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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부’, 전혀 아름답지 않아서 멋스러운 스승과 제자의 서사

2025.03.28

‘승부’, 전혀 아름답지 않아서 멋스러운 스승과 제자의 서사

무협의 세계에서 제자가 스승을 넘어서는 순간은 모두가 고대하는 국면이다. 제자는 꿈꾸고 스승은 기다리고 독자는 기대한다. 바로 그때 주인공의 능력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독자가 따라온 서사에서 새로운 세대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또 비로소 스승은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수 있다. 패배한 스승이라면 마땅히 보여야 할 태도가 있다. 이제 자신의 시대가 끝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동시에 자신이 지켜온 사명을 받아줄 후계자가 탄생했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것이다. 언뜻 보기에 영화 <승부> 또한 그런 서사에 가깝게 느껴진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제자가 스승을 꺾는 순간, 감동 대신 ‘현타’가 찾아온다. 제자에게 일격을 당한 스승은 도저히 이 상황을 겸허히 받아들일 수 없고, 그럴 생각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 ‘승부’ 스틸 컷
영화 ‘승부’ 스틸 컷

<승부>는 바둑의 황제와 천재가 같은 하늘 아래 있던 시절의 이야기다. 조훈현 9단과 이창호 9단의 관계성은 그 시절의 나처럼 바둑에 대해 아는 게 없던 사람에게도 재미있는 화젯거리였다. 스승은 어린 제자를 집에서 먹이고 재우며 키웠다. 그러던 어느 날 제자의 기량이 스승을 뛰어넘었다. 그것도 한참. 제자는 한두 번도 아니고 연이어 스승을 무너뜨렸다. 그런데도 스승과 제자는 대회가 끝난 후 같은 집으로 들어가 함께 밥을 먹었고, 각각 1층과 2층에서 그날의 대국을 복기했다. 세상은 조훈현 9단이 자기 집 2층에 호랑이를 키우고 있다며 조롱했다. 그렇게 무너진 스승은 잠시 방황하지만, 결국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한다. 자신의 시대가 끝났다는 걸 받아들인 게 아니다. 제자가 자신보다 우위에 있다는 걸 인정한 것이다. 그렇게 인정해야 제자에게 도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 <승부>는 당시 두 사람이 겪었을 내면의 갈등을 상상한다. 키우던 제자에게 물어뜯긴 스승의 마음은 어땠을까. 스승에게 칼을 꽂은 제자는 또 어떤 현실을 마주했을까.

영화 ‘승부’ 스틸 컷
영화 ‘승부’ 스틸 컷

<승부>의 상상은 전혀 아름답지 않아서 흥미롭다. 겸허할 수 없는 스승의 마음은 언뜻 속 좁게 보인다. 그런 스승을 상대로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제자의 태도는 잔인하게 느껴진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그런 태도가 바로 ‘프로’의 숙명이고 스승이 항상 강조하던 것이며 제자가 받들어온 가치다. 영화 속 조훈현의 가르침은 오로지 승부를 향해 있다. “이길 수 있을 때 확실히 밟아야 한다.” “체력이 부족하면 조급해진다.” “상대에게는 최선을 다하는 계 예의다.” “생각과 감정을 드러내지 마라.” “평정심을 잃지 마라.” 또 이창호의 바둑은 그런 가르침을 모조리 흡수한 형태로 나타난다. 상대가 스승이어도 최선을 다하는 게 예의인 이상,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제자가 처음부터 스승을 이길 수 있는 바둑을 연구했다는 설정 또한 마찬가지다. 화려하고 공격적인 조훈현의 바둑을 이기기 위해 이창호는 참을 수 있을 때까지 참다가 결국 이기는 바둑을 완성해낸다. 이렇듯 <승부>는 조훈현과 이창호의 관계성이 지닌 2개의 차원을 오간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일 때 스승의 은혜는 하늘과 같지만, 대결 구도에서는 서로를 이길 수 있을 때 확실히 밟아야 한다는 것 말이다. 영화 속 이창호는 아버지에게 말한다. “선생님께는 죄송하지만, 그래도 지고 싶지는 않아요.” 이들의 관계성은 무협지 속 스승과 제자의 관계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영화 ‘승부’ 스틸 컷
영화 ‘승부’ 스틸 컷
영화 ‘승부’ 스틸 컷

그럼에도 이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조훈현의 서사일 수밖에 없다.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국에서 대부분의 지구인이 이세돌을 응원했던 것과 같다. 조훈현에게 이창호는 제자인 동시에 어디서도 만나본 적 없는 대상이다. 그런 대상에게 무너진 후, 다시 도전하려는 입장이 더 영화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 영화는 그런 입장을 연기하는 배우 이병헌의 진가를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조훈현이 처음으로 무너진 대국에서 이창호가 묘수를 찾아 바둑돌을 놓는 순간, 미세하게 경련하는 조훈현의 표정은 그 자체로 영화적인 순간이다. 당황했지만 당황했다는 사실을 내보이면 안 되는 상황의 표정. 인간이 실제 그런 상황에서 어떤 표정을 짓는지 알 수 없지만, 이병헌의 표정은 그걸 짐작하게 만든다. 무엇보다 제자에게 져서 울먹이고 자괴감에 신경질을 부리는 조훈현의 모습을 표현한 이병헌의 연기를 보는 것도 이 영화의 묘미다. 개인적으로는 바둑을 배우지 않은 게 처음 후회됐다. 바둑을 알았다면, 그래서 이창호의 그 묘수에 담긴 가치를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면, 이병헌의 표정에 담긴 감정도 더 강렬하게 공감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사진
영화 '승부'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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