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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곤하면 절대 다정한 사람이 될 수 없으니까

2025.03.28

피곤하면 절대 다정한 사람이 될 수 없으니까

다정한 어른을 바랐지만 기분에 휘둘리는 금쪽이가 되어간다. 내 던전이 옆자리 후배와 고향의 엄마에게 전이된 순간들에 사과하며.

‘휴먼 그린 휴’, Oil on canvas, 90×72.7cm, 2023

“너처럼 소주를 잘 마시고 싶어.” 호프집에서 동료가 젓가락질을 멈추더니 고백하듯 말했다. 당시 우리는 사회생활도 처음, 잡지 일도 처음이었다. 어리둥절한 상태로 출근해 선배들 치다꺼리에 정신을 못 차리다 퇴근했다. 낙은 젊은 체력을 밑천 삼아 야근 후 한잔하는 것. 당시만 해도 간이 싱싱해 소주잔을 가볍게 털었는데, 동료에겐 내가 ‘캬~’ 의성어와 함께 스트레스를 날려버리는 듯 보였나 보다. 나는 마인드 컨트롤을 조언했다. “네가 ‘아무리 써봐라, 내 인생보다 쓰나’라고 생각하면 소주가 달 거야.” 간혹 주점에 써 있던 전설의 문구 ‘겨울아, 아무리 네가 추워봐라, 내가 옷 사 입나, 술 사 먹지’를 패러디해 말한 것이다. 친구는 그래도 쓰다면서 그냥 담배를 배웠다. 전우애와 술자리로 나름 즐겁게 그 시절을 보낸다고 여겼는데 1년 못 가 상반신에 마비가 왔다. 당시 난 번아웃까지는 아니어도 바싹하게 타기 시작한 ‘토스트아웃’ 상태였는데 모른 체했던 거다.

그래도 그 시절이 아름다웠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내 기분을 소주잔에 털어 넣고 그 독을 다시 내 몸에 넣었지, 타인에게 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후 몇 번의 토스트아웃을 거치면서 나는 기분을 태도에 담아내는 사람이 됐다. 나 같은 사람이 많은지 2020년 출간된 베스트셀러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게>가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으려면>, <기분이 태도가 되지 말자> 식으로 제목을 바꿔가며 재출간됐다. 나도 사서 읽어보았는데, 결국 스트레스 관리 잘하라는 권고다. 뜻대로 될 리 없다.

17년이 흐른 2024년 겨울. 사회에 큰일이 결정되는 날이었다. 주말에 출근한 나는 일은 건성으로 하고 유튜브 생중계로 뉴스를 보고 있었다. 드디어 원하는 결과가 나오고, 나도 모르게 “아!” 탄성을 내질렀다. 조용하던 사무실에서 후배가 “무슨 일 있으세요?”라고 물었다. 며칠 내내 뉴스를 보며 심한 스트레스 상태였기에 그 한마디는 ‘발작 버튼’을 눌렀다. 주말에 출근한 것도 짜증 나는데, 지금 뭐라고? 대한민국 국민 맞니? 대충 그런 뉘앙스의 표정이었다. 후회한다. 내가 무슨 열사라고 그렇게까지 반응했을까. 후배는 자기 방식대로 시국을 염려하고 있을 텐데.

갈수록 나는 다정하기는커녕, 그렇게 싫어하던 기분에 휘둘리는 선배가 되어가고 있다. 김애란의 소설집 <비행운>에 이런 문구가 있다. “그동안 나는 뭐가 변했을까. 그저 좀 씀씀이가 커지고, 사람을 믿지 못하고, 물건 보는 눈만 높아진, 시시한 어른이 돼버린 건 아닌가 불안하기도 하고요.” 여기에 더해서 타인에게 기분을 전가하는 최악의 어른까지 돼버렸다. 그 상대는 주로 약자였다. 엄마, 남자 친구, 후배, 이해관계 없는 타인.

