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공간의 잔향

2025.04.12

공간의 잔향

누군가의 집을 처음 방문하던 순간을 기억하는가. 약간의 어색함과 설렘, 현관문을 열고 발을 내딛는 찰나 마주하는 공기의 온도와 옅은 향, 그리고 시선을 돌릴 때마다 앞에 연신 펼쳐지는 실내 공간의 이미지 같은 것들 말이다. 친구, 연인, 혹은 잘 모르는 누군가가 잠을 자고, 밥을 먹고, 휴식을 취하고, 일을 하는 시간은 그 사람의 생활 습관과 무의식적인 동선이 되어 인테리어 전반에 스며든다. 가구의 형태와 배치, 카펫의 패턴과 두께 같은 요소 말이다. 이처럼 집이라는 공간은 때때로 타인이 잠시 머무는 것만으로도 그곳에서 생활하는 인물의 가장 깊은 내면을 가감 없이 파악할 수 있도록 해준다.

새로운 봄을 맞이해, 메가 쇼가 줄지어 열리는 첼시의 티나킴 갤러리는 21번가의 전시장을 누군가의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2020년 타계한 가구 디자이너이자 빈티지 20(Vintage 20) 창립자, 그리고 티나킴의 파트너였던 정재웅(Jae Chung)의 공간이다. 이번 전시는 뉴욕의 건축·디자인 스튜디오 찰랩 하이먼 & 에레로(Charlap Hyman & Herrero) 창립자이자 파트너인 애덤 찰랩 하이먼(Adam Charlap Hyman)이 기획했다. 그는 갤러리스트의 맨해튼 타운하우스를 디자인한 것을 비롯해, 티나킴 갤러리와 긴밀한 관계를 이어왔다. 이번 전시에서 그는 객원 큐레이터로 참여해 빈티지 20의 컬렉션에서 오브제들을 엄선하고, 정재웅의 시그니처 미감에 경의를 표한다.

찰랩 하이먼은 조지 나카시마(George Nakashima),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 세르주 무이(Serge Mouille) 등 빈티지 20 프로그램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미드센추리 디자이너들의 다양한 작품을 포함해, 이들을 미술과 병치해 소개하려 했던 정재웅의 기획 방식과 미학을 전시라는 형식으로 재구성한다. 전시와 더불어 출간된, 닉 허먼(Nick Herman)이 편집자로 참여한 책 <Design for Living>에는 2005년부터 2019년까지 이들이 개최한 전시가 기록되어 있다.

다시 전시장으로 눈을 돌리면, 리셉션을 지나 1950년대 프랑스 디자이너 로제 페로(Roger Feraud)가 제작한 높은음자리표 형태의 철제 옷걸이에 비스듬히 걸린 검은 중절모에서부터 공간이 시작된다. 이어 장 프루베(Jean Prouvé)의 레드·베이지·브릭·살몬 컬러 의자들을 따라 시선을 옮기면, 거실을 연상시키는 첫 번째 장면에 다다른다.

낮고 넓은 좌대에는 1920년대 네덜란드 아르데코 양식의 붉은 러그가 깔려 있다. 장 프루베가 프랑스 낭시의 대학 기숙사를 위해 60여 점만 제작한, 견고하고 경제적인 ‘독서용’ 암체어와 1952년 가구 디자이너 샤를로트 페리앙(Charlotte Perriand)과 협업해 만든 튀니지 콘솔이 함께 놓였다. 이 콘솔은 파리국제대학촌 내 튀니지관의 방 창문 아래에 놓도록 설계한 것이다. 간결한 선, 실용성, 형태와 기능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추구한 이들의 모더니즘 철학을 구현한 이 가구들은 빈티지 20이 추구해온 디자인의 미학을 대변한다.

하지만 이 장면을 완성하는 것은 가구나 인테리어 요소만이 아니다. 함께 배치된 미술 작품들은 단순한 장식을 넘어, 공간의 다양한 요소와 소리 없는 대화를 나누며 장면에 생동감을 부여한다. 예컨대, 콘솔 위에 걸린 알렉산더 콜더(Alexander Calder)의 1955년 유화 ‘Black Crescent Moon’과 같은 해 제작된 스탠딩 모빌 ‘Franji Pani’는 가구만큼이나 강한 시각적 존재감을 드러낸다. 콘솔에 놓인 지름 20cm 남짓한 루이즈 부르주아(Louise Bourgeois)의 청동 조각 또한 크기와는 사뭇 다른 응축된 밀도를 품고 있다.

찰랩 하이먼의 정교한 공간 구성은 관람자의 움직임을 따라 전시장을 집 안에서 마주할 법한 장면의 연속으로 풀어낸다. 첫 번째 장면을 지나 전시장 중앙의 가벽을 돌아 들어가면, 한층 더 친밀한 환대의 분위기가 펼쳐진다. 특히 다이닝 룸을 연상시키는 르 코르뷔지에와 피에르 자네레(Pierre Jeanneret)의 합작품 ‘Committee Table/Boomerang Table'(1961)은 피에르 자네레가 제작한 부드러운 마감의 플로팅 백 체어와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이 여백에는 제인 양 다엔(Jane Yang D’Haene)이 달항아리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스톤웨어와 프랑수아 그자비에 랄란(François-Xavier Lalanne)의 어린 양이 머물며, 실내 공간의 재현에 몽환적인 레이어를 입힌다.

무엇보다 그의 서재에 실제로 놓여 있던 오브제들로 재구성한 섹션에서는 정재웅의 취향과 흔적이 그대로 묻어난다. 특히 장 프루베의 콩고 테이블은 1940년대 초 프로토타입을 바탕으로, 1950년대 초 아프리카 전역을 자주 여행하던 에어프랑스 직원들을 위해 콩고의 특정 건물에 배치한 모델이다. 이처럼 모델마다 조금씩 다른 재료와 제작 방식은 가구에 깃든 이야기나 다름없다. 이 테이블과 나란히 놓인 데이미언 허스트(Damien Hirst)와 앤디 워홀(Andy Warhol)의 강렬하면서도 어딘가 유머러스한 이미지들은 그러한 이야기에 공간만의 짙은 잔향을 더해 고유의 분위기를 완성한다.

정하영(독립 큐레이터)
사진
티나킴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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