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스타, 조나단 앤더슨의 모든 것
아일랜드 출신의 조나단 앤더슨은 클래식을 급진적으로 재해석해 로에베를 패션계에서 가장 탐나는 브랜드로 만든 뒤 11년 만에 그곳을 떠났다. 그는 이제 디올을 능가할 준비가 되었다.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의 넓은 공간 한 곳에는 거대한 캔버스 두 개가 나란히 걸려 있다. 1550년경 티치아노 베첼리오(Tiziano Vecellio)의 작품 ‘아담과 이브’, 그로부터 약 80년 후 페테르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가 그린 동일한 주제의 작품이다. 둘 다 흐트러진 머리칼의 아담이 왼쪽에 앉아 싱그러운 선악과를 따려는 들뜬 표정의 이브를 막기 위해 무력하게 팔을 뻗고 있다. 그리고 선악과나무에는 뱀을 닮은 생명체가 도사리고 있다. 두 작품은 크기와 구도, 심지어 채색까지 구별이 불가능할 정도로 비슷하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루벤스가 티치아노의 요소 중 일부를 능숙하게 수정했다는 걸 알 수 있다. 티치아노의 아담은 오른팔을 뒤로 기댄 채 이브의 가슴을 향해 힘없이 왼손을 뻗고 있으며, 그녀를 도저히 막을 수 없다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루벤스의 아담은 몸을 앞으로 숙여 완강한 의지를 드러내고, 돌아앉은 상반신은 이브의 멍한 눈을 유혹에서 돌리기 위한 필사적 노력처럼 보인다. 루벤스는 티치아노의 여러 작품을 모사했지만, 프라도 미술관장 미구엘 팔로미르 파우스(Miguel Falomir Faus)는 ‘아담과 이브’가 원본보다 나은 유일한 작품이라고 말했다.
“결국 추앙입니다.” 지난해 12월, 조나단 앤더슨(Jonathan Anderson)은 프라도 미술관의 두 작품 앞에 서서 말했다. “거장에게서 보고 배운 거죠. 패션계에서는 재해석을 부정적으로 보지만, 예술사에서는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한 방식입니다. 결국 정보를 전달하거나 묘사를 보고 배우는 거니까요. 그런 관점에서 가장 위대한 컬렉션인 두 작품을 나란히 전시한 것은 매우 동시대적이라고 봅니다.” 지난해 앤더슨은 영국 예술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비슷한 메시지로 학생들에게 연설을 했다. “진정성은 매우 중요합니다. 독창성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훔치고, 변형하고, 차용하세요. 어디서 가져왔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으로 무엇을 만드느냐가 중요하죠. 옛날 영화, 요즘 영화, 역사책, 그림, 사진, 시, 꿈, 무엇이든 많이 보세요. 그리고 마음에 와닿는 것만 훔치세요. 그러면 여러분의 작품은 진정성을 갖게 될 겁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이 연설도 상당 부분 훔친 겁니다.” “훔치고, 변형하고, 차용하라”는 문구를 영화감독 짐 자무쉬에게서 빌려온 것임을 교묘하게 인정하는 그만의 방식이었다.

1984년 북아일랜드에서 태어난 앤더슨은 2013년 로에베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임명되기 전까진 프라도 미술관에 가본 적이 없었다. 가죽 제품 전문 회사로 시작한 로에베는 설립된 지 170년이 넘은 스페인 회사다. 거대 패션 기업 LVMH 산하의 이 브랜드는 앤더슨의 지휘 아래 패션 전문가뿐 아니라 사업가들에게도 큰 사랑을 받았다. 마드리드 정부에 제출된 서류에 따르면 2023년에 2억 유로 이상의 수익을 기록했으며, 이는 2022년 대비 60% 성장한 수치다. 원래 마드리드에서 만나기로 한 앤더슨과의 첫 미팅은 갑작스럽게 미뤄졌는데, 그날 앤더슨이 런던에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패션 어워즈가 열리는 날이라는 걸 알았기에 나는 급하게 입장권을 구해야만 했다. 앤더슨은 로에베와 자신의 브랜드 JW 앤더슨으로 2년 연속 올해의 디자이너상을 수상했다.
