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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수 재즈 보컬 음반의 남예지

2025.03.19

최우수 재즈 보컬 음반의 남예지

남예지가 2025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재즈 보컬 음반 부문을 수상했다. 여정을 통해 발견한, 틈 속의 오래된 노래다.

<오래된 노래, 틈>은 말 그대로 한국 재즈 역사에 존재하는 미싱 링크라는 틈을 상상하며 만든 앨범이다. 일제강점기부터 들어온 재즈가 격동의 근대를 겪지 않고 한국에 뿌리내려 긴 시간 자리했다면 어떤 모습이었을까, 혹은 그 시기 재즈가 있었다면 어떤 모습이었을까에 대한 이야기다. 가장 한국적인 재즈 음악으로 그는 제22회 한국대중음악상에서 최우수 재즈 보컬 음반 부문을 수상했다. 수상을 기념하며 그와 이야기를 나눴다.

먼저 수상 소감부터 묻습니다.

아주 기뻤어요. 받아도 되나 싶으면서 지난 한 해 동안 인상적으로 들은 앨범의 뮤지션들도 떠올랐어요. 무엇보다 수록곡을 오랫동안 클럽에서 연주해왔기에 같이 해준 연주자들께 감사하면서도 죄송했고요. 많은 분에게 연락을 받으면서 여러 감정을 느꼈습니다. 어쨌든 정말 행복합니다.

재즈 음악은 어떻게 시작했나요?

장르로 접근하기보다는 노래 부르는 것 자체를 좋아했어요. 특이한 보컬 있으면 다 따라 해보고, 빌리 홀리데이나 엘라 피츠제럴드 같은 보컬의 목소리가 마음에 들어서 거기서부터 듣기 시작했죠. 다른 음악가들처럼 재즈가 너무 좋아서, 나와 잘 맞는 것 같아서 해야겠다고 결정한 순간은 없었어요. 재즈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학원에서 권해서 오디션 보러 간 회사가 누보 송(Nouveau Son)이라는 앨범을 제작하는 곳이었어요. 앨범에 수록할 노래 한 곡을 부를 보컬을 찾고 있었고, 마침 수업 시간에 하던 재즈곡으로 오디션을 봤어요. 그게 ‘This Masquerade’였죠. 제가 눈에 들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앨범을 녹음하고 그다음에 제 앨범을 내자 그러셔서, 당연히 그냥 가요를 하고 싶었어요. 빅마마, 거미를 좋아했고 R&B, 소울 같은 걸 하고 싶었는데 자꾸 “너는 목소리가 재즈다, 재즈를 하라”고 하셨어요. 왜 재즈라고 하시지? 자의가 아니라 타의로 재즈를 한 것이 특이한 점이죠.

‘이게 아닌데’는 언제 사라졌나요?

아닌데, 아닌데 하다가 결국 진짜 아니어서 복학을 했어요. 범죄심리학자가 되고 싶어서 심리학과로 복학하고, 열심히 장학금 받으면서 학교 다녔단 말이에요. 그런데 어느 날 친구가 공연 기획사 알바를 하다가 보컬이 급하게 필요하다는 거예요. 그게 신관웅(재즈 1세대, 국내 최초로 재즈 빅밴드를 결성하신 분) 빅밴드인 거예요. 당시 왜 보컬이 없었는지 모르겠어요. 재즈 두 곡 연습해오라고 하셔서 그걸 했더니, 선생님이 운영하시던 재즈 클럽 문글로우로 일주일에 한 번씩 오라고 하셔서 거절 못하고 몇 주 동안 똑같이 두 곡을 계속 불렀어요. 그러다 보니까 다른 클럽에 연주하러 가자고들 하고, 걷잡을 수 없이 일이 커졌죠. 20대 내내 그런 혼란이 있었어요. 이게 아닌데, 나는 범죄심리학 해야 하는데. 그러다 20대 넘어가면서 실용음악 석사를 하기로 결심했어요. 그 전에 스스로를 재즈 보컬이라고 소개하기 힘들었던 건 음악적인 이유였는데요. 그냥 재즈를 흉내 내는 사람에 불과하다고 여겼어요. 즉흥연주에 딱히 관심 있지도 않았고, 스캣을 하는 보컬도 아니었고, 헤드만 부르는 사람이라고 여겼어요. 그러다 30대로 넘어가면서 재즈 보컬로 불리는 것이 부끄럽지 않으려면 즉흥연주를 해야겠다 싶어서 나름대로 교재를 샀어요. 그러면서 재즈가 좋아졌죠. 이렇게 재밌는 거였구나.

