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드리언 브로디가 받아들인 것
누군가에겐 일생일대의 꿈인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두 번이나 수상한 남자. 애드리언 브로디가 <피아니스트> 이후 22년 만에 역작 <브루탈리스트>로 또다시 오스카 트로피를 쥐었다. 세상은 그의 연기가 최고의 난도였다고 칭송하지만, 그는 위대한 창작자들과 감행한 예술적 도전만으로도 행복했다.

“연기는 아주 위태로운 작업입니다. 커리어적으로 어떤 위치에 있든, 어떤 것을 이루었든 한순간에 다 사라질 수 있음을 기억합니다. 오늘 밤이 더 특별하게 느껴지는 건 제가 그것을 잘 알고 있고, 그런 관점에서 제가 사랑하는 일을 아직까지 하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함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지난 3월 2일 열린 제97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브루탈리스트>(2024)로 남우주연상을 차지한 애드리언 브로디(Adrien Brody)가 가족과 동료의 뜨거운 축복 속에서 무대로 뛰어올랐다. 섬세하게 반짝이는 주얼리 디자이너 엘사 진의 브로치를 가슴에 달고(그는 시상식에서 브로치 스타일링을 즐긴다) 겸허한 자세로 트로피를 받아 든 그는 더 나아가 자신에게 허락된 위치에서 선한 세상을 위해 싸우겠다고 선언했다. “전쟁으로 인한 모든 반향과 트라우마, 끊이지 않는 체계적인 억압과 반유대주의, 인종차별주의, 타자화를 거부합니다. 대신 더 건강하고 행복하며 포용적인 세상을 위해 기도합니다. 우리가 과거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증오를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옳은 일을 위해 싸웁시다. 언제나 웃고, 서로 사랑합시다. 서로를 다시 일으켜 세웁시다.”
바르샤바 게토를 배경으로 한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강렬한 영화 <피아니스트>(2002)로 첫 번째 오스카 남우주연상을 탔을 때, 애드리언 브로디는 겨우 스물아홉 살이었다. 역대 최연소 수상자였으며 그 기록은 여전히 깨지지 않고 있다. 유대계 피아니스트 역할을 준비하면서 브로디는 자신이 살던 뉴욕 아파트를 떠나 친구들과 거리를 두고 생활하며 끼니를 거르면서까지 상실감과 고립감을 이해하려 애썼다. 극단적인 노력으로 역할에 몰입할수록 우울증과 피로감이 몰려왔고, 이 역할을 맡은 후 1년간은 연기를 쉬어야 했다. 그 후 브로디는 숲속 괴물과 공존해 살아가야 하는 마을을 배경으로 한 M. 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영화 <빌리지>(2004)에서 발달장애를 가진 살인범 소년을 연기했는데 주연급은 아니었다.
“에이전트가 대본을 검토하기도 전에 역할을 수락했어요.” 브로디가 특유의 씨익 웃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이트는 누구도 대본을 읽지 않길 바랐어요. 저는 그의 요청을 따랐고요.” 그 후 스파이크 리, 켄 로치, 배리 레빈슨, 스티븐 소더버그, 테렌스 맬릭 같은 감독과 작업하며 브로디는 계속 위대한 예술가들과 일하면서 흥미로운 역할에 도전하고 싶은 마음을 키웠다. “대단한 영웅 같은 역할만 하고 싶었던 게 아닙니다. 창의적인 여정을 꿈꾼 것인데 그게 문제였죠.”
그런 그의 선택 때문일까. 얼핏 보기에 브로디의 커리어는 <피아니스트> 성공 이후 하향세를 타는 듯 보였다. 하지만 그런 시각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브로디는 지금껏 60편 가까운 영화에 출연하며 로커, 복화술사, 투우사, 로마의 장군 등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했다. 그중에는 미국을 대표하는 극작가 아서 밀러와 헝가리계 미국인 마술사 후디니, 우디 앨런 감독의 <미드나잇 인 파리>(2011)에 등장한 살바도르 달리 같은 신비로운 매력의 실존 인물도 더러 있었다. <킹콩>(2005)과 <프레데터스>(2010) 같은 블록버스터 액션 영화 주인공으로도 활약했으며 SF, 스릴러, 공포 장르까지 차근차근 섭렵해나갔다. 웨스 앤더슨 영화의 단골 배우로도 큰 사랑을 받았다. 찬사를 받은 작품도 물론 있었지만 브로디가 출연한 대부분의 영화는 흥행에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그러나 브로디는 언제나 연기에 혼신을 다했다.

