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만든 드라마에 논란 끼얹기 ‘원경’
<원경>은 정통 사극이라 하기도, 퓨전 사극이라 하기도 주저되는 드라마다. 정통 사극이라기엔 왠지 세련됐고, 퓨전 사극이라기엔 제법 역사에 충실하다.
이른바 ‘정통’이라는 과거 대하 궁중 사극에도 이 드라마 정도의 해석과 상상, 관점 비틀기는 있었다. 예컨대 <원경>은 정사 밖에 존재하는 여성의 정치력, 주체성을 그린다는 점에서 근래 페미니즘 열풍의 유산처럼 보이지만 일찍이 우리에겐 <여인천하>(SBS, 2001~2002)와 <선덕여왕>(MBC, 2009)이 있었다.
<원경>이 정통 사극보다 퓨전에 가깝다는 인상을 주는 건 스토리보다는 스타일의 영향이 크다. 이 작품은 화려한 영상미와 의상, 큰 스케일로 영화 못지않은 볼거리를 제공한다. K-드라마 제작 역량 강화에 따른 정통 사극의 현대적 발전이라 볼만하다.
<원경>의 현대적 느낌은 표현 수위로도 전달된다. 다만 여기에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원경>의 tvN 버전은 15세 이상 관람가 등급이다. 하지만 성적인 뉘앙스를 풍기다 못해 선정적인 장면이 있다. 물에 젖은 속옷 차림 여성의 몸을 여러 차례 클로즈업하고, 베드신에서 여성의 몸을 쓰다듬는 손길을 길게 보여준다. 그 정도로도 인물 간 역학의 주요 요소인 섹스를 제거함으로써 캐릭터의 개연성에 자주 공백이 생기던 과거 사극과 변별되기는 충분하다.
그런데 OTT 플랫폼인 티빙 버전은 숫제 청소년 관람 불가 등급이다. 이이담, 차주영 등 여배우의 노출 신이 실연인가 대역인가 궁금증이 일었고, 이런 홍보 전략이 여성의 주체성을 내세우는 각본과 배치된다는 비판도 있었다. 역시 티빙에서 서비스된 <우씨왕후>(2024) 때의 논란이 재현된 것이다. 여성은 다른 여성의 신체가 성적 관음의 대상으로 제시될 때 관음의 주체보다 객체에 이입해 불쾌감을 느끼기 쉽다. 제작자들이 도대체 이걸 언제 이해할지 모르겠다.
<원경>에서 베드신이 필수인 건 맞다. 그게 이 드라마의 개성이다. 드라마는 태종 이방원(이현욱)이 왕자의 난을 일으켜 조선 3대 왕으로 등극한 직후 시작한다. 태종은 태상왕 이성계(이성민)와 화해해 왕위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한편 권신들을 눌러 왕권을 강화하려 한다. 그 권신들의 중심에 아내 원경왕후(차주영)와 그의 친정인 민씨 일가가 있다.
태종은 군신, 남녀 등 매사에 위계를 규정하는 유학을 근거로 원경왕후를 굴복시키려 한다. 하지만 왕후는 왕권의 공동 창업자로서 자기 지분을 요구하며 맞선다. “(조선의 여인으로 사느니) 고려의 여인으로 죽겠다”는 일갈도 한다. 태상왕의 세력이 건재하고, 고려 왕족이 살아 있고, 중국에서도 왕조가 교체되는 아슬아슬한 상황에서 태종의 가장 큰 무기가 민씨 가문의 정보력이라 단숨에 이들을 내치기도 어렵다.
여기 더해, 드라마는 태종과 원경왕후라는 권력 공동체가 분열하는 과정에서 또 한 가지 변수가 있었다고 본다. 바로 그들의 끈끈한 이성애다. 역사에 따르면 태종은 왕위에 오른 후 처남 네 명을 유배 보내거나 죽여서 처가를 도륙했다. 하지만 원경왕후는 폐위하지 않았다. 왕후는 꿋꿋이 살아남아 아들 이도(세종)가 임금이 되는 것을 지켜본다.
태종은 왜 끝내 원경왕후를 내치지 않았을까? 여기에 이성애를 꽂아 넣으면 퍼즐이 맞는다. 무인 집안에서 최초로 성균관에 입성해 아버지의 자랑이 된 이방원은 스승의 딸이자 수도 개성에서도 재색으로 칭송받던 두 살 연상의 여성을 아내로 맞는다. 그에게는 아내가 여신처럼 보였을 것이다. 심지어 그들은 생사의 갈림길을 함께 지났다. 제2차 왕자의 난 때는 원경왕후가 태종을 지키기 위해 창을 들고 집을 뛰쳐나갈 뻔했다. 진한 유대감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런데 태종은 자꾸 아내의 시녀들을 건드린다. 드라마는 이를 아내에 대한 애증, 콤플렉스, 통제욕에서 비롯된 수동 공격으로 묘사한다.
