 JW 앤더슨의 남성복 헤드 디자이너직을 맡았으며 곧이어 여성복까지 책임지게 되었다.
맥기르가 이끄는 맥퀸 스튜디오에는 민주적인 분위기가 뚜렷하다. 1940년대 군용 의자로 가득한 개인 사무실이 있지만, 그곳에 머무는 일은 거의 없다. 캐스팅, 디자인, 피팅을 하는 동안 팀과 함께 있는 것을 선호한다. 맥기르는 대화 중에 카라바조의 작품 ‘순례자들의 성모 마리아(Madonna dei Pellegrini)’와 도쿄 갤러리 스카이 더 배스하우스(SCAI The Bathhouse)의 최근 전시, 사진가 필립 로르카 디코르시아(Philip-Lorca diCorcia) 특유의 미국적 권태감에 대한 주제를 넘나들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피노는 그가 이 자리에 적격임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션은 창의적인 영국 패션의 새로운 세대를 상징합니다. 활기찬 에너지, 꾸뛰르와 테일러링에 대한 열정, 음악과 예술 분야의 풍부한 지식은 맥퀸 정신과 완벽하게 공명합니다.” 그러나 맥기르는 예술과 패션을 별개로 본다. 예술은 한 개인의 작업이지만, 패션은 대개 팀에 의해 생산된다고 설명했다. 맥퀸의 최근 운영 방식은 클러큰웰 본사에서 이탈리아의 재단사, 영국 북부의 직물 제조업체, 한국의 머천다이저로 확장된다. “박물관에 전시될 옷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맥기르가 몇 차례에 걸쳐 강조했다. “실제로 사람이 입는다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최근 세계가 겪는 격동에서 그는 자신의 디자인이 현대적 갑옷이 되길 바란다. “맥퀸을 입는 것이 일종의 생존 방식이 되는 거죠.”
맥기르의 세계에는 가벼움을 위한 자리도 충분하다. 오늘은 아틀리에의 모든 인원이 얼룩말 무늬 원단이 지나치게 ‘팻시 스톤(Patsy Stone, 영국 TV 시트콤 <앱솔루틀리 패뷸러스> 시리즈의 우스꽝스러운 패셔니스타 캐릭터)’스럽지 않은지에 대한 의견을 나누도록 초대되었다. 추상적인 하운즈투스 패턴이 지나치게 ‘타티(Tati, 체크무늬가 시그니처인 프랑스 의류 체인 스토어)’스럽지 않은지도 논의 주제다. 여전히 많은 것이 유동적이다. 벽에는 가수 수지 수(Siouxsie Sioux)와 소설가 플럼 사이크스(Plum Sykes)의 사진을 핀으로 고정한 무드보드가 늘어서 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컬렉션 방향이 다시 바뀌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맥퀸의 여러 공장은 생산에 들어가기 위해 대기 중이었다. 밴시에 대한 컨셉이 맥기르의 머릿속에서 구체화되고 있을지언정, 옷과 관련해서 볼 수 있는 것은 아직 아무것도 없다. 올리브색 가죽 트렌치 코트, 지기 스타더스트가 입었을 법한 번개 모양 시퀸 장식의 크림색 레이온 케이프 등 조사를 위해 준비한 빈티지 옷만 줄지어 있을 뿐이다. 나중에 맥기르가 고백했다. “완전히 새로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와 작업한 적 없는 브랜드의 틀 안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이해하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실제로 그에게 얼마나 많은 시간이 주어졌는지 가늠해봤다. 내가 그곳에 있을 때는 7월이었고, 맥기르는 임용이 발표된 후 몇 달 동안 52개 룩의 가을/겨울 컬렉션을 완성했으며, 자신과 함께 일하게 될 수많은 팀원을 만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다시 31개 룩으로 구성된 리조트 컬렉션을 감독했고, 봄/여름 컬렉션을 시작했으며, 두 차례 홍보와 관련된 폭풍의 시기를 무사히 견뎠다.
