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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수 재즈 연주 음반의 지혜 리 오케스트라

2025.03.21

최우수 재즈 연주 음반의 지혜 리 오케스트라

지혜 리 오케스트라가 2025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재즈 연주 음반 부문을 수상했다. 지혜 리가 말하는 뉴욕에서 한국 여성으로 음악을 한다는 것.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재즈 연주 음반 부문을 수상한 지혜 리 오케스트라(Jihye Lee Orchestra)는 한국에서만 인정받은 것이 아니다. 그래미닷컴부터 <뉴욕 타임스>를 비롯해 <르 몽드>, <가디언> 등 세계적인 주요 매체가 그의 앨범을 다루었고, 지난해에는 베스트 재즈 앨범을 꼽는 여러 리스트에 올랐다.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하지만, 지혜 리의 음악에는 한국이 있다. 특히 <Infinite Connections>에는 할머니에 관한 이야기부터 한국인 여성으로서 뉴욕 재즈 신(Scene)에서 활동하는 본인의 정체성까지 텍스트 없이도 또렷이 전달한다. 수상 후 한국에 잠시 머무는 그를 인터뷰했다.

미국에 가면서부터 재즈를 하기로 결심했나요?

전혀 아니에요. 원래는 싱어송라이터로서 음악을 시작했어요. 보컬은 보컬만의 기실이 있는지, 제가 노래를 하면 맞는 옷을 입지 않은 것 같았어요. 노래와 작곡 중에 후자를 더 즐겨 했죠. 지금 한국 재즈 신도 노력하고 있지만, 그때는 더 노력해야 하던 때였어요. 그래서 재즈를 하겠다는 생각보다는 작곡을 더 알고 싶었고, 어디서 누구에게 어떻게 물어야 새로운 작곡의 길을, 보지 못한 길을 볼 수 있을까 고민했어요. 당시에는 재즈 작곡가가 되어야겠다, 뉴욕에서 활동하겠다는 것보다 돈을 좀 모았으니 2년 동안 그 길에 갔다 와보기로 했죠. 보컬로 들어가서 이것저것 보다가 재즈 작곡을 전공하게 됐어요.

그 전에도 재즈에 관심이 있었나요?

처음에는 R&B, 소울 음악을 좋아했어요. 처음으로 이끈 음악이었고, 재즈는 남들이 다 아는 음악을 들었죠. 나중에 싱어송라이터로 활동할 때는 인디 팝 정도 들어봤어요. 재즈는 잘 알지 못했고 빅밴드를 실제로 본 적도 없었고요. 미지의 세계였죠.

미국에 간 뒤 생각보다 빨리 첫 앨범 <April>이 나왔군요.

맞아요. 2011년에 아무것도 모르고 가서 2014년에 졸업하고, 2015년에 녹음했으니 지금 돌이켜보면 어처구니가 없죠.

첫 앨범은 어떻게 나오게 됐나요?

재즈 작곡을 하다 보면 계속 앙상블이 늘어요. 처음에는 솔로, 듀오 곡을 쓰고 트리오로 가다 결국에는 17명으로 구성된 빅밴드를 쓰는 것이 마지막 관문인데요. 학교에서 복도를 지나가다 마주친 앙상블 수업의 압도적인 소리를 듣고 창문에 매달려 한참 들었어요. 그런 걸 처음 알았고, 코스를 계속 밟으면서 빅밴드 작곡을 했죠. 2013년 처음에 쓴 곡이 ‘Deep Blue Sea’였고, 그다음 해 4월에 ‘April’이라는 곡을 썼어요. 그때 세월호 사건이 터졌죠. 첫 번째 곡과 두 번째 곡이 연결되어 있으니, 나머지 곡을 써서 모음곡집을 내고 싶었어요. 선생님들도 흔쾌히 도와주시고, 기적적으로 펀딩도 되고, 멋모르는 학생의 객기였죠. 그 앨범 덕분에 성장했지만, 가끔은 기다렸다 뉴욕에서 녹음했으면 어땠을까 싶어요. 보스턴에서 녹음했고, 바로 뉴욕으로 가서 멤버들과는 한 번도 공연을 못했거든요.

같이한 이들도 아쉬웠겠어요.

많이 그랬죠. 당시에는 보스턴으로 돌아가서 공연하고 싶었는데 잘 안 되더라고요. 제가 싱어송라이터를 벗어나 돌아올 수 없듯이.(웃음) 그래도 사람이 자기 둥지를 한번 떠나면 또 다른 커뮤니티가 생기니까요.