이런 지옥을 사는 사람이 많을지 모른다. 나의 출근길 2호선 환승역엔 많은 인파가 탑승한다. 덜 말려서 축축한 머리에 모피 코트를 입은 나는 그날도 대열에 합류했다. (모피 코트는 내가 철없던 시절 샀으며, 다시는 구입하지 않을 것이다.) 문 앞까지 사람이 꽉 차 있지만 슬프게도 밀수록 밀려 자리가 생긴다. 그렇게 사람들에 겹쳐져 눈을 감고 있는데 뒤에서 뭔가 찔렀다. 서로의 냄새가 넘나들고 입김이 스쳐가고 허벅지부터 등까지 밀착된 객차지만, 참을 수 없을 만큼 분명한 감각이라 고개를 돌렸다. 한 여자가 우산으로 내 등을 밀고 있었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내가 찡그리자 그녀는 더 힘줘 우산을 밀었다. “뭐 하는 거냐고요!”라고 몸을 홱 돌리자 그녀는 표정이 탈색된 얼굴로 “저리 가”라고 답했다. 내 젖은 머리 때문일까, 모피 코트의 털이 날렸나. 내 탓을 아주 잠깐 하다가 그래도 이건 아니지 하고 언성을 높였다. 그때부터 지하철 빌런은 더 이상 그녀 혼자가 아니었다. 같이 싸운 나도 빌런이긴 마찬가지. 지금도 등 뒤에 꽂히던 우산 끝의 감각이 생생하다. 서로를 지옥으로 끌어당기던 슬프고도 참담한 기분이 촉각으로 남았다. 그녀와 난 어떤 삶을 살고 있길래, 그 지하철에서 터져버리고 말았나.

우린 숨 쉴 듯이 들어오는 미세 스트레스에 잠식되어가고 있다. 개인사가 없어도, 재난이 없어도 말이다. 챗GPT를 이용할 때마다 ‘내 자리는 이제 없어지겠구나’ 두렵고, 트럼프가 관세를 저렇게 매기면 결국 우리 경제는 어떻게 되고 그럼 내 아파트는? 결혼을 못했는데 아이 없이 늙으면 어쩌지? 누가 날 병원에 데려가지? 나날이 걱정이고 불안이다.

전문가들은 1차 스트레스는 어쩔 수 없고 2차 스트레스로 확산되지 않도록 막아야 한다고 말한다. AI 때문에 기자를 그만두게 될까란 1차 스트레스에서, ‘그러니까 진즉에 기술을 배웠어야지, 게을러서 어디 쓰겠니’란 자학의 2차 스트레스로 이어진다. 불안에 잠식된 나는 이것저것 건드린다. 새벽 4시 미라클 모닝을 하고, 전화 영어를 신청하고, 요가를 하고, 빌 게이츠처럼 필기하며 책 읽는 습관을 들이려고 하고, 팟캐스트는 개그보다 경제나 시사 위주로 듣는다. 그런 내게 남자 친구가 말했다. “참 피곤하게 산다.” 그렇다고 뭐 하나 죽을 듯이 하진 않는다. 그저 뭔가 하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동시에 피곤해한다. 저녁이 되면 나가떨어진다. ‘빨리 저녁 루틴도 만들어야 하는데’ 싶지만 쇼츠를 넘긴다. 자책감이 들면서 에너지가 2차로 고갈되고, 다시 더 강한 마인드 컨트롤로 무장했다가 실패하고 다시 자책하고. 이런 지속적인 에너지 고갈 상태인 나는 누구든 건들면 폭발할 준비가 되어 있다. ‘자아 고갈’이란 말이 있다. 의지력은 소모되는 자원이라는 것. 불안해서 나를 안달복달 볶으면 타인의 신호를 참아낼 의지력은 희미해진다. 우산으로 찌른 그녀를 오히려 가여이 여기기란 어렵다.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상대의 말 한마디에 불쾌감을 발동시킨 어제와 그제와 오늘.

불안을 흘려보내고 나를 좀 내버려두고 싶지만, 그렇게 살다가 안전망 없는 이 사회에서 추락할 거 같다. 하지만 스트레스로, 불안감으로 고갈된 내 에너지 때문에 타인에게, 적어도 이 사무실에서 인간 실격을 당하게 생겼다. 그래서 내린 결론, 불안감은 어쩔 수 없다 쳐도, 체력이라도 사수하자. 피곤하면 절대 다정한 선배가 될 수 없으니까. 이타적인 마음도 건강해야 나온다는 연구 결과가 많다. 그래서 기부금은 맑고 쾌청한 날에 걷으라고. 주말에 울리는 일 카톡에 험한 말을 중얼거리지 않으려면 체력 관리가 필요하다. 이제 마음 챙김을 넘어 양쪽 챙김이라며 꽤 비싼 프로바이오틱스를 구입했다. 장 건강이 뇌와 마음에 영향을 미친다는 유튜브를 봤기 때문이다. 그런데 혹시 이것도 강박이자 미세 스트레스? 적어도 내 기분이 태도를 결정하면 너무 후지다는 인식은 하고 있으니 다행이다. 그걸 모르는 사람들, 우리 모두 알잖아요? (VK)

피처 디렉터
김나랑
아티스트
이샛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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