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Q 코리아’ 강지영 편집장과의 ‘멋’ 수다
멋이 차오른다, 가자! 한국 남자 패션의 기록적 순간들에 대한 〈GQ 코리아〉 강지영 편집장의 지극히 주관적인 수다.
수트는 고(故) 김주혁이 제일 잘 입었다. 톰 포드를 입어도 느끼하지 않고 톰 브라운을 입어도 서운하지 않았다. 학자풍의 진지한 얼굴 덕인가 했더니 웬걸, 캐주얼은 더 잘 입었다. 얼굴이 알려진 사람치고는 꽤 분방하게 가로수길이든 청담동이든 걸어 다녀서 길에서 마주치는 일이 더러 있었고, 그때 그가 입은 옷을 영원히 기억한다. 청담동 카페에서 봤을 땐 회색 멜란지 수트에 크림색 반스 어센틱을 신고 있었다. 솔기가 뜯어지기 직전의 꾀죄죄한 운동화가 몹시도 유니크해 보여서, 어서 저걸 사서 흙구덩이에 내동댕이치기부터 하리라 결심했다. 어느 날 가로수길 라멘집에는 미키 마우스가 그려진 스웨트셔츠를 입고 왔다. 품이 넉넉한 그레이 진에 신발은 밤색 클락스 왈라비. 그렇게 예쁘게 입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시오라멘을 먹는 걸 보고 있자니 눈앞의 교자가 칼초네가 되도록 무국적으로 불어 터져도 모를 지경이었다. 너무 귀여워서. 녹색 다이얼 롤렉스, 무늬 없는 얇은 금반지, 단순한 검정 테 안경, 코스믹 원더 백팩. 그의 물건은 작은 것들도 다 예뻤다. 그에겐 평범한 품목 안에서 가장 세련된 것을 고르는 드문 안목이 있었다. 당시 신사동에는 덜 유명하지만 모처럼 괜찮은 브랜드만 모아둔 편집숍 에크루가 있었고, 김주혁이 오랜 단골이었단 건 나중에 알았다. 스타일리스트가 입힌 옷보다 자기 옷을 입었을 때 훨씬 멋있는 남자. 김주혁에겐 냉정한 얼굴에 불쑥 나타난 보조개 같은 산뜻한 센스가 있었다.
1990년대의 이정재를 크런키 광고에서 봤을 때, 이런 얼굴 골격이 한국에 있다는 사실에 먼저 놀랐다. 그야말로 뼈의 발견이었는데, 두상과 턱, 광대뼈의 선이 적당한 굵기의 펜으로 단번에 망설임 없이 그린 것처럼 힘차고 매끄러웠다. 게다가 성실하게 가꾼 섬세한 근육은 덩치, ‘갑빠’(은어지만, 느낌이 빡 와서 써본다)라고는 차마 불경해서 부를 수 없는, 젊은 남자의 태생적 아름다움이었다. 이런 정도의 우수한 DNA에는 덧붙일 게 굳이 필요 없지만, 그 시절의 이정재는 옷도 참 잘 입었다. 허리가 가늘고 힙라인이 예뻐서 밑위가 긴 팬츠도 잘 맞았고, 깡총한 가죽 재킷도 서양 남자처럼 어울렸다. <모래시계> 시절엔 자르르 흐르는 이탤리언 수트를 ‘뚜또 베네’하게, <느낌> 때는 미국식 청년 룩을 ‘베리 나이스’하게, 가끔 연예 정보 프로그램에 등장할 땐 베레와 베스트류의 프렌치 스타일까지 ‘아 라 모드’하게 전부 소화했으니, 이 정도면 얼굴이 패션이고 몸이 스타일이다. 스물두 살의 이정재가 ‘시인의 마을’을 부르는 영상을 보고 있으면 멋진 스리피스 수트와 실크 스카프로 더없이 세련돼 보이지만, 도리 없이 드러나는 푸릇한 청량함에 가슴이 뛴다. “나는 고독의 친구 방황의 친구 상념 끊기지 않는 번민의 시인이라도 좋겠소”라고 부르고 슬쩍 웃는, 방금 찬물에 세수한 것 같은 말간 얼굴이 종종 그립다.
모델 중에는 김원중이 제일 잘 입었다. 오죽하면 킹원중일까. 그는 패션 에디터의 자긍심을 긁는 인물이었는데, 아무리 고급한 옷을 입혀도 그가 집에서 입고 나온 출근 룩을 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좌판처럼 벌여놓은 구찌며 맥퀸이 다 무슨 꽹과리인가 싶은, 적당히 낡고 길이 잘 든 수수하고 다정한 옷. 활동 초기에는 타이트하고 어두운 분위기의 옷을 주로 입다가 어느 날부터 조금 벙벙하고 길게 입기 시작했고, 단연코 후자가 더 잘 어울렸다. 어깨가 둥글고 긴 트렌치, 와이드 코듀로이 팬츠, 품이 넓은 셔츠는 끝없이 길고 가는 팔다리의 멋진 면만 강조했다. 저절로 나부끼듯 움직이게 되니 그런 유의 몸이 자칫 사마귀나 모기처럼 보일 걱정은 사라지고, 그저 로맨틱한 바람 같았다. 비니와 안경, 빅 백으로 서정에 명랑함을 보태는 총명함은 또 어떻고. 김원중식 패션의 낭만이란 그런 것이었다.