그럼에도 전작에 참여한 숀 존스(Sean Jones)는 합류했어요.

당시 브라스 학과장이었어요. 그분이 재즈 빅밴드 리허설 수업에 한번 왔는데, 그의 말이 인상적이어서 고민하다 피처링을 부탁했어요. 페이도 알아서 달라고 하고, 엄청 적은 돈을 얘기했는데 “그러던지” 하더라고요. 그가 너그러운 마음으로 피처링을 해줬고, 그 인연으로 두 번째 앨범에도 참여했어요.

한국 음악을 언제부터 고민하기 시작했나요?

두 번째 앨범 전후였어요. 저는 작곡가가 자기 곡에서 숨을 수 없다고 봐요. 드러나지 않을 수가 없어요. 나의 곡은 당연히 나를 반영하고, 살아온 환경이나 처한 상황을 보여줄 수밖에 없죠. 보스턴과 뉴욕에서 쓴 곡이 너무 다르더라고요. 그게 정말 신기해요. <Daring Mind>는 처음 뉴욕에 살며 느낀 것이 담겨 있어요. 처음에는 뉴욕을 싫어했어요. 차가운 도시고, 학교마저도 그렇더라고요. 보스턴에서 뉴욕으로 옮기면서 적응에 시간이 걸렸고, 애증의 도시가 됐죠. 영감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있는 곳이기도 하고요. 그렇게 뉴욕을 알아가는 시점의 저를 표현한 게 <Daring Mind>였고, 세 번째 앨범은 팬데믹을 겪으며 정체성을 고민하는 시점에 만들었어요.

합을 맞추는 과정 자체가 물리적으로 어려웠을 듯합니다.

빅밴드는 팬데믹이 아니라도 합주가 어려워요.(웃음) 17명이 각자 일이 있기에 좀처럼 모이기 힘들고, 만났다 해도 합을 맞추기가 쉽지 않죠. 그래서 두 번째 앨범이 나오고 1년 뒤에야 발매 공연을 했어요. 여러모로 힘든 앨범인데, 생각보다 많은 사랑을 받았어요.

서울숲재즈페스티벌에서 공연할 때는 한국 연주자들과 함께했잖아요. 모험이었을 것 같군요.

진짜 모험이었죠. 일단 여우락 페스티벌과 서울숲재즈페스티벌에 감사드려요. 당시 저는 3집을 구상하며 많은 고민을 했는데, 국립극장에서 국악과 관련해 구상하는 것이 있다면 해보라고 기회를 주신 거잖아요. 장단을 이용한 오케스트라를 쓰고 싶었는데, 여우락에서 공연 기회를 주신 덕에 시도할 수 있었고 거기서 수정을 거쳐 <Infinite Connections>가 나왔어요. 서울숲재즈페스티벌을 통해 많은 관객을 만났어요. 편안하게 연주하도록 자리를 만들어준 건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또 한국 연주자분들과 합주를 몇 번이나 할 수 있었겠어요. 김영후 빅밴드 같은 빅밴드가 거의 없기도 하고. 신인 작곡가가 창작곡을 가지고 빅밴드를 정기적으로 하기 어렵고요. 2022년에 한국대중음악상을 수상하고 서울숲재즈페스티벌과 여우락을 하며 한국 연주자들과 합을 맞춰볼 수 있어서 좋았어요. 그게 시작이길 바랐죠. 궁극적으로는 한국에 뉴욕 연주자들을 데려와서 같이 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반대로 한국 연주자들과 뉴욕에서 공연하고도 싶고요. 서로에게 좋은 기회가 오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처음 <Infinite Connections>를 구상하던 시기는 언제쯤인가요?

