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분류 체계가 무너지는 곳, 피에르 위그의 ‘리미널’
리움미술관에 그 누구도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가 상륙했다. 한없이 이질적인 세계를 설계한 인물은 프랑스 예술가 피에르 위그(Pierre Huyghe). 1990년대 초반부터 현실과 허구,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를 고민해온 거장 피에르 위그가 아시아 최초의 개인전 <리미널(Liminal)>을 선보인다.
전시에서 감상할 수 있는 작품은 총 12점이다. 리미널은 ‘생각지도 못한 무언가가 출현할 수 있는 과도기’를 뜻한다. 그 의미처럼, 곳곳에 배치된 12점의 작품은 완벽하게 ‘아무것도 아닌’ 상태에 놓여 있다. 그리고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피에르 위그의 작품은 말 그대로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전시명과 같은 이름의 작품, ‘리미널’은 황무지를 배경으로 하는 실시간 시뮬레이션 영상이다. 영상 주인공인 얼굴 없는 나체 여인은 바닥을 기고, 벌떡 일어나 손바닥을 응시한다. 전시장에 위치한 센서가 사람 수, 온도 같은 정보를 수집해 그녀에게 지시를 내린다. 이때 관람객은 예술품을 감상하는 대상일 뿐 아니라 작품에 직접 영향을 끼치는 주체가 된다. 거대한 스크린 앞에 서자 밀려든 감정은 무력감이었다. 주체가 됐지만, 정작 통제권은 주어지지 않아서다. 피에르 위그는 자신이 예술을 하는 이유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분류 체계가 흐릿해지는 영역을 창조하고, 그곳에 들어선 관람객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관람객이 곧 작품이 되고 작품 속 여인과의 경계가 사라지자 온갖 생각이 몰려들었다.
어두컴컴한 전시장을 배회하다 보면, 황금색 마스크를 쓴 채 내부를 방랑하는 사람들과 마주치게 된다. 이 금빛 마스크는 피에르 위그가 선보이는 최신작, ‘이디엄(Idiom)’이다. 센서가 내장된 마스크는 실시간으로 주변 정보를 채집해, 인간의 귀로는 해석할 수 없는 언어를 발화한다. 전시장 내 이디엄들은 이 언어로 교류하고, 마스크를 쓴 연기자는 오직 ‘운반 수단’으로만 기능한다. 비인간이 인간에게 명령을 내리면서 또 한번 생경한 감각을 느끼게 된다. 인간과 기계의 역할이 바뀐 모습을 보며, 기계가 인간을 지배하는 디스토피아를 공상했다.

전시 <리미널>은 보테가 베네타가 후원했다. 보테가 베네타는 2024년 베니스 푼타 델라 도가나(Punta della Dogana)에서 열린 피에르 위그 개인전에 이어 이번에도 후원하며 그에게 아낌없는 지지의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고 보테가 베네타의 팬이라면, 황금빛 마스크를 쓴 연기자의 의상을 유심히 살펴보길. 그들의 의상 역시 보테가 베네타 것으로, 피에르 위그의 철학을 십분 반영한 ‘또 하나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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