신관웅 선생님을 만났을 때가 언제인가요?

2007년 전후, 대학 졸업할 때 즈음이요. 2003년이 누보 송, 2004년이 1집, 그러고 나서 두 번째 앨범이 2011년이고. 재즈파크와 계약하고 그때 이사님이 앨범 작업을 하자 그러셔서 계약하고 앨범을 냈죠.

2집 나올 때는 석사과정 중이었나요?

하기 전이었어요. 평소 영감을 받아서 곡을 쓰기보다 필요에 의해 하는 사람인데 그때는 이상하게 논문 쓰려고만 앉으면 음악이 하고 싶더라고요.(웃음) 그래서 3집은 모두 제 곡으로 채웠죠.

그 후 본인이 참여한 메리고라운드 앨범이 발매되고 나서 상대적으로 빠르게 3집이 나왔고, 논문 때문이지만 전 곡을 다 썼기에, 어떻게 보면 남예지란 뮤지션의 감성을 알 수 있는 앨범이죠.

맞아요. 어떤 재즈를 해야겠다는 생각도 아니고 제가 좋아하는 것들을 다 합쳤어요. 논문 쓰면서 음악도 많이 들었고, 괴롭다 보니까 딱히 재즈 보컬리스트로서 무언가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은 아니었지만 내가 좋아하는 거 다 해봐야겠단 음반이었어요. 1·2집은 회사가 있었잖아요. 그런데 3집은 혼자 하려다 보니 앨범 나오고 완전히 진이 다 빠져서 공연이고 뭐고 아무것도 안 했어요. 그래서 그때 같이 한 임보라 언니를 비롯한 연주자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죠.

저서 <재즈, 끝나지 않는 물음>이 2022년에 출간되고, 2024년에 앨범이 나왔어요. 책 이야기를 해보고 싶은데, 언제부터 재즈를 철학 이론에 기반해 텍스트로 접근했나요?

석사 논문을 써야 해서 다른 논문을 많이 찾아봤어요. 그러다 보니 실용음악 분야 논문 주제의 스펙트럼이 그렇게 넓진 않더라고요. 음악 분석이나 음악사 쪽으로 치우쳐 있고, 클래식이나 국악은 미학, 철학 등 다양한 분야와 많이 융합되는데 그에 비해 지평이 넓지 않았어요. 이 물꼬를 터보고 싶다는 생각을 잠시 했어요. 그래서 석사과정 마치고 다시는 논문을 안 쓰려고 했지만 조금 지나니까 박사과정에 도전해볼까 싶더라고요. 그래서 그때 내가 생각했던 융합 연구를 해봐야겠다 싶어서 재즈 관련 책을 많이 읽었어요. 재즈사나 음악·뮤지션 소개 같은 책이 아주 많고 영어로 된 책 중에는 미학을 다루는 저서도 있었어요. 다 읽진 못했지만 그런 식으로 재즈에 접근해보고 싶었고, 책을 쓸 때는 어떤 시대의 어떤 뮤지션에 대해 대표성을 갖고 소개하진 말아야지 싶었죠. 저도 그렇지만 읽는 입장에선 그게 다라고 여길 수 있으니까요. 철학, 미학을 좋아했으니 다른 방향으로 써야지 싶었어요. 라캉이나 들뢰즈를 읽다 보면 재즈를 이야기할 때 좋을 것 같은 문장이 있어서 메모했다가 글을 한번 써보면서 그 책이 나왔어요. 앞으로도 이런 작업을 계속하고 싶고 논문 작성에도 임하고 있는데, 그래도 다음 책은 덜 무겁게, 재즈 감상과 음악에 관한 좀 더 친숙한 내용을 써보고 있습니다.

이번 앨범은 연구와 맞물려서 나온 작품이잖아요. 언제, 어떤 계기로 관심을 가졌나요?

석사 논문이 1930년대 한국 재즈 송에 관한 연구였어요. 재즈 송으로 분류되진 않았더라도 제가 가늠하기엔 재즈의 씨앗이라고 할 수 있는 음악이 있었음을 그때 알았죠. 그때부터 한국의 예전 음악에 관심이 갔어요. 연구도 하고 자연스럽게 작품도 나오고.

