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당신은 인간입니까?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에 관해 ‘리미널’展

2025.03.21

당신은 인간입니까?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에 관해 ‘리미널’展

요즘 젊은 관람객에게 뜨거운 사랑을 받으며 장안의 화제가 되고 있는 리움미술관의 전시 <리미널(Liminal)>에 다녀왔습니다. 현대미술의 고정관념과 형식을 깨며 새로운 세계를 탐구해온 작가 피에르 위그(Pierre Huyghe)가 아시아에서 첫선을 보이는 전시죠. 이번 전시는 피노 컬렉션의 푼타 델라 도가나와 공동 제작한 작품을 포함, 지난 10여 년 동안 작가의 탐구를 조명하는 작업 12점을 소개합니다. 그런데 보통 우리가 전시장에서 보는 작품과는 다릅니다. 실시간 데이터를 활용한 프로그램과 생명공학 등을 결합한 작품이 계속 변화하고 있거든요. 고정된 채 선보이거나 다른 곳으로 떠돌아다니는 그런 작품이 아니라는 것, 즉 지난 수백 년, 아니 수천 년 동안 지속되어온 예술의 시스템 자체를 전복하는 시도라는 사실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카마타(Camata)’, 2024-현재, 기계 학습으로 구동되는 로보틱스, 자기생성 영상, 실시간 인공지능 편집, 사운드, 센서, 작가, 갤러리 샹탈 크루젤, 마리안 굿맨 갤러리, 하우저 & 워스, 에스더 쉬퍼, 타로 나수, 안나 레나 필름 제공
‘리미널’, 2025, 전시 전경, 리움미술관 제공, 사진 레스(Less)
‘캄브리아기 대폭발 16’, 2018, 수조, 투구게, 화살게, 아네모네, 모래, 바위, 작가, 하우저 & 워스 제공

제목 ‘리미널’은 “생각지도 못한 무언가가 출현할 수 있는 과도기적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는 아마 작가 피에르 위그가 생각하는 예술 혹은 세상의 정의일 겁니다. 불가능하거나 상상할 수 없는 것을 어떻게 경험할 수 있을까, 전시에서 새로운 주체성은 어떻게 탄생할 수 있을까, 인간과 비인간의 상호 의존성을 어떤 방법으로 인지할 수 있을까 같은 질문 말이죠. 이를 위해서 전시는 예측 불가능성을 가시화하고, 인간과 비인간이 공존하는 새로운 생태적 환경을 연출해 보입니다. 사실 이런 질문 혹은 문장 자체가 낯설 수밖에 없습니다. 당연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런 전시를 경험해보지 못했으니까요.

피에르 위그에게 전시는 완성된 결과물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환경입니다. 그 환경을 구성하는 요소가 되는 작품 역시 살아 있습니다. 특히 전시 제목과 같은 ‘리미널'(2024-현재)이라는 영상 작품은 전시 전반에 으스스한 분위기를 선사하는 주인공입니다. 얼굴 없는 인간 형상이 등장하는데요, 이 형상의 움직임과 시선은 전시 공간의 센서가 포착한 환경과 인공 신경조직 데이터를 바탕으로 결정됩니다. 영상 속 인간도 아니고 인간이 아닌 것도 아닌 그 대상은 이해할 수도, 예측할 수도 없는 이상한 행동을 합니다. 즉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이 행동이, 아무리 같은 작품이라고 해도, 다른 전시장에서는 볼 수 없을 공산이 크다는 거지요. 외부 조건을 학습하고 기억을 쌓아가며 보여주는 행동이니까요. ‘리미널’은 보통의 영상 작품과는 달리 러닝타임이 기재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루 종일 이 불가사의한 동작들을 보고 있을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리미널’, 2025, 전시 전경, 리움미술관 제공, 사진 레스(Less)
‘리미널’, 2024-현재, 실시간 시뮬레이션, 사운드, 센서, 작가, 갤러리 샹탈 크루젤, 마리안 굿맨 갤러리, 하우저 & 워스, 에스더 쉬퍼, 타로 나수, 안나 레나 필름 제공

전시작 중에서 가장 먼저 만들어진 작업은 ‘휴먼 마스크(Human Mask)'(2014)입니다. 후쿠시마 주변 핵 배제 구역을 배경으로, 모두가 떠나버리고 폐허가 된 그곳에, 인간의 가면을 쓴 원숭이가 서성입니다. 잘 훈련된 원숭이는 영락없이 사람처럼 굴기 때문에, 보다 보면 헷갈리기까지 합니다. 인간인가 혹은 인간이 아닌가, 왔다 갔다 하죠. 이 작업은 전시의 다른 작품을 지배하는 질문의 출발점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인간 가면을 쓴 비인간을 통해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질문하던 피에르 위그는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생생히 느낄 수 있는 여러 장치를 기술적으로 고안했습니다. 하지만 기술을 완성하는 건 인간입니다. 기술은 피에르 위그의 상상력에 힘입어 우리가 한 번도 만나지 못한 낯선 현실을 대면하도록 합니다.

‘휴먼 마스크(Human Mask)’, 2014, 영상, 컬러, 사운드, 19분, 피노 컬렉션, 안나 레나 필름 제공

“나는 이야기의 형태가 선형성을 벗어날 때 흥미를 느낀다. 역사를 넘어선 서사 밖의 허구에 관한 것이다. 시뮬레이션은 혼돈을 지날 수 있게 해주는 여러 가능성의 투영이다.” 설명 글에 인용된 작가의 말은 현대미술의 면면이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급변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꽤 비싼 관람료와 베니스 푼타 델라 도가나에서 열린 전시만 못하다는 평에도 불구하고 N차 관람을 하고 싶은 이유는 오늘 내가 본 것이 내일은 달라질 거라는 묘한 기대 때문입니다. 스산하고 낯선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이 순간이 바로 현실이라니, 이보다 더 흥미로울 수 있을까요. 평일 낮에도 관람객은 꽤 많았으니 전시를 고즈넉하게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전시는 오는 7월 6일까지 계속됩니다.

정윤원(미술 애호가, 문화 평론가)
사진
리움미술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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