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의 신선한 변주, ‘보물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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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섬>(SBS)은 전형적인 ‘사랑과 야망’ 드라마다. 재벌가의 충신이었던 남자가 궁지에 몰린 후 복수하는 얘기다. 정통 기업, 정치 드라마의 무게는 그것대로 살리되, 진한 남성미보다 산뜻하고 기민한 인상이 강한 박형식을 전면에 세워 명도를 조절했다. 허준호, 이해영, 우현 등 권력자를 연기하는 남자 배우들도 카리스마와 섬세함을 겸비한 타입이라 앙상블이 좋다. 매 장면 몰입감과 완성도가 훌륭해서 첫 주 시청률이 8%대가 나왔다.
주인공 서동주(박형식)는 뛰어난 눈썰미와 수완을 인정받아 대산그룹 회장 차강천(우현)의 금고지기가 되었다. 1화에서 차 회장의 사위 허일도(이해영)가 에너지 개발 사업 비리로 국회 청문회에 불려가자 서동주는 뒤에서 여러 가지 작업을 한다. 전직 검찰총장 염장선(허준호)을 통해 로비를 벌이고, 국회의원 남성철(류승수)을 협박해서 허일도를 엄호하게 만든다. 일개 기업 상무인 서동주가 국회의원에게 손찌검을 한다거나 우아한 책사 시늉을 하던 염장선이 차 회장 앞에서 거두절미 돈 얘기를 꺼내는 장면은 흥미롭다. 작품의 세계관, 인물 간의 관계, 캐릭터를 빠르게 각인시키는 동시에 자극과 반전으로 시청자의 순간 집중력을 끌어올린다. 천박하고 비릿한 권력자를 과감하게 묘사하되 절제된 연기로 느끼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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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부터는 서동주에게 본격 위기가 닥친다. 과거 서동주는 차 회장의 손녀를 유혹해서 재벌가 일원이 되려다가 신입 사원 여은남(홍화연)과 사랑에 빠져서 포기했다. 그런데 이제 여은남이 그를 배신하고 뜻밖의 정체를 드러냄으로써 서동주의 인생 설계가 무너진다. 한편 그룹 후계를 노리는 허일도는 염장선과 손을 잡는다. 그들은 차 회장의 복잡한 가족사 때문에 일을 서두른다. 회장의 신임을 받는 서동주를 제거하는 것도 그들 계획의 일부다. 회장은 마지막으로 서동주를 시험하고, 서동주는 괴한에 맞서다가 곤경에 처한다. 이후 주인공이 2조원의 정치 비자금을 해킹하고 복수에 나선다는 게 공개된 줄거리다.
<보물섬>의 초반 이야기 밀도와 전개 속도는 이 작품의 야심이 만만치 않음을 드러낸다. <에어시티>(MBC), <장영실>(KBS1), <돈꽃>(MBC) 등 선 굵은 드라마를 써온 이명희 작가는 이번 작품에서 주요 대립쌍인 서동주와 염장선뿐 아니라 주변 인물들에게도 다양한 복심을 심어두었다. 얄팍한 기회주의자 허일도가 어떻게 죽은 친구를 대신해 재벌 사위 자리를 꿰찼는지, 여은남이 사랑을 버리고 얻으려는 게 무엇인지, 차 회장의 혼외자를 기르고 있는 지영수(도지원)는 어떤 인물인지, 탄탄한 포석이 궁금증을 일으킨다. 이들은 각자의 욕망에 따라 수시로 아군과 적군이 바뀌고 서로 이용할 수 있는 존재들이다. 한시도 긴장을 놓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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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 비자금, 비선 실세, 정치 검사 따위는 한국 드라마에서 이제 피로감이 들 정도로 흔한 소재다. 복수극도 마찬가지다. 목표 지향적인 주인공에게 비장한 러브 스토리를 부여하는 건 흘러간 유행이다. 그런데 <보물섬>은 이런 낡은 요소에서 여전히 유효한 매력을 찾아내 솜씨 좋게 재조립했다. 정의 구현이나 사회 비판이 아니라 부패한 세계의 일부였다가 내쳐진 자의 반격에 초점을 맞추고, 비자금 2조원이라는 확실한 전리품을 제시함으로써 주인공의 게임에 스릴을 더했다. 기억력, 협상력, 몸싸움이 모두 뛰어난 서동주는 구질구질한 칠전팔기 성공 스토리가 아니라 원맨 액션극처럼 시원한 전개를 기대하게 만든다.
러브 스토리는 주인공의 동기를 강화하고 시청자의 감성을 자극하는 데 효과를 발휘한다. 하지만 구질구질한 순애보는 없다. 서동주는 연인의 배신에 당황, 분노, 좌절하지만 곧 이성을 되찾고 현실을 받아들인다. 주인공뿐 아니라 인물들 전반의 감정선이 정제되어 있고 연기 톤이 자연스럽다. 이런 차이 때문에 <보물섬>은 2000년대 초반 유행한 대작 드라마를 상기시키면서도 충분히 동시대적인 느낌을 준다. 이야기의 규모에 걸맞은 고급스러운 영상도 몰입에 일조한다.
<보물섬>은 기세와 디테일이 모두 뛰어난 작품이고, 모처럼 성별, 연령 관계없이 추천할 수 있는 드라마다. 콘텐츠 플랫폼이 다양해진 상황에서 지상파 드라마의 갈 길이 어디인지, 힌트를 엿본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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