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작가와 작품을 분리할 수 있는가?

2025.03.08

작가와 작품을 분리할 수 있는가?

영화 비평가는 종종 딜레마에 빠진다. 작가와 작품을 분리할 수 있는가? 작품은 상찬받았는데 뒤늦게 작가의 인간적 흠결이 발견됐다면? 도덕적, 윤리적, 사법적 지탄의 대상이 됐다면? 작품에 관한 판단은 달라질 수밖에 없는가? ‘문제적’ 인간의 작품이 좋다는 게 가당키나 한 말인가? 작품이 곧 작가라고 할 수 없겠으나 작품에 작가의 흔적이 없다고 말할 수도 없지 않은가? 작가의 면면을 따져가며 작품을 판단하는 건 피할 수 없는 일 아닌가? 그렇다면 이것은 검열이 되는 게 아닌가? ‘온전히 작품으로만 판단한다’라는 말이 가능한가? 작가와 작품은 얼마나 가까운가? 얼마나 먼가?

Getty Images

계속되는 물음표 앞에서 좀처럼 명쾌한 대답을 찾지 못한다. 비평가만 곤란한 건 아니다. 관객, 독자처럼 작품을 수용하는 사람들도 사정은 비슷하다. 이를테면 한때 사랑해마지않던 ‘나의 연예인’이나 ‘나의 작가’가 위법과 극악무도한 행위를 저질렀을 때, ‘덕후’로서 느끼는 ‘멘붕’과 혼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의 팬으로 남을 수 있을까? 팬임을 공공연히 말할 수 있을까? 문화 매개자도 마찬가지다. 작품을 소개하고 알리는 데 기여하는 이들은 작가의 명성과 평판에 따라 작품의 전시와 배급을 유보하거나 철회하기도 한다. 이 문제는 당사자인 작가에게도 나름의 대답을 요청할 때가 있다. 예컨대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작품을 만들었다고 했을 때, 어떤 작가는 적극적으로 그것을 강조하기도 하지만 또 어떤 작가는 적극적으로 자신과 작품을 분리하고 둘 사이에 선을 긋곤 한다.

작가의 도덕성과 작품의 도덕성 사이 인과관계를 따져 묻는 일은 작가, 저자라는 근대적 인물의 등장과 함께 출현했다. 이 오래된 주제가 현재의 감각과 질문으로 다시금 제기되고 치열하게 논의된 데는 2010년대 중반 이후 전 세계 문화 예술계가 직면한 미투 운동의 영향이 지대할 것이다. 정치적, 윤리적 쟁점과 얽힌 사건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올 때마다 작가와 작품의 관계를 둘러싼 첨예한 질문이 계속됐다. 다루기 힘든 주제를 정면으로 들고 와 구체적으로 파고든 책이 도착했다. 사회학자 지젤 사피로의 <작가와 작품을 분리할 수 있는가?>(2025, 이음)다. 지난해 국내에 번역된 클레어 데더러의 <괴물들: 숭배와 혐오, 우리 모두의 딜레마>(2024, 을유문화사)와 동일한 문제의식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레퍼런스를 얼마간 공유하기도 한다. 데더러가 에세이스트로서의 자질을 한껏 발휘해 주관적 감상, 감정, 자신의 구체적 경험의 가치를 인정하고 고양하는 방식으로 이 주제에 접근한다면, 사피로는 이론가적 기질과 전문성을 발휘한다. 논란이 되는 사안에 관한 사회학적 접근뿐 아니라 분석철학, 문학 이론 등 인문 사회과학의 논거를 두루 가져와 이론적 토대를 살피고 질문의 세부를 하나씩 파고든다. 1부에서는 작가와 작품의 관계를 세 가지로 분류해 이론적으로 검토하고 2부에서는 구체적 사례를 제시해 이해를 돕는다.

지젤 사피로, '작가와 작품을 분리할 수 있는가?'(2025, 이음)
클레어 데더러, '괴물들: 숭배와 혐오, 우리 모두의 딜레마'(2024, 을유문화사)

성마른 독자는 물을 것이다. 그래서 결론이 뭐냐고. 작가와 작품은 분리할 수 있는 거냐고. 결론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이다. 속 시원하니 명쾌한 한 줄 요약을 원했다면 다소 맥이 빠질지 모르겠지만, 난제에 정답이 있을 리 없지 않은가. 난제는 여전히 난제이고 난제를 피할 도리가 없다면 난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접근해 풀 수 있는 실마리를 잡을 것인가가 더욱더 현실적이고 유용하며 건강해 보인다. 잠정적이라도 대답을 찾기 위해 논쟁과 논의를 해야 하는데 그 과정 자체가 없을 때 더 큰 문제가 야기되는 것을 봐왔으니 말이다. 지젤 사피로의 결론을 조금 더 살펴보자. 일단, 작가와 작품을 분리할 수 있다고 할 때, 그 이유는 무엇인가. 작가와 작품의 동일시는 절대 완전하지 않고 작품이 작가를 벗어나기 때문이다. 작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여러 매개자와 얽히게 되고 작품이 완성된 후에는 수용자들의 수용 과정을 통해 다양한 주관적 해석의 차원을 열어젖히기 때문이다. 이때 중요한 건 ‘수긍할 만한 해석의 경계를 정하는 기능이 작품에 대한 토론과 논평에 있’(197쪽)다는 점이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작품을 검열하거나 삭제하는 것이 아니라 내재적, 외재적 분석을 하는 게 더 절실하다. 반면 ‘작가와 작품을 분리할 수 없다’라고 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작품에는 형식화 작업을 통해 어느 정도 승화되고 변모된 상태로 작가의 윤리·정치적 성향과 세계관의 자취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작가가 작품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지는 것이야말로 게임의 규칙이다. 그렇기에 작가와 작품은 분리될 수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여기서, 지젤 사피로가 ‘작가와 작품은 분리할 수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고 할 때 공통적으로 해당하는 게 있다. 비평하는 일을 업으로 삼는 나로서는 정신이 번쩍 드는 지점이다. 바로 작품을 비평하고 심사하고 매개하는 이들이 가져야 할 사회적, 직업적, 양심적 책무의 강조다. 작가가 권한을 남용할 때, 작가와 작품이 무비판적으로 수용될 때,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문화 예술계의 관행이 이어질 때, 거기에 일침을 가하는 게 비평가의 일이요, 책무라는 정확한 지적이다. 작가와 작품의 관계에 관한 비평적 시선으로 시작한 책은 그것에 머물지 않고 비평의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역할론을 탐색하고 실천적 담론을 요청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작가와 작품 앞에서 비평가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질문은 계속된다.

포토
Yes24, Getty Images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