2023년 10월, 그의 임용 소식과 함께 인터넷에는 케어링 그룹 소속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다섯 명의 사진 옆에 맥기르의 포트레이트가 더해진 타일 형태 흑백 이미지가 퍼졌다. 생 로랑의 안토니 바카렐로, 발렌시아가의 뎀나, 구찌의 사바토 데 사르노, 브리오니의 노버트 스텀플, 지금은 샤넬로 간 보테가 베네타의 마티유 블라지까지. 소셜 미디어에서는 성별과 인종 정체성 면에서의 다양성 결여를 빠르게 지적했다. 이에 대해 언급하자 맥기르는 사려 깊고 민감하게 대응했다. “정말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인종과 성별뿐 아니라 나이와 국적도 ‘매우 다양한’ 팀을 구성하는 것이 늘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지금까지 그가 언급하지 않은 것은 한 가지뿐이다. 더블린 시골 마을 출신으로 8억 유로(2022년 기준) 이상의 연간 매출을 기록하는 케어링 그룹 산하 브랜드 수장이 되려면 초현실적인 수준의 근성과 재능, 결단이 필요하다는 사실. “그는 노동자 계급 출신입니다.” 동료 디자이너인 친구 찰스 제프리(Charles Jeffrey)가 말했다. 세인트 마틴에서 맥기르의 피팅 모델을 하며 가까워진 둘은 달스턴의 퀴어 클럽 보그 패브릭스(Vogue Fabrics)에서 밤새 춤을 추며 우정을 쌓았다. “우리 중 패션계에서 이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맥기르의 데뷔 쇼는 반응을 이끌어냈다. 한 달도 되지 않아 완성한 컬렉션은 이상할 정도로 쌀쌀하던 3월 저녁 레 올랭피아드(Les Olympiades)의 폐쇄된 기차역에서 공개되었다. 맥기르는 리의 1995 봄/여름 시즌 ‘버즈(The Birds)’ 컬렉션을 연구해 구조적인 니트웨어, 날카롭게 각진 실루엣, 말과 염소에게서 영감을 얻은 신발을 통해 압축과 변형을 실험했다. 엇갈린 반응을 보인 에디터와 인플루언서들은 대부분 냉정하게 평가했지만, 어떤 것도 맥기르의 ‘후프(Hoof)’ 부츠 바이럴을 막지 못했다. 수많은 인스타그램 코멘트는 패션 비평을 가장한 사이버불링에 가까웠다. 1990년대 리 맥퀸은 기자들 좌석 사이에 금박을 입힌 해골을 두는 방식으로 언론의 비판에 반감을 표시했다. 지금 맥기르가 견디고 있는 것처럼, 자신의 드레이핑 기술을 비난하는 290개 스레드가 이어진다면 리는 어떻게 반응했을지 궁금해졌다(“상상할 수 있겠어요?” 그가 재미있지만 오싹하다는 말투로 물었다. “만약 내가 인스타그램 계정이 있었다면 어땠을지 말이죠.”). 클러큰웰로 가면서 나는 지난 3월 파리 차이나타운에서 마지막으로 만난 뒤로 그가 지쳐버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당시 그는 데뷔 컬렉션에 대해 리가 뭐라고 할지에 대한 언론의 날카로운 질문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전혀 지친 기색이 없었다. 옷차림에 대한 맥기르의 즐거움은 여전했다. 그 대상이 다른 사람이든 자신이든 관계없이 말이다. 주요 패션 하우스의 밀레니얼 디렉터들이 유니클로 크루넥과 각종 리바이스 501 청바지를 유니폼처럼 입는 것이 관행이 됐지만, 맥기르는 여전히 순수한 즐거움을 바탕으로 매일 새로운 룩을 선택한다. 예를 들면 도쿄에서 산 캐피탈의 스키니 진, 스테파노 필라티 시절 생 로랑의 빈티지 트위드 블레이저, 앤드워프의 다이아몬드 상가 지역 디아망콰르티에(Diamantkwartier, 그는 ‘반짝거리는 걸 좋아하는 이들을 위한 장소’라고 설명했다)에서 구입한 다이아몬드 파베 귀고리 등이 있다. 또한 2024 멧 갈라에 대해서도 열정적으로 이야기했다. 갈라 전날 밤 라나 델 레이와 함께 플라자 호텔 스위트룸에서 레드 카펫 동선을 연습하고, 영화 <나 홀로 집에>를 떠올리며 새벽 2시에 룸서비스로 M&M 초콜릿을 얹은 선데 아이스크림을 주문했다. “스트레스가 심했지만, 그 와중에도 재미를 찾으려 한 거예요.” 맥기르가 말을 이었다. “그게 중요하죠.”
영국에는 맥기르를 지지하는 과거 리 맥퀸의 크루들이 있으며, 모자 디자이너 필립 트레이시(Philip Treacy)도 그중 한 명이다. 둘은 트레이시의 스튜디오에서 친분을 쌓았고, 트레이시는 맥퀸이 생전에 얼마나 저평가되었는지를 그에게 상기시켰다. “오늘날 리와 이자벨라는 진정한 영웅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위대했지만, 필립은 1990년대엔 사람들이 그들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했죠. ‘사람들은 리를 싫어했어’라고요.” 맥기르가 말했다. “리와 이자벨라는 반항적이었지만, 오만하지 않았습니다. 그 점이 중요한 포인트예요.”