그가 맡아 책임져야 할 여러 가지 일 때문에 앤더슨의 스케줄은 끊임없이 업데이트되며, 그와의 미팅도 사전 통보 없이 바뀌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래서 처음 계획대로 호텔 로비에서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는 대신 프라도 미술관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나 혼자 방문할 계획이었지만, 앤더슨의 홍보 담당자는 그가 나와 함께 미술관을 둘러볼 거라고 전했다. 앤더슨보다 몇 분 앞서 도착한 나는 미술관의 보안 담당 팀장이 어쩔 줄 몰라 하는 직원 대여섯 명과 함께 그를 안내하는 것을 지켜봤다. 오전 10시였고, 그에게는 로에베 광고 촬영을 위해 리스본행 비행기를 타러 공항으로 출발하기 전까지 정확하게 90분의 시간만 주어졌다.

하지만 프라도 미술관에서 그를 만난 건 좋은 생각이었다. 앤더슨은 도자기와 페인팅을 수집하는 데 진심일 뿐 아니라 열정적인 후원자다. 매년 열리는 로에베 재단 공예상을 창설한 당사자인 그는 런던의 빅토리아 앤 앨버트 미술관 위원회 회원이다. 나는 스페인 왕가 예술 컬렉션에 대한 그의 설명을 기쁘게 들었다. 연휴가 시작되는 주말, 마드리드 사람들로 붐비는 갤러리에서 허둥지둥 그를 쫓아다녀야 했지만 말이다. 관람객은 키가 크고 소년처럼 잘생긴 아일랜드 남자를 알 듯 말 듯 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그는 사람들 사이를 빠른 걸음으로 지나치며 열정적이고 확신에 찬 어조로 예술사를 설명했다. 미술관에서 붙여준 도슨트는 우리 뒤를 조용히 따르며 앤더슨이 말하는 작품(“이제 반다이크의 작품을 보죠.” “카날레토 작품은 봤나요?”)이 전시된 방향으로 재빠르게 안내했는데, 하이엔드 브랜드 부티크에서 VIP 고객을 응대하는 퍼스널 쇼퍼 같았다.
앤더슨은 티치아노와 루벤스의 그림을 처음 본 순간 두 작품에 완전히 사로잡혔다고 말했다. 자신의 비전을 구현한다는 점에서 예술가들은 루벤스의 위치에 있다고 설명했다. 직접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 전, 기량이 뛰어난 선구자의 작품을 흡수하고, 학습하고, 또 다른 기술로 모방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대가나 명작을 보고 배우면 결국 그 안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찾아내야 합니다. 청바지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지만 청바지를 새롭게 제시할 방식을 찾아야 하는 것처럼요.” 최근 로에베 컬렉션에서 앤더슨은 그 과제를 여러 번 해냈다. 주머니 주위에 데님 원단을 늘어뜨려 허벅지 부위에 불룩한 볼륨을 연출한 청바지는 화가 게인즈버러의 그림 속 상속녀의 스커트 같았다. 비대칭으로 감싼 데님 원단이 엉덩이에서 대각선 형태로 주름지도록 디자인한 팬츠는 존 싱어 사전트의 그림 속 우아한 드레스처럼 흘러내렸다.
“우리는 과거를 보고 배웁니다.” 앤더슨은 현대사회가 감식안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며, 과거의 가치 또한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고 탄식했다. “티치아노와 루벤스는 당대 화가 중 슈퍼스타였지만, 오늘날 그들의 회화는 그저 공예품 정도로 여겨질 수도 있었죠. 그들은 프랜시스 베이컨이 아니라 스페인 왕 펠리페 2세에게 고용된 기능공이었으니까요.”
