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 없는 젠더 표현 가이드북
“젠더 평등을 하루빨리 실현하려면, 우리의 표현부터 재검토해야 한다.”(31쪽)
<실패 없는 젠더 표현 가이드북: 혼잣말도 바꾼다>(마티, 2025)가 세상에 나온 이유다. ‘젠더 표현은 지금 전 세계의 리터러시(Literacy)’(30쪽)라지만, 현실의 구체적인 현장을 들여다보면 여전히 갈 길이 멀다. 사회의 오랜 차별을 관습적으로 답습하거나 편견과 고정관념이 반영된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여전하니까. 이를테면 ‘여성 특유의’, ‘여성다운 섬세함’, ‘내조의 힘’, ‘게이는 남자의 마음도 여자의 마음도 잘 이해한다’ 등은 현실의 차별적 상황을 그대로 수용한 말이다. ‘악의도, 차별할 의도도 없었다’고 하면 그만일까. 누군가는 그 말로 상처받고 그 말에 갇힌다. 이른바 ‘먼지 차별(Microaggression)’. ‘매일 일어나는 미세하지만 만연한 편견과 억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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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언어를 예민하게 조탁하고 벼려야 하는 곳이 언론 아닌가. 그런데 오히려 미디어업계가 젠더 불평등을 조장하거나 관성과 타성에 따른 표현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가 많다. 게다가 업계 특성상 남성이 다수인 데다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자리 또한 남성이 대다수이다 보니 젠더 표현에 대한 고찰과 적용이 더 긴급하게 요청된다. 이에 대해 강한 위기감을 느낀 이들이 바로 이 책을 펴낸 일본의 여성 기자들이다. 이들은 일본신문노동조합연합, 일명 ‘신문노련’ 소속 언론인이다. 신문노련은 일본 내 신문 관련 산업의 노조가 가입하는 일본 유일의 산업별 노동조합으로 신문사, 통신사 노조뿐 아니라 인쇄, 판매 관련 회사 노조 등 85개 조합이 가입해 있다. 이 책은 신문노련의 특별중앙집행위원으로서 다양한 지역, 나이, 성별의 여성 기자들이 모여 공동 집필했다. 일본 언론인들이 체계적으로 자료를 구축해 펴낸 첫 번째 젠더 관련 발간물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 책이 상정하는 독자, 이 책이 가치 있게 쓰이길 바라는 곳은 비단 일본 미디어업계만은 아니다. 사회를 향해 의견을 표명하고 전달하는 일이 더 이상 기성 미디어만의 몫도 아닐뿐더러 최근에는 레거시 미디어보다 소셜 미디어의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영향력이 강해진 만큼 누구나 뉴스 생산자가 될 수 있다. 범위를 좀 더 넓혀 교육 현장이나 관공서, 기업 광고물까지 일종의 ‘뉴스’라고 한다면, 미디어의 젠더 표현을 점검하고 더욱 정확한 표현을 공유하는 일은 이제 사회 전체가 함께할 공동 과제인 것이다. 그렇기에 이 책은 신문 기사와 미디어업계의 시행착오를 바탕으로, 일반인의 의식 또한 차근차근 바꿔나갈 수 있는 ‘깨달음의 책’이 되고자 한다. 젠더 문제를 의식하지 않았거나 자각하지 않았던 이들도 이 책을 읽고 하나씩 다른 표현을 시도해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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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 없는 젠더 표현 가이드북: 혼잣말도 바꾼다>의 가장 큰 장점은 취재 현장과 밀착해 있는 현직 기자들이 방대한 자료를 모으고, 그 가운데서 젠더 불평등을 짚어볼 수 있는 구체적인 사례를 취합해 만들었다는 것이다. 무엇을 어떻게 기사화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젠더 표현 측면에서 잘못됐거나 놓친 부분을 점검한다. 또 어떤 식으로 바꿔나가면 좋을지 제안하고 반영한다. 이때 다른 표현을 제안한다는 것은 ‘이것이 정답이니 따르라’는 게 아니다. 다른 표현을 사용해야만 하는 이유를 정치·사회·역사적 맥락 속에서 짚고, 젠더 표현의 방향을 제시하는 작업이다. 책은 총 4장으로 구성됐다. 1장 ‘젠더 관점에서 읽기’, 2장 ‘웹에서 일어나는 일’은 실제 신문 기사와 온라인 뉴스에서 벌어지고 있는 성차별적 발언과 사태의 양상을 구체적으로 살핀다. 3장 ‘성폭력 보도 현장에서’는 미디어가 특히 성폭력 관련 보도를 할 때 심각한 젠더 불평등의 태도를 보일 때가 있음을 말한다. 단지 남성 기자들이 변해야 한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젠더 평등 의식이 결여된 미디어업계의 감수성과 태도가 바뀌어야 한다고 제시한다. 그리하여 4장 ‘실패에서 배우는 사람과 조직 만들기’에 이르면, 젠더 편견을 부추기는 현장의 ‘내부인’으로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이야기한다. 의사 결정의 장에 존재하는 여성의 비율을 늘리고, 수평적 인간관계나 투명한 소통을 지향하며, ‘당사자’라는 관점이 가능하게끔 조직 차원의 의식 개선이 필요하다. 물론, 이런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다른 조직, 공동체와의 연대는 더욱 강조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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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는 유독 저자·역자·편집자 주가 많다. 이 꼼꼼하고 사려 깊은 주석을 보고 있자면, 젠더 표현이 그만큼 사회·문화적 상황에 따라 달리 읽힐 여지가 많은 공동의 영역이고, 단어를 어떻게 번역하고 쓸 것인가에 예민하게 반응해야 하는 감각의 바로미터이며, 관련 현안이나 상황의 변화가 실시간으로 감지되는 현안의 생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편 2023년 3월 한국의 전국언론노동조합 성평등위원회도 <젠더 보도 가이드라인>을 만들었다. 비슷한 시기 한국과 일본의 언론 현장에서 젠더 표현을 성찰한 결과물이 나왔다는 게 무척 반갑다. 또 이 책이 번역되는 사이, 일본에서 두 가지 변화가 있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하나는 2022년 11월부터 도쿄도 전체에 성소수자 파트너십 제도가 시행됐다는 것, 다른 하나는 2023년 2월 확정 공표된 일본 형법 개정안 내용에 강간죄의 구성 요건으로 ‘동의하지 않은’이라는 문구가 들어가 ‘비동의강간죄’가 도입됐다는 점이다(옮긴이 후기, 297~298쪽 참조). 더디지만 변화의 흐름은 분명 감지된다. 그 성과가 이렇게 전해질 때면 더 크게 기뻐하며 소식을 나누고 싶다. <실패 없는 젠더 표현 가이드북: 혼잣말도 바꾼다>와 같은 구체적인 실천 덕분일 것이다. 이 책을 좀 더 많은 이들과 함께 읽고 싶다. 특히 어린이, 10대 독자와 만날 수 있다면 더없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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