맥기르 역시 결코 오만하지 않다. 그는 단호하다. 제프리가 말한 것처럼 그는 늘 매력적이고, 재미를 추구하며, 유쾌하다. 하지만 그의 친절을 약함으로 착각하는 것은 큰 실수다. 제프리는 그에게 켈트족 특유의 불같은 면이 있다고 덧붙였다. “사람들이 등을 돌리거나 아니라고 말하면 그는 ‘좋아, 내가 제대로 보여줄게’라는 식으로 대응할 거예요.”
알렉산더 맥퀸이 전성기를 누리던 1990년대 중·후반 쿨 브리타니아(Cool Britannia) 시기, 션 맥기르는 더블린 북쪽, 중세 킬바락(Kilbarrack) 묘지가 있는 1960년대 교외 지역인 베이사이드의 아일랜드해 옆에서 성인이 되었다. 침실 벽은 이모(Emo) 콘서트 티켓으로 가득했다. 난임 전문 간호사였던 어머니 아일린(Eileen)은 큰아들의 디자인에 대한 집착이 레고로 놀라운 건물을 만들며 많은 시간을 보내던 세 살 무렵부터 시작되었다고 기억한다. 정비공이었던 아버지 브렌던(Brendan)은 맥기르가 비 오는 토요일이면 당신의 더블린 정비소에 드나들며 시간을 보낸 것을 떠올렸다.
“새벽 1~2시까지 자지 않고 서로에게 마음을 터놓아요.” 맥기르는 시간이 날 때마다 베이사이드로 돌아가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 가족은 자신이 갖기 쉬운 과장된 착각을 바로잡아준다. “멧 갈라에서 라나와 함께 레드 카펫에 선 걸 보고는 ‘넌 네가 뭐라도 된 것처럼 여기는 거야?’라고 묻길래, 나는 ‘미안, 그냥 드레스 한 벌 만든 것뿐이야! 난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답했죠.”

“켈트족으로서 맥퀸과 일종의 유대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지난 8월, 킹스 로드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고풍스러운 이탤리언 레스토랑 라 파밀리아(La Famiglia)의 제라늄으로 가득한 정원에서 함께 점심을 먹으며 그가 말을 이었다. “희한하게도, 우리 둘 다 각자의 이름으로 된 타탄 체크(MacGirr Tartan, MacQueen Tartan)도 있죠.” 그에 따르면 맥퀸 타탄이 훨씬 ‘시크’하지만 말이다. 1990년대와 2000년대, 맥기르 가족은 주말마다 ‘깊고 깊은 시골’인 라하르단(Lahardane)으로 여행을 갔다. 아일랜드 서해안 근처 인구가 100명 정도 되는 작은 마을로, 션의 외삼촌 중 한 명이 그곳에서 펍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는 열 살 때부터 거기서 빈 병을 모았고, 펍에 온 손님들에게서 리 맥퀸에 대한 전설적인 이야기를 듣곤 했다.
“내게 맥퀸은 런던에 대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맥기르는 이렇게 말한다. “이 도시는 매우 본능적인 동시에 정제된 태도를 갖고 있습니다.” (그의 밴시는 게일 신화에서 유래했는지 몰라도, 새벽 5시에 소호의 아이코닉한 재즈 바 트리샤스(Trisha’s) 밖에서 더 자주 나타날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일에 ‘억만 퍼센트 전념’하고 있음에도, 가능한 한 밖에 나가 시간을 보내며 자전거를 타고 도시 전체를 둘러보려 한다. 국립 초상화 미술관에서 프랜시스 베이컨의 전시를 감상하고, 템스강 남쪽에서 아트 록 밴드 스틸 하우스 플랜츠(Still House Plants)의 공연도 보고, 때로는 ‘외진 장소에서 열리는 퀴어 파티’에 참석한다(“가끔씩요.” 그가 말했다. “쿵쿵거리며 춤추는 게 필요한 순간이 있잖아요.”). 우리는 방금 테이트 모던의 오노 요코 회고전에서 유리 망치와 소원 나무를 보고 왔다. 맥기르는 “요코가 두려움이 없다는 점에서 매우 맥퀸스럽다고 느꼈다”는 감상 평을 남겼다.