그의 생각은 어떨까? 브로디는 쇼 비즈니스계의 현실을 낙천적으로 받아들이는 편이었다. 대화 중 그는 영화 제작의 기묘한 방식과 명성, 홍보 전략과 영화계에 시장성이 작용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폭넓게 의견을 건넸다. 가장 기억나는 대화는 오스카상을 받기 전 배우는 개인의 연기력으로 평가받지만, 수상 이후에는 예술적으로나 상업적으로 영화를 얼마나 잘 만들었는지에 대한 책임까지 지게 된다는 그의 말이었다. 우리가 어느덧 애드리언 브로디의 출연 소식에 그의 연기뿐 아니라 영화 전체를 기대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게 배우의 딜레마죠.” 브로디가 말했다. “하지만 배우의 여정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의적이고, 실험적이고, 때로는 위험해야 한다고 믿어요.”
어느덧 50대에 이른 브로디는 브래디 코베 감독의 기념비적 걸작 <브루탈리스트>에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삶을 재건하려는 헝가리 출신 유대인 건축가 라즐로 토스로 활약했다. <브루탈리스트>는 <피아니스트>와 분명 다른 영화지만, 전후라는 시대적 배경과 주인공의 예술, 상실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속편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브로디에게는 반가운 보상으로 다가왔다. “이런 수준의 작품을 다시 만나기까지 20년이 걸렸으니 감사할 따름이죠.”
내가 브로디를 만난 것은 지난 10월 런던에서였다. 당시 그는 펜실베이니아 사형수로 수감되었다가 결정적인 DNA 증거가 발견되며 22년 만에 석방된 남자를 주인공으로 한 린지 페렌티노의 연극 <더 피어 오브 13>에 출연 중이었다. 10대 이후 처음으로 연극 무대에 오른 브로디에게 뜨거운 호평이 쏟아졌고, 그 역시 매일매일 연기를 재해석하는 자유를 만끽하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연극은 실험적인 작품으로 유명한 250석 규모의 돈마 웨어하우스에서 상연했으며 인터미션 없이 1시간 45분 동안 진행됐다. 브로디는 스크린에서 본 모습 그대로 무대를 장악하며 주인공 닉 야리스의 다채로운 캐릭터를 표현했다. 재치 넘치는 터프한 사내, 철학적인 고민에 휩싸인 수감자, 사랑에 빠진 남자, 학대받은 아이··· 실존 인물인 닉 야리스 역시 공연을 여러 번 관람하며 카타르시스를 느꼈고,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고 브로디는 증언했다. “자신의 삶을 연기한 제 모습을 보면서 고통과 상처를 많이 치유할 수 있었다고 하더군요.”
연극이 끝난 후, 나는 돈마 웨어하우스 사무실에서 브로디와 마주 앉았다. 날렵한 콧날, 팔자 눈썹, 수채화 같은 눈동자를 지닌 그의 얼굴은 새로운 색채로 덧입혀질 순박한 캔버스처럼 느껴졌다. “누구와도 닮지 않은 마스크를 가졌어요.” 웨스 앤더슨이 훗날 내게 음성 메시지로 전한 말이다. “옛날 영화배우 같은 분위기가 풍기죠.” 브로디는 윌렘 대포, 게리 올드만 등과 함께 2012 프라다 F/W 남성복 패션쇼에 섰고, 최근에도 볼 수 있었듯 턱시도에 큼지막한 브로치를 착용한 채 레드 카펫을 밟는 것을 즐기는 화려한 취향의 소유자다. 그러나 우리가 마주한 어느 비 오는 화요일, 몸을 앞으로 기울인 채 유쾌하면서도 다정한 목소리로 때로 소박한 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잇는 브로디는 체크 셔츠와 청바지 차림에 무난한 스니커즈를 신은 편안하고 평범한 모습이었다. 자리에 앉으며 검은색 뉴욕 양키스 모자를 벗은 브로디는 묻기도 전에 안부를 전했다. “요즘 잠을 잘 못 자요. 머릿속에 연극 대사가 계속 맴돌거든요.”