왕가의 후원은 프라도 미술관 곳곳에서 드러난다. “권력을 드러내는 훈장 같죠.” 앤더슨의 감상이다. 우리는 디에고 벨라스케스와 프란시스코 고야의 작품이 전시된 복도를 걸었고, 1665년 열네 살의 마르가리타 테레사 왕녀를 그린 후안 바우티스타 마르티네스 델 마소 같은 다른 궁정화가의 작품도 함께 걸려 있었다. 델 마소의 그림 속 왕녀는 은색과 살구색 실크 드레스를 입고 있는데, 파니에 스커트의 폭이 그녀의 키만큼 넓었다. “옷 구조에 매우 관심이 많아요. 그림 속 의상의 내부 구조는 실로 엄청납니다.” 그는 말을 이었다. “뼈대가 있고요.” 대부분 고래 뼈로 만든 것이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원단과 충전재를 겹겹이 쌓았습니다. 말도 안 될 정도로 무겁죠. 그런 옷차림으로는 멀리 갈 수도 없어요.” 지난해 9월, 파리에서 열린 로에베 쇼에서 그는 엉덩이 주위에 구조물을 넣은 드레스를 선보였다. 그중에는 극도로 축약된 형태에 엉덩이를 겨우 가리는 길이의 스커트도 있었는데, 훨씬 움직이기 편해 보였다. 고래 뼈 대신 뻣뻣한 페티코트 위에 하늘거리는 꽃무늬 드레스를 레이어드한 룩은 볼륨과 여름의 투명한 느낌을 결합했다.

중세 종교 예술품이 전시된 공간에 들어선 우리는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 앞에 멈췄다. 1400년대 중반 네덜란드 화가 로히어르 판데르 베이던(Rogier van der Weyden)이 그린 이 작품의 복잡한 구도는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의 몸 옆에 구겨진 푸른색 드레스 차림으로 쓰러진 비통한 마리아의 모습을 보여준다. “원단을 가장 훌륭하게 묘사한 작품 중 하나죠.” 앤더슨은 마리아가 입은 드레스 소매의 좁은 회색 트리밍과 그 아래 드러난 울트라마린 컬러의 딱 붙는 긴 소맷단을 언급했다. 신성모독일 수 있지만, 얼마 전 JW 앤더슨 컬렉션의 메리노 알파카 스웨터가 떠올랐다. 그 스웨터의 네크라인과 소매도 기발한 스티치 방식을 적용해 두 벌을 레이어드한 것처럼 보인다. 앤더슨은 계속 작품에 대해 말했다. “인간성 묘사의 시작입니다. 옷과 옷이 가진 힘에 대해 알 수 있죠. 역사를 훑어보면 의복은 결국 우리가 자신을 어떻게 보느냐를 투영합니다.”
호화로운 원단을 표현한 수많은 회화 작품의 맥락에서, 에덴동산을 그린 티치아노와 루벤스의 작품은 유독 도발적이다. 두 화가는 각자 의복이 필요하지 않았던 최후의 순간을 그렸다. 이브가 선악과를 향해 나아가기 전에는 누구도 패션에 대해 왈가왈부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어떤 형태의 소비주의도 존재하기 전입니다. 명령을 거역하기 전까진 필요하지도 않았죠. 어쩌면 우린 마음속 깊은 곳에 벌거벗은 게 더 낫다는 괴이한 환상을 품고 있는지도 몰라요.”