“10년, 15년 전과는 다릅니다. 그때는 정말 멋지고 훌륭하지만, 잘 팔리지는 않는 컬렉션을 선보이는 디자이너들이 있었죠.” 맥기르는 오늘날 패션계가 비즈니스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지금은 모든 것이 상업적인 성공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안타깝냐고요? 그럴 수도 있지만, 그 사실을 인지하고 현시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맥기르가 처음 알렉산더 맥퀸이라고 적힌 라벨을 본 것은 2006년. 브라운 토머스(Brown Thomas) 백화점에서 리 맥퀸과 푸마의 협업 스니커즈 밑창에서 발견했다. 이 무렵 백화점 쇼윈도 디자이너였던 할머니 모린(Maureen)에게서 1950년대 재봉틀을 선물 받았고, 에디 슬리먼에 대해서도 알게 됐다. 그는 자기 교복을 슬리먼의 시그니처인 스키니한 디올 옴므 실루엣으로 고치기로 결심했다.
오늘날 맥기르가 추구하는 미학과 그의 뮤즈에게서 10대 시절 리와 에디 팬덤의 유산을 느낄 수 있다. 뮤즈 중 누구도 돈을 받고 맥퀸을 입거나 홍보하지 않는다. 요즘처럼 거래가 일상적인 시대에는 비정상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그는 비욘세가 데뷔 컬렉션의 풍성한 양털 코트를 굉장히 마음에 들어 했으며, 찰리 XCX가 ‘브랫(Brat)’ 콘서트 투어 동안 자신의 후프 부츠를 신었다는 사실(“실제로 딱 찰리 같은 여자를 위한 디자인이거든요.”)에 기뻐했다. 그러나 그는 이번 화보 촬영에 참여한 플로렌스 싱클레어에 대해 이야기할 때 훨씬 더 야단스러웠다. 영국령 카리브해 지역 출신 뮤지션 싱클레어의 인스타그램 팔로워는 1만 명에 이르며, 그의 음악은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보컬 루 리드(Lou Reed)를 연상케 한다. 맥퀸과 왕실의 관계를 계속 유지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는 “그쪽에서 아직까지 아무 연락이 없어요”라며 농담으로 대신했다. “아이들 모두 꽤 멋지더군요. 셋 중 여섯 살 된 루이 왕자가 가장 ‘맥퀸스러운 에너지’를 지니고 있어요.” 맥기르가 살고 있는 침실 2개가 딸린 1960년대 아파트는 런던의 감성적 중심지에 위치한다. 소호의 난봉꾼과 피커딜리 서커스의 관광객, 세인트 제임스의 프라이빗 남성 클럽의 상류층 인사들이 교차하는 곳이다. 그는 여전히 직접 장을 보고 할머니 모린의 사진이 배경화면인 아이폰을 사용하지만, 이제 가족이 집에 놀러 왔을 때 머물 수 있는 여분의 방이 있다는 소박한 사치에 행복해한다. 비록 1980년대 아르마니 수트 컬렉션이 그 방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말이다.
“약간 워커홀릭이에요. 좋아하는 일을 하는 거니까요.” 맥기르가 인정하듯 말했다. 보통 아침 7시 전에 일어나 드립 커피 한 잔을 마시면서 전날 스스로에게 보낸 음성 메모를 확인한다. 그리고 웨이트 트레이닝이나 요가를 한 뒤, 걸어서 사무실로 향한다. 미신을 믿는 편이라 기(氣) 치료나 냉수욕, 프로이트가 아니라 융 스타일의 분석에 관심이 많다. “세상 모든 것이 어머니와의 관계와 연관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가 재빠르게 덧붙였다. “하지만 성생활은 정말 중요해요.”
지난 10월 이후로 이 중 어느 것이 그의 생명선 역할을 했는지 궁금해졌다. 우리는 지금 속도를 높여 런던 중심부로 돌아가는 택시 안에 있고, 빅토리아 여왕 기념비의 금빛 조각상과 피커딜리 서커스를 지났다. 차가 멈출 때쯤 나는 마음을 독하게 먹고 질문을 던졌다. 그러니까, 정확히 어떻게 그 모진 말을 견뎌냈나? “나 역시 감정이 있는 인간입니다. 누군가 못된 말을 하면 기분이 상하지만, 그건 그냥 소음일 뿐이죠. 우리 주위에는 늘 소음이 있기 마련이에요.” 그의 신중한 대답은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작별 인사를 나눴고, 그는 소호의 번잡한 교통망을 헤치며 사라졌다. 젊은 디자이너들에게 묻고 싶은 질문은 그 소음을 뚫고 자기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다.