외동아들인 브로디는 뉴욕 퀸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엘리엇 브로디(Elliot Brody)는 공립학교 역사 교사였고, 독학으로 배운 그림 실력은 위대한 거장 못지않았다. (“엄청난 위조 화가가 될 수도 있을 만한 실력이에요.” 브로디는 과거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적 있다.) 어머니 실비아 플라치(Sylvia Plachy)는 유명한 사진가로 서정적인 분위기가 느껴지는 그의 흑백사진은 <빌리지 보이스>와 <뉴요커> 등에 실렸으며 모마(MoMA)에 영구 소장품으로 보관 중이다. 브로디는 천주교와 유대교가 혼재하는 중앙 유럽계 집안의 지적인 분위기에서 자랐다. 어렸을 땐 마술에 빠져 ‘어메이징 애드리언 쇼’를 만들어 선보이기도 했고, 힙합에 심취한 적도 있었다. 그는 라과디아 예술 고등학교에 진학해 순수예술을 공부하고 싶었지만, 마지막 순간에 연극으로 전공을 바꿨다.
“애드리언은 스트리트 문화를 사랑하는 퀸스 출신 아이였어요.” 브로디와 5년 넘게 열애 중인 마르케사의 디자이너 조지나 채프먼(Georgina Chapman)이 맨해튼 웨스트 빌리지에 자리한 자신의 아틀리에에서 건넨 말이다. “동시에 애드리언은 고상한 유럽 취향을 지녔는데 그래서인지 그에게는 언제나 복합적인 아름다움이 느껴지죠.” 브로디 역시 자신의 예술적 선택의 밑바탕이 된 거의 모든 가치를 심어준 것은 전부 부모님이라고 이야기했다. “사진가의 아들로 뉴욕에서 성장하면서 도시의 복잡하면서도 기묘한 아름다움을 느끼며 살 수 있었고, 훌륭한 작가들, 위대한 창작자들과 어울릴 수 있었어요. 무엇보다 부모님께서 제 개성과 창작 활동을 가치 있는 것으로 인정하고 존중해주신 덕분에 스스로를 끝까지 믿을 수 있었고요.”

브로디가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그의 필모그래피는 <디태치먼트>(2011)로 <아메리칸 히스토리 X>(1998)로 이름을 알린 토니 케이 감독의 영화다. 에이전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브로디는 퀸스에 있는 공립학교 기간제 교사 역할을 택했다. 그에게 이 작업은 아버지를 향한 찬가처럼 여겨졌다. “실패한 교육제도에 관한 영화일 뿐이었는데 크게 와닿는 것이 있었어요.” 얼마간의 침묵 끝에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도전을 좋아해요. 조금 위험하고, 다소 깊은 고민도 필요한, 제 한계를 뛰어넘는 일에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이 크죠. 한번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열심히 몰두할 뿐 다른 선택은 하지 않아요. 어떤 역할이든 마찬가지입니다. 늘 같은 수준으로 헌신하고 몰입해요. 벌레를 먹거나 얼음장 같은 강물에 몸을 내던지기도 하면서요. 불편하기 그지없는 교정기를 끼고 지내야 할 때도 있고, 스스로를 고립시킨 채 강박적으로 음식을 멀리하며 숨어 지낼 때도 있죠.” 웨스 앤더슨 감독의 증언 역시 브로디의 말을 뒷받침한다. “애드리언이 모든 역할을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일단 맡기로 하면 그 역할을 완벽하게 해내기 위해 모든 걸 쏟아부어요.”