한국대중음악상을 수상한 작품이지만, 본인 커리어에서 이 앨범은 어떤 의미인가요?

상과는 인연 없이 살았는데 이젠 이 앨범이 외적으로 빛나는 경력이 됐고, 마음으론 음악적인 인정보다는 지금 하고 있는 작업물이 공감을 받는구나 싶어요. 이런 음악이 존재했고, 과거에 단절되는 계기가 없었다면 이런 음악이 나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어느 정도 공감해주시는구나 싶어서 자신감도 생겼죠. 연장선의 작품을 또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응원받는 기분이랄까요. 잘하고 있구나, 더 해봐라, 잘해봐라 격려해주는 것 같아요.

앨범 작업 같이 하신 분들을 소개해주세요.

프로듀서, 베이시스트 이원술 씨는 제가 좋아하는 선배님이고, 음악에 대해서나 생활하며 삶의 곳곳에 있는 고민을 터놓는 몇 안 되는 지인이에요. 이 앨범 준비할 때 기획 의도나 악보, 논문 자료를 많이 정리해서 들고 찾아갔어요. 처음엔 싫다고 하셨다가 한두 번 매달렸더니 응해주셨어요. 앨범 준비하면서 제 고충을 옆에서 해결해주셨지만 계속 지지해주고, 열받아서 전화하면 괜찮다고 해주시고. 그런 말을 들으면 평안이 찾아오는 거예요. 그래서 정말 감사하죠. 믹스 마스터를 해준 윤정오 기사님도 개인적으로는 모르지만 원술 님과 잘 아셔서 부탁드렸는데 잘해주셔서 감사해요. 피아니스트 비안 오빠는 개인적으로도 알지만 원술 님과 친한 동료기도 해요. 독보적인 색채가 있어서 소름이 돋았어요.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더라고요. 오정수 님도 같이 연주한 적 있는데, 이번 앨범은 트랙이 다 녹음된 상태에서 오버더빙으로 했어요. 필요한 부분을 골라서 녹음하는 방식으로 작업했어요. 소금이 필요한 곳에 소금을 탁탁 치는 것 같은, 그런 색채의 연주를 들려주셔서 감동받았죠. 드러머를 고민할 때는 제가 김종현 님과 연주를 많이 해봤고, 뒤에서 늘 많이 조율해줬거든요. 언어도 다양하고. 그래서 종현 님과 연주하는 걸 좋아해서 원술 님에게 말씀드렸죠. 합주해보고 좋아하셨고, 그렇게 팀이 됐습니다.

‘목포의 눈물’ 같은 곡은 어릴 때부터 들었나요?

하도 어릴 때부터 엄마가 노래 부르시고, 아빠가 기타 치시는 걸 봐서 옛날부터 또래 애들이 모르는 옛날 노래를 많이 알았어요. 집에 <세광애창곡집>, <팝송대백과>가 있어서 매일 한 장씩 보며 노래했죠. 그중에서 잘 부를 것 같은 곡을 뽑았어요. 해석이 용이할 것 같은 곡 위주로.

앞으로의 계획은?

직업인으로서 이 일을 하다 보면 재즈 뮤지션, 재즈 연주자의 정체성이 혼란스러울 때가 있는데 그를 연구해보고 싶어요. 이런 연구를 자꾸 해야 재즈 연주자가 직업적으로 좀 더 공고해지고, 장르로서 재즈도 우리 음악의 하나로 더 자리 잡을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국내 재즈 연주자의 직업 정체성에 관한 현상학적 연구로 연주자 10분 정도를 인터뷰했고, 이걸 분석해서 올해 내로 논문 쓰는 게 목표예요. 여기에 올해가 광복 80주년이잖아요. 일제강점기 저항 시인들의 시를 활용해 재즈로 연주하는 음반을 내고 싶어요. 끝으로 2020년 코로나19 중에 제가 심심해서 만든, 일반인 100분 정도가 모여서 재즈를 부르는 ‘재즈를 불러봅시다’라는 단톡방이 있거든요. 이분들께 많이 배웠어요. 3월 15일에 공연도 열렸는데, 재즈 전공자가 아니라 보통 사람의 재즈 공연이라고 할 수 있죠. 이런 여러 사람의 관심이 이어져 재즈의 저변 확대에 한걸음 다가설 수 있길 바랍니다.

    블럭(음악 칼럼니스트)
    사진
    남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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