프라도 미술관 투어는 시작에 불과했다. 앤더슨의 팀원은 그 후로도 여러 차례 양해를 구하며 스케줄 변경을 알렸다. 모델 피팅도 참관하기로 돼 있었지만 마드리드에 도착한 직후 취소되었다. 앤더슨이 LVMH 기업 행사에 참석해야 했기 때문이다(로에베에서 호텔 방으로 보내준 아름다운 꽃다발이 약간의 위로가 되었다). 파리에서 앤더슨이 지난 10년간 로에베에서 선보인 작업을 기념하는 책 발간 이벤트가 열렸을 땐 행사 직전에 초대장을 받았는데, 그가 책에 사인하느라 바빠 나와 대화할 시간이 없을 거라는 사전 경고도 함께 받았다(이번에는 더 아름다운 꽃다발이 호텔 방으로 배송됐다). 애비뉴 몽테뉴에 위치한 로에베 매장에서 파티가 열렸고, 나는 한정판 책을 선물 받았다. 내 여행 가방을 꽉 채울 정도로 컸다. 내가 사인 받을 차례가 되자 앤더슨은 그 큰 책에 “사랑을 담아, 조나단”이라고 남겼다. 앤더슨이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런던에서 만나기로 한 약속은 확정된 것이었지만 다시 무기한 연기되었고 그렇다고 아예 취소된 것도 아니었다. 불확실한 상태로 감질나게 몇 주를 기다리면서, 나는 2023 가을/겨울 로에베 컬렉션의 트롱프뢰유 프린트 A라인 실크 드레스를 떠올렸다. 앤더슨은 드레스에 또 다른 빈티지 드레스를 프린트해 두 벌의 드레스가 겹쳐진 것 같은 모습을 기발하고 미묘하게 표현했다. 몇 달이 흐르는 동안 나는 앤더슨이 합스부르크 궁정의 대군주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프라도 미술관 벽에서 거만한 얼굴로 아래를 내려다보며 비웃고 있는, 벨라스케스가 그린 귀족 중 한 명처럼 말이다. 물론 나는 궁전 문 앞에서 간절히 애원하는 사람이다.
패션계에 만연하는 거만함에 대해 말하려는 게 아니다. 지난해 패션계에는 앤더슨이 로에베를 떠나 디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임명될 거라는 소문이 파다했고, 9월 열린 2025 봄/여름 파리 패션 위크의 가장 큰 이슈였다. 로에베는 패션 팔로워 무리를 도시 외곽의 중세 요새 샤토 드 뱅센(Château de Vincennes)으로 초대해 앤더슨의 페티코트 드레스를 선보였다(카키색 트렌치 코트도 흥미로웠는데, 헴라인에 와이어가 숨겨져 바람에 부푼 것처럼 넓게 벌릴 수 있었다). 로에베의 파리 컬렉션은 쇼가 아니라 풍경과도 같았다. 밖에는 전 시즌 로에베 드레스를 입은 구경꾼 수백 명이 라이브 스트리밍을 하며 셀러브리티가 도착할 때마다 소리를 질렀다. 방문한 셀럽 중 짙게 태닝된 피부에 가죽 재킷과 치노 팬츠를 입은 제프 골드브럼(Jeff Goldblum)은 자신의 사진을 찍으라는 듯 느린 속도로 어슬렁거린 후에야 안나 윈투어 옆에 앉았다. 보송보송한 스웨터를 입고 등장한 다니엘 크레이그와 레이첼 와이즈는 타운 카에서 내려 성문을 들어서자 큰 환호를 받았다. 크레이그는 윌리엄 버로스의 소설을 각색한 루카 구아다니노의 영화 <퀴어>를 촬영하면서 앤더슨을 처음 만났다. 앤더슨은 영화 의상을 디자인했으며 후에 크레이그는 로에베 광고 모델이 됐다. 캠페인에서 그는 벨트는 끼웠지만 버클을 채우지 않은 청바지와 패턴 스웨터를 입고 거만한 포즈를 취했다. (“조나단은 창의적인 세계를 좋아해요. 그리고 그가 자신의 분야에서 하는 작업은 다방면으로 영향을 미치죠. 조나단은 한 가지 일만 하는 게 아니라 아주아주 많은 일을 하고 있는 겁니다.” 나중에 크레이그가 내게 남긴 말이다.)