브로디가 연기하는 캐릭터는 복잡한 내면과 모순으로 점철된 경우가 많다. 인내심이 폭발적인 분노로 이어지고, 미소는 뒤틀리며, 선명하게 움직이는 눈썹은 그 자체로 독백이 되는 식이다. 브로디는 헤어스타일을 바꾸는 것처럼 역할에 따라 목소리, 말투, 말하는 속도, 억양을 자유자재로 뒤바꾼다. 영화를 보면 배우와 그 배우가 연기하는 캐릭터의 어쩔 수 없는 간극이 느껴지는데 브로디는 매번 완벽하게 그 간극을 메운다. 채프먼은 말했다. “그는 감정적으로 정제되지 않은 사람이고, 허세도 부리지 않아요. 쓸데없는 자존심을 앞세우지 않기 때문에 언제나 한결같이 순수한 방식으로 역할에 몰입할 수 있죠.” 브로디는 자신이 내성적이며 관찰자 성향이 강하다는 것을 인정했다. 채프먼이 설명했다. “그는 삶에 스친 모든 것을 소중하게 간직해요.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요. 때로 그건 고통스러운 과정이지만 그는 그 거대한 우주를 내면에 담고 끌고 갈 수 있는 사람이에요.” 물론 그토록 강렬한 집중력을 계속 유지하며 살아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애드리언도 지칠 때가 있죠.” 채프먼이 맞장구쳤다. “에너지를 아주 많이 쏟아내는 작업이잖아요. 애드리언은 아주 예민한 사람이에요. 세상과 감정적으로 가까이 맞닿은 채 살아가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죠.”
10년 전쯤 브로디는 연기를 그만둔 적이 있다. “솔직히 그때는 어떤 소재와 역할도 와닿지 않았어요.” 환멸에 빠진 그가 택한 것은 그림이었다. “그림을 그리면서 연기할 때는 얻지 못한 창의적인 자율성을 찾았어요. 새로운 종류의 성취감을 느꼈죠.” 채프먼은 집의 모든 벽에 브로디가 그린 그림이 걸려 있다고 이야기했다. “애드리언은 그림 그리는 걸 정말 좋아해요. 그릴 때마다 실력이 점점 좋아지죠.” 채프먼과 그의 두 아이, 그의 아픈 어머니, 고양이 네 마리, 당나귀 두 마리, 말 세 마리, 흰 털이 덥수룩한 강아지 지기(Ziggy)가 모두 모여 사는 뉴욕 북부에 자리한 집에는 브로디가 손수 꾸민 창작 스튜디오도 있다.
채프먼과 브로디가 처음 만난 것은 친구 초대로 가게 된 푸에르토리코 여행에서였다. 공교롭게도 둘 다 생일이 4월 14일로 같다. “그래서 여행 첫날 저녁에 공동 생일 파티를 열게 됐죠. 의도치 않게 둘이 같은 프린트 옷을 입었는데 영락없이 커플 룩 같았어요. 그렇게 함께 촛불을 불었죠.” 집에 있을 때 채프먼과 브로디는 하이킹을 하거나 요리를 하는 등 소박한 일상을 보낸다. “하지만 배역에 몰입하면 애드리언은 사무실에 틀어박힌 채 고양이들 틈에서 온종일 대본만 봐요.” 채프먼이 말했다. 게다가 이따금씩 자신만의 창작 스튜디오로 ‘꼭두새벽까지’ 사라진다.
브로디는 커다란 캔버스에 역동적인 그림을 자주 그린다. 때론 풍자 섞인 사회적 메시지를 담기도 한다. 패스트푸드와 폭력적인 문화를 풍자하며 그린 그의 ‘Hot Dogs, Hamburgers, and Handguns’ 연작은 2015년 아트 바젤 마이애미에서 처음으로 대중에 공개됐다. 브로디는 음악도 만든다. “모든 건 다 연결되어 있어요.” 브로디가 자신의 창작 활동에 대해 설명했다. “전부 해석의 콜라주라는 걸 깨달았어요. 연기, 그림, 제가 만드는 음악은 상반되는 다양한 요소가 서로 다른 층위로 하나의 커다란 세계를 이루죠. 때로는 충돌하고, 때로는 서로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면서요.”