2018~2019년쯤 일본과 브라질에서 온 작곡가 친구들과 기획 공연 이야기가 나왔어요. 많은 재즈 작곡가가 각자 다른 나라에서 와서 하는 음악을 들려주고 싶었고, 한국의 것을 접목하고 싶어서 처음 편곡한 것이 새타령, 방아타령, 아리랑이었어요. 우리나라는 코드가 없고 펜타토닉(5음계)으로만 이뤄져 있잖아요. 이걸로 무엇을 해야 하나 고민하며 편곡을 했는데, 의외로 외국인에게 반응이 아주 좋았어요. 그때 온 한국 연주자와 관객이 눈물을 글썽였죠. 고국의 노래를 들을 일이 없다가 웅장한 새타령을 듣고 뭉클해하더라고요. 내게는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것 같아서 편곡을 몇 곡 했어요. 그러다 팬데믹이 터지면서 국악, 특히 장단에 관심을 가졌죠. 재즈도 홑박(5박, 7박)이 많잖아요. 그런데 국악에서의 장단이 어드밴스트 리듬(Advanced Rhythm)인 거예요. 우리 선조는 어떻게 음악을 이해했길래 복잡한 리듬을 편안히 여기며 이런 퍼커션 앙상블이라는 걸 발전시켰을까 싶으면서, 이게 재즈에 매우 가깝고 재즈 리스너들이 좋아할 요소 같았어요. 재즈는 하모니가 중요한데 우리나라는 궁상각치우밖에 없고, 그렇다고 마이크로톤(반음에서 미분된 음)을 할 수도 없었죠. 그런 고민을 하다가 장단에 매료되었어요. 물론 국악을 해오신 분들에 비하면 겉핥기지만 재즈 작곡가의 시선으로 재해석을 많이 고려했어요. 그러면서 2020년에 작은 커미션을 받아서 곡을 쓰고 있었어요. 어차피 나는 조상의 음악을 하니, 근현대사 100년간 가장 다이내믹한 세대인 할머니에 대한 곡을 써보자 했는데 그해 할머니께서 돌아가셨어요. 그다음 해에는 어머니가 편찮으셨고요. 그래서 여성의 뿌리를 찾아가고 싶었어요. 할머니의 희생으로 엄마가 있었고, 엄마의 희생으로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며 살고. 비단 나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동시대를 사는 많은 여성이 우리 어머니들에게 빚을 지고 있잖아요? 다시 말하면, 국악에서 시작된 것들이 이야기로도 엮이고, 그래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서 ‘나는 엄마의 딸’이라는 강력한 아이덴티티로 이어져 뿌리를 파고들게 됐고, 그러다 보면 우리는 하나일 텐데 수직으로 연결될 뿐 아니라 인종이나 성별에 상관없이 결국에는 다 연결되지 않나 싶었죠. 인간과 자연의 연결까지 확장되고 그러면서 ‘무한한 연결’이라는, 어떻게 보면 방대한 테마로 가닿았어요.

여러 가지가 맞물렸군요.

제가 의도해서 어머니나 할머니에 관한 생각을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모든 것이 유기적으로 얽혀서 지금 곡을 쓸 수밖에 없는 환경이 되는 거죠.

그거야말로 정말 곡명처럼 ‘Eight Letters(팔자)’군요.

맞습니다.

앨범은 텍스트가 없다 보니 다 전달되긴 어렵잖아요. 그럼에도 앨범 제목이나 곡 제목만으로도 명확하게 주는 게 있어요. ‘Eight Letters’와 ‘Karma’가 같이 있는 것도 그렇고요.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해요. 녹음할 때 음악이 영적이라는 걸 많이 떠올려요. 개인적으로는 음악이 노트 이상의, 혹은 사운드 이상의 것을 담는다고 여기는데, 이번 앨범 녹음은 그걸 담을 수 있었던 것 같아 개인적으로 만족스럽죠.

달시 제임스 아규(Darcy James Argue, 그래미 후보에도 몇 차례 오른 적 있으며 18인 재즈 앙상블을 이끄는 뉴욕의 재즈 음악가)는 어떻게 함께했나요?

뉴욕은 재즈 작곡가라고 하면 서로 다 알아요. 너무 작은 판이고, 동병상련이죠. 우리는 “한번 네가 이 서클 안에 들어오면 너는 여기 들어온 거다”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하죠. 오래 하신 분에 대한 존경이 있지만 나이에 대한 차별이 없는 편이어서 누구든 환영하는 도시 같아요. 달시도 뉴욕에서 이미 뼈가 굵은 사람이고, 서로 아는 사이라 <Daring Mind>와 <Infinite Connections>를 같이 했어요. 사실 빅밴드에서는 프로듀서의 개념이 달라요. 빅밴드는 제가 작곡가지만 지휘도 해야 하니 녹음 부스에 있어줄 사람이 필요해요. 보통 빅밴드는 그런 역할을 하는 사람을 프로듀서라고 칭해요. 달시를 기억하면 그렇게까지 꼼꼼한 사람이 있을 수 있나 싶어요. 그래서 제가 부스를 믿고 맡길 수 있죠.

한국에서도 이분 덕에 관심이 많았어요. 앰브로스 아킨무시리(Ambrose Akinmusire, 켄드릭 라마 앨범에 참여한 것은 물론 재즈 전설들과 호흡해온 젊은 거장)와 같이한 계기는요?