프라도 미술관을 둘러보는 동안 앤더슨은 하우스를 떠난다는 루머에 대해 부인도 인정도 하지 않았다. “현재에 아주 만족합니다. 다음 주에는 그렇지 않을지 모르지만요.” 이렇게 말한 그는 “그들이 나를 원하는 만큼 오래” 로에베에 머물 의사가 있다고 덧붙였다. 회피하는 듯한 코멘트는 LVMH가 곧 다른 곳에서 그가 일하기를 원한다는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몇 주가 지나면서 앤더슨의 미래에 대한 담화는 계속되었다. “온갖 루머가 돌고 있어요. 우리는 숨죽인 채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난 연말 매년 패션 어워즈를 주최하는 영국패션협회의 전 회장 캐롤린 러시(Caroline Rush)가 말했다. 한 해가 끝날 무렵 JW 앤더슨과 로에베 두 브랜드 모두 1월에 열리는 밀라노와 파리 남성 패션 위크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앤더슨이 잠시 휴식을 원한다는 의미일 수 있지만 변화가 코앞에 닥쳤다는 뜻이 될 수도 있었다. 그리고 1월 말, 조각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디올 맨의 아티스틱 디렉터 킴 존스가 사임하고 디올 여성복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마리아 그라치아 키우리는 변함없이 5월까지 쇼를 발표할 거라는 소식이었다. 그럼에도 패션 뉴스레터 ‘Puck’의 패션 리포터 로렌 셔먼(Lauren Sherman)은 앤더슨이 디올 전반을 지휘하는 디자이너로 확정되는 것을 공공연한 비밀처럼 보도했다. 지난 3월 초 대망의 임명이 발표되지 않은 상황에서 셔먼은 앤더슨이 디올의 연 수익을 현재 추산 100억 유로에서 140억 유로로 증가시킬 거라는 기사를 게재했다. 또 다른 매체는 앤더슨이 파리 애비뉴 몽테뉴의 디올 본사에 출근하고 있으며 이미 다음 컬렉션 작업을 시작했다고 전했다(“우리는 추측성 보도에 대응하지 않습니다.” 로에베의 PR 담당자는 노코멘트로 일관했다).
다른 디자이너들이 파리에서 컬렉션을 선보이는 동안 로에베는 7구에 위치한 포초 디 보르고(Pozzo di Borgo)에서 전시 형태의 컬렉션을 발표했다. 한때 칼 라거펠트가 소유했던 이 저택 내부는 재단용 마네킹에 입힌 의상과 대리석 기둥 위에 전시한 가방으로 채워졌다. 스파게티 모양의 비즈 장식 오간자 고리로 만든 드레스, 수트와 오버사이즈 가죽 부츠 룩 등의 의상은 “추억이나 영감으로 사용하기 위해 모아둔 아이디어의 스크랩북”이라는 표현과 함께 소개되었다. 전시 공간에서 앤더슨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전날 자신의 인스타그램 계정에 로에베에서 기억할 만한 순간들을 모은 짧은 동영상을 업로드했다. 상당수의 댓글은 이 포스팅을 디자이너의 공식적인 작별 인사로 받아들였다. 3월 17일, 그는 인스타그램에 로에베를 떠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디올에 대한 내용은 확인되지 않은 채로 남았다.

그동안 라프 시몬스와 존 갈리아노를 포함한 여러 디자이너들이 1946년 크리스챤 디올이 설립한 하우스에 자신만의 색을 입히기 위해 노력해왔다. 무슈 디올의 데뷔 컬렉션은 조각품 같은 뉴 룩 드레스로 패션계의 고전이 됐지만, 드레스 소재가 너무나도 호화로웠기에 제2차 세계대전 동안 검소한 삶에 익숙해진 대중의 분노를 샀다. 디올도 앤더슨과 마찬가지로 시각적인 예술가들을 존경했다. 20세기에 무슈 디올은 피카소와 만 레이, 살바도르 달리의 작품을 소개하는 갤러리의 공동 소유주였다. 또한 해외 곳곳에 부티크를 열어 여성복 외에 넥타이와 주얼리도 판매한 수완 좋은 사업가였다.