류승범은 패션계의 클리셰이자 올타임 레전드, 모두의 패셔니스타여서 말하기도 뭣하지만, 빼놓으면 바지 안 입고 코트 입은 기분이 들어서 짧게만 서술한다. 워낙 대마왕이시니 화려하고 웅장한 패션부터 나올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검정, 회색, 흰색 등 무채색 계열 옷이 많고 데님, 면, 울처럼 남자 옷에 흔하게 쓰는 소재를 주로 입었다. 개인적으로는 그가 흰색을 입는 방식을 아주 좋아한다. <나의 절친 악당들> 시사회 때는 흰색 면 티셔츠 소매를 바짝 끌어 올려서 슬리브리스처럼 말아 입고 크림색 헐렁한 치노 팬츠, 스웨이드 슬립온을 신었는데 얼핏 룩의 포인트가 라피아 햇과 선글라스인가 싶었지만, 핵심은 거칫한 수염과 노 메이크업이었다. 몇 년 후 <타짜: 원 아이드 잭> 시사회 때는 라운드넥 화이트 티셔츠, 화이트 데님, 아디다스 슈퍼스타. 이때는 긴 생머리(의외로 찰랑이는), 팔찌를 대신한 손목의 검정 머리 고무줄이 한몫했다. 위아래 전부 흰색을 입는 건 섣불리 해서는 안 될 일지만 그가 이 나긋한 듯 괴팍한 색깔을 적극적으로 입을 땐 늘 마르고 태닝이 된 상태였다. 그을린 피부, 컬러풀한 타투, 홀쭉한 뺨 때문에 부피감 없이 날렵한 화이트 룩이 류승범 특유의 시큰둥한 스타일로 완성된 것. 어디에 등장하든 다음에는 또 뭘 입고 나올지 기대되고 고대되는 배우는 류승범이 유일하다. 최근에는 세상일 부질없어 만사 통달한 도인이 된 듯 보이지만 니트 하나 걸쳐도 표표히 폼 나는 건 여전하다. 짧게 서술하기로 했으니 이만 줄여야겠으나 류승범의 룩 중에 마음에 드는 게 또 생각났다. 큰 키가 아니어도 그는 깔창을 구두에 몰래 넣는 대신 납작한 운동화를 주로 신었고, 자세랄까 정신이랄까 그 쿨함이 좋았다.
이미지는 다르지만 고(故) 김성재도 ‘간지’ 하면 류승범과 겨룰 만하다. 이마의 주름과 다소 독특한 귀 모양까지 다 스타일이었던 그는 쿨워터 향이 인간으로 현현하면 바로 이 사람이란 확신을 줬다. 음악 방송국 복도(뒤편에 미에로화이바 자동판매기!)에서 김종서와 수다 떨 때 찍힌 청청 착장 사진은 데님 좀 입는다는 사람들 사이에서 고대 무술 비법서처럼 전해진다. 더 위 세대의 스타일 가이로 올라가면 박근형과 노주현, 전인권이 있다. 박근형은 페이즐리 타이를 매고 태어난 듯, 서양 복식이 피부처럼 어울리는 배우였다. 젊은 시절 분위기를 알랭 들롱, 장동건과 비교하기도 하지만, 어떤 면에선 그들보다 훨씬 모던한 얼굴이다. 그래서 얼음처럼 차가운 화이트 셔츠와 꽃잎 같은 붉은 타이 차림도 이물감 없이 어울렸다. 한편, 전성기의 노주현이 캐시미어 롱 코트를 입고 사브 세단에서 내리면 거스를 수 없는 ‘부티’에 거리의 모두가 저절로 공손해졌단 얘기는 조용히 전해진다. 전인권은 스키니 록 보컬 시절 천둥 같은 성량과는 달리 옷을 차분하고 깨끗하게 입었다. 구멍 난 곳 없는 티셔츠와 찢어진 데 없는 청바지. 하긴, 헤어스타일로 할 말은 이미 끝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전인권·허성욱> 앨범 커버의 플란넬 화이트 셔츠와 워싱이 연한 청바지 차림, 뜻밖의 화사한 룩에 반했던 기억도 있다. 요즘은 가파른 뺨, 형형한 눈은 사라지고 “하지만 후횐 없지 울며 웃던 모든 꿈”을 한 호흡에 끝내던 기백도 연해졌지만, 아직도 그는 스타일이 좋다. 블랙 재킷에 흰 셔츠, 레이밴 클럽 마스터가 어울리는 70세는 별로 없으니까. 게다가 여전히 웃을 땐 황야의 이리처럼 광폭하고.
최근에 뭘 입고 나오면 관심부터 가는 남자는 마이큐다. 그가 입으면 과한 디자인도 괜찮아 보이고, 소박한 룩도 지루하지 않은데, 비결은 컬러 감각과 핏에 대한 영리한 이해다. 솔직히 반바지도 폴 메스칼보다 마이큐가 먼저 입었다. 그의 진주 목걸이, 화려한 양말, 실크 셔츠가 느끼하지 않은 건 담백한 언행과 조용한 목소리 덕일 수도 있다. 이렇듯 태도야말로 패션의 핵심적 단면이다. 그러고 보니 남자 패션을 말하는데 스티브 맥퀸, 라포 엘칸, 스테파노 필라티, 오스틴 버틀러, 해리 스타일스, 티모시 샬라메, 제레미 앨런 화이트가 빠졌다. 멀리 갈 것 없이 가까이에도 떠오르는 이름이 송이송이 가득하니, 우선 옷 잘 입는 한국 남자들 얘기만으로 이 스토리를 끝낸다. (VK)
- 글
- 강지영
- 사진
- Getty 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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