다시 9월 파리, 맥퀸 2025 봄/여름 쇼를 보기 위해 자리에 앉자 발아래로 펼쳐진 인위적인 장식이 우리를 맞았다. 2024년 토니상 수상 디자이너 톰 스컷(Tom Scutt)이 고안한 설치물이다. 에콜 데 보자르 건물의 하나인 팔레 데 에튀드(Palais des Études)의 보자르 타일을 뚫고 금속 런웨이를 설치한 것으로, 파편 속에서 런웨이를 찾아낸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션이 내게 묘사한 것은 새벽 3시에 런던 소호 거리를 걷는 경험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뮤지컬 <카바레(Cabaret)>의 무대와 의상을 담당한 스컷이 설명했다. “우리는 많은 대화를 나눴습니다. 도심에 사는 것이 어떤지, 낮과 밤 사이에 열리는 이 경계적 꿈의 공간이 또 다른 세계로 통하는 문이 되는 것에 대해서도요.” 함께 쇼장을 방문했을 때 두 사람 모두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바닥을 뜯어내고 영혼을 해방시키는 아이디어에는 맥퀸을 상징하는 무언가가 담겨 있습니다.”
관객이 여전히 바닥의 트롱프뢰유 효과를 감상하고 있을 때, 조명이 어두워지면서 DJ 사이러스 고버빌(Cyrus Goberville)의 사운드트랙이 경고음처럼 울렸다. 진동하는 안개 속에서 맥기르의 밴시가 금속 런웨이 위로 등장했다. 맥퀸의 스케치 속 건축적 라인은 독특한 칼라로 구현되었다. 버튼이 사랑한 영국 장미 모양의 가죽 참, 거미줄같이 고운 실크 원단으로 만든 범스터 바지, 라나 델 레이의 멧 갈라 드레스가 떠오르는 검정 산사나무 가지 장식의 조젯 드레스에 이어 공간을 얼어붙게 만드는 무지갯빛 밴시 드레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모델들의 피날레 워킹과 함께 커다란 박수 소리가 유리 천장으로 된 아트리움에 울려 퍼졌고, 인사를 하러 나온 맥기르의 눈은 빨갛게 충혈돼 있었다. 백스테이지에서 제대로 축하 인사를 건네고 싶었지만, 코린트식 기둥 사이에서 서로 건배 중인 모델 무리와 가까워졌을 때 우리가 마주한 건 대혼란이었다. 맥기르의 첫 맥퀸 컬렉션 중 반짝이는 제트 스톤을 흩뿌린 블레이저를 입은 다프네 기네스가 틱톡커들과 조명을 헤치고 걸어왔다. 그리고 2000년대 리와 그랬듯, 맥기르와 그녀의 빅토리안풍 의상을 분석하는 대화를 나눴다. 카디 비는 모피를 두른 채 “아름다웠고, 어두웠으며, 날카로웠다”고 칭찬했다(칼라가 달린 드레스 14벌이 필요할 거라고도 말했다). 맥기르는 피노에게 감사를 표했고, 여러 매체에 무드보드에 대해 다시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 모든 상황을 재미있게 지켜보고 있었는데, 시끌벅적한 소리가 울리는 대리석 공간 건너편에 본인 옷을 입고 온 맥기르의 어머니가 나와 같은 모습으로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에게 다가가 이 황홀한 장면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글쎄요, 맥기르 포 맥퀸이라···”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춘 채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어감이 정말 좋지 않나요?” (VK)

- 패션 에디터
- 김다혜
- 포토그래퍼
- Campbell Addy
- 글
- Hayley Maitland
- 스타일리스트
- Ib Kamara
- 모델
- Celina Ralph, Florence Sinclair, Oyinkansola Dada, Sacha Quenby, Samuel Adewunmi, Sara Caballero
- 헤어
- Cyndia Harvey
- 메이크업
- Bea Sweet
- 네일
- Ama Quashie
- 테일러
- Della George
- 무브먼트 디렉터
- Yagamoto
추천기사
-
Fashion
25 F/W 패션 트렌드 키워드 ‘서울패션위크’에 다 있다
2025.02.19by 서명희
-
패션 아이템
올봄, 산뜻한 화이트 스커트와 연청에 이 재킷으로 멋 내기
2025.02.19by 황혜원, Cortne Bonilla
-
셀러브리티 스타일
올해 샌들 트렌드를 한 번에 알 수 있는, 헤일리 비버의 발끝
2025.02.21by 이소미
-
패션 화보
채영, "개성이 강한 멤버로 보일 것 같아요"
2025.02.21by 김다혜, 류가영
-
웰니스
항산화·단백질 폭탄! 피스타치오 한 줌의 위력
2025.02.15by 윤혜선, Philipp Wehsack
-
아트
아침 그리고 저녁
2025.01.30by 정지혜
인기기사
지금 인기 있는 뷰티 기사
PEOPLE NOW
지금, 보그가 주목하는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