미국 저작권 관리 협회 중 애스캡(ASCAP)에서 젊은 작곡가를 뽑는 어워드가 있는데, 거기에 심사 위원으로 함께했어요. 그때 저와 앰브로스, 와클리페 고든(Wycliffe Gordon)이 있었어요. 특이한 라인업이죠? 그때 이야기하다 그를 알게 됐어요. 그 뒤로 이메일을 주고받다가 빌리지 뱅가드에서 공연을 봤는데 음악을 넘어서는 영적인 것이 있었어요. 그걸 들으면서 무조건 앰브로스와 해야겠다고 다짐했죠. 그런 걸 앨범에 담고 싶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떠올릴 수 없었어요. 연락했는데 감사하게도 스케줄을 비워주셨죠. 조금 안 믿겼어요. ‘여기 왜 계시지?’ 싶었죠. 그런데 두 곡이나 해주셨어요.

<Daring Mind>가 한국 다른 빅밴드의 것을 들을 때와는 다른 편성 방식을 취하고(빅밴드라고 할 때 떠오르는 일종의 스테레오타입을 벗어났다는 의미), <Infinite Connections>는 좀 더 ‘이렇게도 할 수 있다’는 걸 들려주는, 일종의 비전 같은 걸 제시하는 앨범이었어요. 두 작품이 별개이긴 하지만 같이 얘기해볼까요?

제가 정통을 알고 거기에 뿌리를 둔 사람이었다면, 예를 들어 할머니가 오스카 피터슨을 들었다면 그렇게 못했을 거예요. 못 배운 자의 특권이죠. 틀을 깨야겠다는 게 아니라 그냥 이게 저의 틀인 거죠. 내 머릿속에 있고, 내가 하고 싶은 사운드, 이야기, 구현하고 싶은 음악적 색깔이 있을 뿐이에요. 워낙 늦게 빅밴드를 접했고, 이미 오랜 세월 다른 음악을 들어와서 그런 게 자연스럽지 않았나 싶어요. <Daring Mind> 낼 때는 무명이었으니 돈 내고 음반 만드는 데서 나온, 과감함이라는 생각조차 안 해본 과감함이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걸 좋게 봐주신 것 같아요. 특별하다고 여기신 것 같고요. 그렇게 이번 앨범까지 왔는데, 국악이 좀 더 조심스러웠어요. 성역이 존재하는 것 같았죠. 그저 그런 퓨전 작품 중 하나가 되면 안 됐거든요. 그래서 더 재즈스럽게 가기로 했죠. 매일 밤 수많은 고민과 결정을 거듭하며 만든 앨범을 긍정적으로 들어주시면 작곡가는 힘이 나요. 내 음악이 누군가에게 닿을 수 있는 음악이구나, 주류는 아니라도 닿을 수 있구나.

끝으로 소소한 질문을 할까 합니다. 시상식은 어땠나요?

너무 좋았어요. 음악이 뭐길래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자기 시간을 헌신하고 창작자는 창작자 나름대로, 평론가는 평론가대로, 스태프는 또 스태프대로 대의라면 대의를 위해 각자가 헌신하는 거잖아요. 아름다워요. 나만 혼자가 아니구나. 이렇게 많은 사람이 계속 작품을 위해 고민하고 애쓰고 있다는 걸 느꼈어요. 작은 트로피 하나가 다지만, ‘잘하고 있어’ 위로하는 상징성이 있잖아요. 그 위로로 또 앞으로 갈 수 있기에 감동적이고요.

미국에서 좋은 평가를 많이 받았는데도 한국대중음악상이 의미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고국이잖아요. 모든 게 사라진 후에 나는 엄마의 딸이고, 우리 엄마는 한국에서 나를 낳았고, 결국 나의 정체성은 한국인이기에 오히려 더 값지죠. 한국에서도 누군가가 나를 지켜보고 응원하고 있구나, 내 시간이 헛되지 않았다는 얘기니 당연히 의미가 있습니다.

정말 마지막 질문입니다. 한국에서 최근 들은 작품, 혹은 기억에 남는 음악가는?

그간 같은 후보였던 이선지, 남유선 님은 물론이고, 석다연이나 서수진 님 같은 여성 리더들이 많아져서 좋아요. 처음 한국에서 음악 할 때에 비해 여성 음악가가 늘었어요. 송영주 님도 존경스럽고요. 이수정 님도 멋져요. 여성 리더로서 계속 자신의 앨범을 만들어가는 분들이 고맙고, 저도 새 앨범을 계속 내려고 합니다.

    블럭(음악 칼럼니스트)
    사진
    지혜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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