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 대한 믿음
영화에 관해 쓰고 말하는 일을 업으로 삼는 나는 종종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앞에 선다. ‘지금’ 나는 ‘세계에 대한 믿음’이라는 말로 영화를 받아들인다. 다른 어느 때도 아닌 바로 ‘지금’, 실존의 세계와 영화의 실존이 흔들리는 바로 지금, ‘세계에 대한 믿음’으로서 영화를 만나고 싶다. 질 들뢰즈가 저서 <시네마>에서 한 말, ‘세계에 대한 믿음’을 다시 불러올 수밖에 없다. “영화는 세계를 찍을 것이 아니라 우리의 유일한 관계인 이 세계에 대한 믿음을 찍어야 한다”고 할 때 다시 세계에 대한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현대 영화의 역능을 상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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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예술에 관한 통찰을 거듭해온 사회학자 김홍중이 <세계에 대한 믿음>(2024, 문학과지성사)을 전해왔다. 영화에 관해 쓴 일곱 편의 글을 묶은 것이다. 저자에게 세계에 대한 믿음을 불러일으킨 영화, 창작물에 관한 분석이자 고백이다. 프롤로그에서 저자는 세계에 대한 믿음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자기가 삭감되어야 한다고 했다. “자기가 덜어내지고, 자기의 중심성이 흐트러지고, 자기가 사라져야 한다. 그 사라진 빈자리만큼 세상이 나타난다. 그 세계의 주인은 내가 아닌 타인들이다.“(7쪽) 세상을 믿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자리, 자기 자신을 내줘야 한다. 오직 ‘나’로 가득한 마음에는 타인이라는 세계가 들어설 공간이 없다. 타인의 세계, 세계라는 타인은 발견될 수 없다. 중심으로서의 나, 나의 중심을 기꺼이 흔들어 깨워야만 세상과 만나고 세상을 믿을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영화가 그 일을 가능하게 할 수 있고, 영화를 보는 나 또한 그 일을 해낼 수 있다. 이것 역시 하나의 믿음. 영화를 본다는 건 이 두 가지가 동시에 발생하고 일어나는 하나의 사건. 물론 그 사건을 일으키는 영화는 세계를 발견하게 하는 훌륭한 영화, 분명 그러한 영화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 관객은 어떠해야 하는가. 어떠해야 타인의 자리를 마련할 수 있는가. 나는 그 가능성을 저자의 다음의 문장에서 발견한다. “영화 비평가나 애호가(시네필)보다는 ‘영화를 겪는 자’라는 표현이 더 가슴에 와닿는다. 시네-페이션트(Cine-patient). 내가 느낀 마음의 흔들림과 정신의 변형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어서 이 글을 썼다. 같이 흔들리자고. 같이 무너지자고.”(8쪽) ‘영화를 겪는 자’가 되고자 한다면, 그럴 수 있다면, 자기를 덜어냄으로써 영화라는 세계를 향한 믿음에 그 자신을 충분히 의탁할 수 있다. 이것 역시 하나의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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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여기 묶인 일곱 편의 글은 저자의 겪음의 기록이다. “앎이 아니라 감정이며 정동”(7쪽)에 가까운 영화가 만들어낸 울림이다. 이해되지 않고 부대낌으로 자기 내부에 남아 있는 흔적, 그 얼룩의 영화. 이를테면 뭔가를 감수하는 자의 처지와 감수하는 힘, 능력, 그 속에서 형성되는 또 다른 힘, 그 모든 것에 관한 아피찻퐁의 영화. 영화를 강력한 목적의 도구로 마구 휘두르는 영화로부터 가장 멀찍이 떨어져 있는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시간을 뚫고 생존하는 것, 시간의 흐름을 끊고 솟아오르는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 인민을 만들어내는 지아장커의 영화, 우연히 찍힌 듯 덧없이 사라져버린 것에서 영화적 순간을 발견하는 켈리 라이카트의 영화. 슬픔과 웃음이 교차지, 유머의 영성에 관한 코언 형제와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 사랑이라는 사건, 사랑이 부른 리스크와 붕괴에 관한 박찬욱의 영화, 추앙이 사랑의 여러 결 사이에서 염려하는 마음임을 쓴 박해영 작가의 세계까지. 세계에 대한 믿음에 한발 가까이 다가가게 하는 영화, 이름의 목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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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어떠한가? 당신에게 영화는 무엇인가? 당신의 세계를 덜어내고 당신 밖 세상을 들이게 하는 영화를 떠올려본다면? 세계에 대한 믿음의 영화, 그 영화가 당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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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nsplash, Yes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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