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와엘 샤키의 세상에서 유목과 도시,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이 만날 때

2025.04.12

와엘 샤키의 세상에서 유목과 도시,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이 만날 때

지난해 제60회 베니스 비엔날레 국제미술전에서 단연 기억에 남는 전시 중 하나는 이집트관 전시였습니다.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작가 와엘 샤키(Wael Shawky)가 대표 작가로 참여한 이집트관에서는 이집트가 유럽 제국의 폭압에 맞서 일으킨 우라비 민족주의 혁명(1879~1882)을 다룬 뮤지컬을 영화로 연출한 <드라마 1882(Drama 1882)>가 펼쳐졌죠. 와엘 샤키는 우리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고, 어쩌면 들어본 적도 없었을 그들만의 역사를 통해 전쟁의 무익함과 폐해 등을 흥미로운 뮤지컬로 보여주었습니다. 아날로그적인 무대 배경, 퍼포머, 그리고 음악이 삼위일체를 이룬 작품은 그들의 역사와 우리 역사의 경계와 간극을 뛰어넘어 매우 보편적인 공감대를 형성했습니다. 실제 혁명을 둘러싸고 벌어진 갖은 사건 사이사이 엿보이는 작가만의 유머 감각과 유쾌함이 역사의 육중한 무게를 덜어내며 우리 일상에 안착할 수 있도록 한 겁니다.

와엘 샤키, ‘알 아크사 공원’, 스틸 이미지, 2006, 비디오 애니메이션, 10분.

4월 27일까지 삼청동 바라캇 컨템포러리에서 펼쳐지는 그의 개인전 <와엘 샤키: 텔레마치와 다른 이야기들>은 2024년에 베니스에서 만난 작가의 종합예술적 작업이 어떤 궤적을 거쳐 탄생했는지 짐작하게 합니다. 2000년대 작품, 즉 5편의 영상 작품은 서구 혹은 주류의 관점으로 서술되고 고착된 역사를 다시 조명하고자 한 작가의 꾸준한 시도를 증언합니다. 갤러리 문을 열고 들어설 때 <알 아크사 공원>(2006)을 맨 먼저 만나도록 배치한 건 특히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데요. 이슬람과 유대-기독 문화 양쪽에서 신성한 성지로 여기는 ‘바위의 돔’이 시종일관 빙글빙글 돌아가는 모습을 담은 영상입니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사이에서 여전히 쟁탈의 대상인 이 거대한 성지가 UFO 혹은 회전목마 같은 놀이기구로 보이는 건 아무리 성스러운 대상이라도 정치와 이념의 이해관계에 좌우되어버리는 상황 그 자체입니다. 여전히 계속되는 이들의 전쟁을 생각하면, 천진하게 빙글빙글 도는 돔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예술은 현실을 반영하지만, 그 현실을 반복하는 게 아니라 이토록 강력한 상징을 차용합니다.

와엘 샤키, ‘동굴(암스테르담)’, 스틸 이미지, 2005, 단채널 비디오, 사운드, 자막, 12분 45초.

전시 제목의 일부인 ‘텔레마치’는 1970년대에 서독에서 방영된 버라이어티 쇼에서 따온 것이라고 합니다. 여러 국가로 수출되어 사우디에서도 큰 인기를 끈 프로그램입니다. 당시 텔레마치 방송에서는 매회 독일의 2개 마을이 제한 시간 동안 경기를 벌여 승부를 겨루었는데, 각 마을 주민은 이기기 위해 기상천외한 복장을 하고 무척 괴상하고 우스꽝스러운 장면을 연출했습니다. 와엘 샤키는 서로 다른 문화가 만나고 충돌하는 지점을 기묘한 대결 및 승부로 오락화해 보여준 이 프로그램에 크게 영감받았고, 문화 간의 기묘한 교차와 갈등, 융합을 다루는 ‘텔레마치’ 연작을 만들었습니다.

‘텔레마치’ 연작에는 이집트의 평범한 이들이 대거 등장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존재는 작가의 진정성을 뒷받침하는 동시에 작가의 이야기가 현실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시사하죠. 그중 <텔레마치 사다트>(2007)는 이집트의 집단 기억에 큰 영향을 미치는 이집트 전 대통령 암살 사건 및 그의 장례식을 재현하는데, 아이들의 존재가 눈에 띕니다. 아이들이 얽히고설킨 역사를 알 리 만무하고, 그래서인지 이들의 몸짓과 상황이 난센스로 다가오는 거죠. <텔레마치 교외>(2008)는 이집트 나일강 삼각주의 한 시골 마을을 찾은 헤비메탈 밴드의 공연 모습과 이를 지켜보는 주민들의 반응을 교차해 보여줍니다. 헤비메탈을 목이 터져라 열창하는 뮤지션의 목소리는 소거되었고, 이들을 바라보는 주민들의 반응은 미지근할 뿐 아니라 냉담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고요한 불협화음은 도처에 깔린 소통 불가능한 상황을 연상시키며 헛웃음을 짓게 합니다.

와엘 샤키, ‘텔레마치 사다트’, 스틸 이미지, 2007, 단채널 비디오, 사운드, 10분 34초.
와엘 샤키, ‘텔레마치 교외’, 스틸 이미지, 2008, 단채널 비디오, 사운드, 9분 8초.

한편 <텔레마치 쉘터>(2008)는 영상 이면의 이야기가 더 기대되는 작품입니다. 허허벌판 사막에 작은 오두막이 있습니다. 굳게 닫힌 오두막의 문이 열리면서 아이들이 하나둘 나옵니다. 아이들은 어딘가로 질주하기도 하고, 같이 나오는 다른 아이들을 보살피기도 합니다.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이들의 행렬을 한동안 바라보았습니다. 이 아이들은 세상 밖으로 나오면서도 아마 자신들이 어디로 가는지 모를 겁니다. 아이들의 발걸음은 가벼워 보이기도 하고, 주춤거리는 듯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아이들이 계속 나오는 것처럼, 우리는 움직이고 있다는 겁니다. 오두막에서 뛰어나온 아이들을 맞이하는 것도, 계속 달릴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어른들의 몫일 겁니다. 유목과 도시,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이 서로 만나는 와엘 샤키의 작품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길을 걸어온 보통의 존재들을 만납니다. 그들의 모습에서 우리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들만의 역사를 우리 역사로 번안하는 와엘 샤키의 능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입니다.

와엘 샤키, ‘텔레마치 쉘터’, 스틸 이미지, 2008, 단채널 비디오, 사운드, 4분 26초.
정윤원(미술 애호가, 문화 평론가)
사진
바라캇 컨템포러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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