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사서 실리를 취하는 ‘협상의 기술’
<협상의 기술>(JTBC)은 전설의 협상가로 불리는 대기업 M&A 전문가와 그 팀의 활약상을 담았다. <아내의 자격>, <하얀거탑>, <풍문으로 들었소>, <밀회>, <졸업> 등 굵직한 히트작을 남긴 안판석 감독의 신작이다. 시청률은 3%대로 출발했다가 6회 차에 8%를 기록했다. 좋은 성적이지만 기존 안판석 감독의 팬들이라면 어리둥절한 면도 있을 테다.

작품은 산인그룹이 주거래은행으로부터 대출 만기 연장 거부 통보를 받으면서 시작된다. 다음 만기까지 11조원을 조달하지 못하면 그룹이 부도 난다. 주가가 4주 연속 일정 수준을 밑돌아도 경영권이 위태로워지니, 잡음 없이 돈을 끌어와야 한다. 송재식 회장(성동일)의 오른팔 이동준 상무(오만석)는 M&A 전문가 윤주노(이제훈)를 불러들인다.
회사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는데 제 살 길만 궁리하는 산인그룹 이사회 풍경은 안판석 감독의 드라마에서 흔히 보던 치졸한 상류층의 모습 그대로다. 그런데 이번에는 신경을 긁는 불길한 음악이 수시로 돌출되면서 매 장면 긴박감과 스릴이 감돈다. 이 긴장감은 그러나 다분히 과장된 것이다.
주인공 윤주노의 등장은 화려하다. 그는 ‘백 번 생각한다’는 뜻의 ‘백사’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그에게는 여러 나쁜 소문이 따르지만 실력만은 누구나 인정하는 눈치다. 그룹 후계를 노리는 하태수 전무(장현성)는 윤주노를 찍어내지 못해 안달이다. 그런데 이제훈은 ‘전설의 협상가’라기엔 너무 젊어 보인다. 그의 화려한 백금발 머리는 매달 뿌리 염색을 하는 건지 고생의 흔적인지 알 수 없지만 이 캐릭터를 장르물의 캐리커처처럼 보이게 한다. 과연 <협상의 기술>은 감독 특유의 섬세한 심리극보다는 트렌디한 오피스물에 가깝다.
윤주노는 M&A 전문 변호사 오순영(김대명), 탁월한 암산 능력을 지닌 기업 회계 전문가 곽민정(안현호), 주식 투자 실력자인 인턴 최진수(최강윤)와 팀을 이뤄 산인그룹 살리기에 돌입한다. 그들이 큰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산인의 핵심 사업인 건설을 팔고, 플랫폼 사업에 진출하기 위해 게임업체를 인수하고, 주가 부양을 위해 자전거 회사를 상장시키는 과정은 스테이지 클리어형 게임처럼 전개된다. 매번 다른 사업체의 내부를 들여다보는 재미가 있고, 소소한 반전과 통쾌함이 있다. 기업 M&A의 디테일을 강조해서 개성을 확보하는 대신 쉽고 대중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냈다. 다만 연출의 비장함과 스토리의 가벼움 사이에서 종종 불균형이 발생한다는 점은 아쉽다.


윤주노의 주된 ‘협상의 기술’은 휴머니즘이다. 그에게는 돈이든 자존심이든 상대의 필요를 간파해서 유연하게 대응하고,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 제안의 순서와 정보량을 조절하는 등의 혜안도 있다. 하지만 매 에피소드의 하이라이트는 ‘감성’에 맞춰진다. 건설 회사를 팔 때는 빈민촌 노파의 원한을 풀어줌으로써 표류 중이던 재개발 사업을 성사시켜 웃돈을 받아낸다. 게임 회사를 살 때는 우연히 알아낸 개발자의 첫사랑 실패담을 이용한다. 자전거 회사 상장 에피소드에서는 일본 장인의 유치한 몽니를 꺾기 위해 그의 추억을 자극한다. 매번 비이성적이고 순진한 인물들이 사건 해결의 열쇠가 되고, 주인공은 그들을 감화하는 데 공을 들인다. 냉혹한 기업 M&A 세계에서 자주 벌어질 법한 패턴은 아니다. 동료의 실적을 훔쳐서 대박을 친 벤처기업가가 변호사의 협박 한 번에 꼬리를 내리고 100억원을 합의금으로 내놓는 에피소드 역시 너무 쉽고 급해서 미심쩍다.
따뜻한 에피소드에 비해 이 드라마가 산인그룹을 보는 시선은 건전하지 않다. 산인그룹의 부실은 회장의 무능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건설로 시작해 물류, 패션, 레저, 심지어 자전거 회사까지, 온갖 분야로 기업을 확장했다. 소비재 사업을 다수 진행함에도 회장의 고집으로 온라인 전환에 실기했다. 그래서 건설 말고는 제대로 돈을 버는 사업체가 없다. 그런데도 회장의 카리스마가 강력해서 임원들은 정치와 아부에만 급급하다. 한국형 ‘오너 리스크’의 표본이다. 윤주노는 할 말은 하는 사람처럼 그려지지만 실상은 경영자의 실책을 수습하는 데 충실하다. 사업성이 의심스러운 자회사를 쪼개기 상장하고 언론 플레이로 모회사 주가를 부양하는 행태가 주인공의 성취로 그려지고, 그 과정에서 주인공의 인간미가 강조되기도 한다. 한국 주식시장에서 뒤통수 좀 맞아본 투자자들은 이 착한 드라마가 별로 착하지 않게 느껴질 것이다. 물론 이 판단은 윤주노의 복심이 무엇인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윤주노는 과거 M&A 대상 기업의 주식을 친형 이름으로 미리 사들였다는 의혹을 받은 적이 있다. 미공개 정보를 이용한 내부자 주식 거래는 불법이다. 수사를 받다가 형이 자살했다. 그 사건에는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던 듯하다. 송 회장과 오 상무는 그룹을 살리기 위해 윤주노를 불러들이면서도 “복수 때문에 돌아온 건가” 묻는다. 윤주노는 아니라고 답하지만 아직은 그의 본심을 알 수 없다. 비장한 연출이 멋진 파국을 위한 전조였기를 바란다.
<협상의 기술>은 총 12부작으로, 토·일 오후 10시 30분 JTBC에서 방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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