드라마에서의 활약은 브로디에게 새로운 커리어에 대한 자신감을 안겨주었다. <피키 블라인더스>에서는 중절모를 쓴 마피아로, <석세션>에서는 약삭빠른 벤처 투자자로, <위닝 타임>에서는 전설적인 농구 코치 팻 라일리로 변신했다. 2021년에는 공동 집필하고 제작한 영화 <클린>으로도 관객을 만났다. 그는 황량하고 황폐한 변두리 마을에서 속죄하듯 살아가는 쓰레기 청소부 ‘클린’으로 등장한다. 그뿐 아니라 그는 영화 OST를 직접 작곡했으며 음향 디자인 작업에도 참여했다. “유리 깨지는 소리, 웃음소리, 사내의 기침 소리와 사이렌 등에도 제 손길이 묻어 있죠.” 그는 이렇듯 영화의 전 과정에 참여하기를 즐긴다. “정신없었지만 보람 있고 멋진 작업이었어요.” 그가 손뼉을 마주치며 말을 이었다. “스케치를 하고 있던 그림이 어느 순간 유화 작품으로 완성되는 느낌이랄까요.”
브로디는 <브루탈리스트>에서 라즐로 토스 역할로 자신의 삶과 연기 경험, 끈기를 모두 반영해 연기의 절정을 선보였다. 과거 <피아니스트>를 준비하며 홀로코스트 생존자들과 인터뷰한 경험 덕분에 역할에 대해서도 풍성하게 해석할 수 있었다. 실제로 브로디의 모친은 1956년 헝가리 혁명 당시 소련의 탄압을 피해 가족과 도망친 경험이 있다. 그런 삶은 분명 <브루탈리스트> 속 토스의 이민 이야기와 맞닿아 있다. 브래디 코베를 처음 만났을 때 브로디는 남다른 집요함을 지닌 감독을 만났음을 직감했다고 털어놓았다. 코베는 말했다. “영화 내용과 배우, 캐릭터 모두가 완벽하게 잘 맞아떨어져서 모든 상황이 자연스럽게 느껴졌어요.”
연기 경험이 있는 코베 감독은 2015년 베니스영화제에서 첫 영화 <더 차일드후드 오브 어 리더>(2015)로 감독상을 받았고, 나탈리 포트만이 트라우마를 가진 팝 스타를 연기한 <복스 룩스>(2018)를 통해 명성과 감정적 세뇌, 그리고 그 대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보여주며 인디 영화계의 존경을 받았다. “브래디 같은 사람을 만나는 일은 드물어요. 그는 아주 매력적이고 자신의 예술에 시대를 잘 반영할 뿐 아니라 독립 영화의 수준을 끌어올렸죠.” 브로디의 말이다.
코베는 <브루탈리스트>를 1950년대 이후에는 잘 쓰이지 않는 와이드스크린용 비스타비전 포맷으로 촬영했다. 상영 시간은 인터미션을 포함해 3시간이 훌쩍 넘는다. “영화라는 매체가 지닌 가능성을 끝까지 밀어붙이고 싶어요.” 코베는 선포했다. 그는 아내이자 각본가인 모나 파스트볼드와 함께 대본을 썼다(코베는 자신이 좋아하고 존경하는 사람들하고만 일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코베는 브로디뿐 아니라 펠리시티 존스, 가이 피어스, 조 알윈 등 모든 배우가 팬데믹으로 인한 제작 지연 상황에도 헌신적으로 촬영에 임했다고 터놓았다. 브로디의 적극적인 참여는 영화에 특히 중요한 기여를 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애드리언 없이는 이 영화를 만들지 못했을 거예요.” 코베는 말했다.