이 드라마가 정치와 성애라는 두 가지 갈등 요소를 중첩시키는 방식은 매우 흥미롭다. 1화에서 이들이 궁에서 처음 섹스를 할 때 궁녀들은 당황해 몸 둘 바를 모른다. 이들이 사가에서부터 부부로 지낸 터라 왕실 법도를 모른다는 거다. 왕과 왕후는 길흉화복을 따져 합궁 날짜를 정하고, 궁녀들이 문밖에 앉아 체위, 삽입 시간, 횟수까지 감독하는 상황에서 섹스를 해야 한다. 태종은 아내에게 바뀐 환경을 받아들이라 종용하고, 왕후는 번번이 짜증을 낸다. 이 부부의 섹스는 결국 이들이 사적 존재에서 공적 존재로 거듭나는 과정을 상징한다.
원경왕후는 왕권 재생산을 담당하는 내명부 수장이라는 점에서는 태종의 우군이다. 하지만 권신 세력을 대변하는 존재로서 왕권의 대척점에 있다. 태종은 후자에 주목하며 왕후를 경계하지만 그의 노력은 자주 사심에 가로막힌다. 화가 난 왕후가 친정으로 떠나자 보고 싶어서 찾아가고, 위험한 출정을 앞두고는 과거처럼 격정적인 섹스도 한다. 이때 섹스는 이들의 불안-몰입 애착 유형을 보여주는 중요한 표현 도구다. 하지만 그것이 꼭 선정적일 필요는 없다.
<원경> 노출 신은 “15세 버전도 충분했는데 굳이 OTT 버전을 따로 만들 필요가 있었느냐”는 비판뿐 아니라 제작 방식에도 의문을 낳았다. 1~2화가 공개되자 대역의 신체를 CG로 합성했다거나, 배우들의 소속사가 편집을 요구했다는 말이 나왔다. 제작진은 계약 전 배우들에게 청소년 관람 불가 버전이 있다고 설명했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노출 수위에 대해서는 “캐릭터와 장면의 특징에 따라 각각 배우별로 진행된 부분이 있으며, 제작이 이루어지는 단계별로 소속사 및 배우별로 협의를 거쳤다”고 답했다. 합의 시점이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이걸로 설명되지 않는다. 갈등은 빠르게 봉합된 양상이지만 향후 한국 드라마 제작사들이 노출에 관한 표준 계약서를 검토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불필요한 논란이 화제를 잠식한 것도 아쉽다. 역사서는 원경왕후가 투기가 심했다고 전하지만 <원경>은 그의 심리를 더 풍부하게 해석한다. 극 중 왕후는 후궁들을 연적으로만 보지 않는다. 그들과 경쟁하면서도 “네 존재를 한 남자에게만 찾으려” 한 게 패착이라 일깨우고, “임금의 사랑에 너의 모든 것을 걸지 마라” 경고한다. 그는 남편 태종보다 정치 감각, 의리, 배포 모두 앞서는 인물로 그려진다. 배경이 왕조라서 그가 반동이지, 공화국이라면 이쪽이 리더가 되는 편이 어울린다. 하지만 그 주체적인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는 드라마 밖에서 여전히 관음의 대상으로 객체화된다. 아이러니다.
노출 신을 논외로 한다면, <원경>은 재미있고 완성도 높고 메시지도 좋은 작품이다. 스타일도 출중하고 캐릭터도 멋지다. 차주영은 정극의 히로인으로 부족함 없는 존재감을 보여준다. 특별 출연한 이성민의 카리스마는 명불허전이다. 왕과 왕후 사이에서 이중 첩자 노릇을 하면서 자기 실속을 챙기는 채령 역 이이담도 시선을 끈다. 소재와 노출로 화제를 모았으나 중반부터 이야기가 무너져버린 <우씨왕후>와는 완성도가 다르다. 제작진이 작품과 시청자를 좀 더 믿었으면 좋았으련만, 아쉬운 대로 15세 관람가 버전의 흥행이 교훈이 되길 바랄 뿐이다.
<원경>은 총 12부작으로, 2025년 1월 6일부터 티빙 월요일 오후 2시, tvN 월·화요일 오후 8시 50분 방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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