<브루탈리스트>는 웅장하지만 교묘하고 정교하게 감정에 파동을 일으키는 영화다. 여기에는 아마존 정글 한가운데 오페라 하우스를 짓기 위해 분투하는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피츠카랄도>(1982)가 떠오르는 예술적인 끈기와 보편적 이민 서사, 자본주의에 대한 강한 비판이 모두 담겨 있다. 브로디가 연기한 라즐로 토스 역시 브로디만큼 복잡한 인격체다. 고집이 세고 속내를 드러내지 않으며 마약중독자다. 전쟁의 폐허로 고통받으며 아메리칸드림이 약속한 미래로부터의 배신에 신음하며 살아간다. 브로디는 변화무쌍한 연기로 이 모든 요소를 매혹적으로 그려냈다.
펠리시티 존스가 연기한 토스의 아내 에르제벳은 전쟁 때문에 휠체어 신세를 지게 됐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만은 절대 꺾이지 않는 강인한 인물이다. 배우들은 헝가리어로 연기를 해야 했는데, 존스는 그 경험이 “한 손으로는 머리를 두드리고 다른 손으로는 배를 문지르는 것 같았다”고 표현했다. “영화를 촬영하는 동안 우리는 단 한 순간도 캐릭터에서 빠져나오지 않았어요. 역할에 완전히 몰입한 채 촬영하는 내내 그 인물이 되어 살아갔죠.” 존스의 말이다.
1,000만 달러가 채 안 되는 빠듯한 예산 때문에 영화 속 펜실베이니아의 시골 풍경은 부다페스트에서 촬영했다. 브로디의 모친 실비아 플라치는 종종 촬영장을 방문해 사진을 찍으면서 과거의 향수에 젖곤 했다. “애드리언과 저는 알게 모르게 실비아를 뿌듯하게 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끼며 촬영했는지도 모르겠어요.” 코베가 말했다. 브로디에게도 이번 작품은 모친과 조부모의 희생을 기리는 작업처럼 느껴졌다. “제가 태어나기 전 우리 가족이 미국으로 이주한 것과 제 조상의 모든 투쟁과 상실 덕분에 지금의 제가 많은 기회를 얻었으니까요. 그러니 이걸 당연하게 여길 수 없죠.”
<브루탈리스트>는 지난 9월 베니스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된 후 올해 골든글로브 시상식 작품상과 남우주연상, 감독상,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 감독상, 남우주연상, 촬영상, 음악상,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주연상, 촬영상, 음악상을 연달아 수상하며 계속 호평받고 있다. 채프먼은 커다란 스크린에서 <브루탈리스트>를 처음으로 감상한 베니스영화제를 여전히 잊지 못한다. 브로디는 편집하기 전에 영화를 봤지만, 채프먼은 처음이었다. “어쨌든 애드리언과 저는 둘 다 크게 감명받았어요. 솔직히 아무 말도 못하겠더라고요.” 채프먼이 회상했다. <브루탈리스트>는 기립박수를 받았고, 코베는 은사자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코베와 브로디는 수상의 기쁨보다 자신들이 목표한 것을 이뤘다는 안도감을 더 크게 느꼈다고 고백한다. “다른 사람들 의견에 크게 영향받지 않는 편이라서요. 앞으로도 대중이 모두 공감할 만한 영화만 만들진 않을 겁니다.” 코베의 말이다.
자신만의 예술적 여정에서 도전을 거듭해온 브로디는 어느 순간 영화배우로서 거둔 성공이 상업적인 성공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그 후 그는 어떤 순간에도 우아하게 평정심을 유지하게 되었다. 영국의 유서 깊은 극장에서 그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던 당시 브로디는 계속 이어질 수상 세례를 앞두고도 전혀 들떠 보이지 않았다. 저녁 공연 준비를 위해 몸을 일으키면서 내게 다음과 같이 얘기했을 뿐이다. “이미 겪어봤잖아요. 운이 좋으면 좋아하는 것을 찾아서 그 안에서 배우고 성장하고 성공까지 할 수 있겠죠. 앞으로 좋은 역할을 만날 수 있을지 걱정하진 않아요. 일은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으니까요. 저는 창의성을 표출할 무언가를 찾기 위해 노력할 겁니다. 그것만으로도 많은 위안이 되죠. 그런 다음 나머지는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받아들일 거예요.”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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