앤더슨도 못지않게 극도로 상업적이며 지적이다. 로에베 2024 가을/겨울 컬렉션에서 그는 흉곽 아래부터 솜털이 폭발하듯 쌓인 형태의 캐시미어 스웨터를 선보였는데, 납작한 니트 아래 풍성한 니트를 레이어드한 것처럼 보였다. <보그>의 사라 무어(Sarah Mower)는 화이트 버튼이 한 줄로 달린 시어링 에비에이터 재킷을 예로 들면서 그가 “온전히 평범하고 실용적인 아이템을 절대 잊지 않는” 디자이너라고 설명했다(참고로 재킷 가격은 결코 온전히 평범하지 않으며, 거의 7,000달러에 육박한다). 앤더슨이 그의 첫 컬렉션에 선보인 퍼즐 백은 부드러운 가죽 조각을 잘라 비스듬한 형태로 패치워크한 것으로, 요란스럽지 않게 뽐내기 좋은 아이템이다. 그는 가교 역할을 하면서 패션과 공예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으며, 로에베 제품을 구입하는 소비자들이 더 지적이고 심미적으로 수준 높은 일에 참여하는 기분을 느끼게 만든다. 단순히 고가의 하이엔드 제품을 소비하는 게 아니라 말이다.

JW 앤더슨은 2008년 남성복으로 시작해 최근 로에베에서 선보인 스타일을 전부 아우른다. 앤더슨의 디자인은 짓궂고 유머러스한 취향으로 소비자의 관심을 끌었다. 2011년 첫 여성복 컬렉션에서 그는 화이트 라텍스 소재의 성직자용 칼라가 달린 페이즐리 파자마 수트를 일상복으로 제안했다. 콧수염처럼 보이는 모피 조각과 꽃을 장식한 묵직한 하이킹 부츠와 함께였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러플 쇼츠’로 구성한 남성복 컬렉션을 선보였다.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밑단에 주름 장식이 달린 이 쇼츠는 기존 성 구분에 대한 도전으로, 12년 전 사람들에게 진정한 충격을 안겼다. 런던의 유명 스타일리스트 해리 램버트는 그의 초기 디자인이 “매우 솔직하고 엉큼하며, 재미있고 흥미로운 동시에 자극적이었다”고 말했다. 앤더슨은 해리 스타일스가 론칭하고 램버트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맡은 브랜드 플리징(Pleasing)과 협업한 적도 있다. 파파라치 사진에서 스타일스가 앤더슨의 옷을 입은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는데, 빵빵한 형태를 만들기 위해 패딩 충전재를 채운 네이비 봄버 재킷도 그중 하나다. 2020년 초에는 JW 앤더슨의 레고 컬러 패치워크 카디건을 입은 스타일스의 모습이 찍혔고, 봉쇄령 시기에 집에서 손뜨개로 벌키한 울 카디건을 만드는 게 크게 유행했다. 결국 앤더슨은 요란한 니트웨어를 입을 준비가 된 이들을 위해 패턴을 공개하기에 이르렀다.
앤더슨은 종이에 스케치하는 대신 마네킹에 직접 천을 대고 재단하며, 주로 형태에 신경을 쓴다. 팬츠나 재킷의 구조를 실험하고, 익숙한 원단을 참신한 방식으로 사용해 보는 이에게 위화감을 준다. 때로는 실용성과 동떨어진 의상을 런웨이에 올린다. 2023년 JW 앤더슨은 어린이용 장난감이나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에 주로 사용하는 모델링용 점토 브리티시 플라스티신(British Plasticine)으로 만든 후디와 쇼츠를 선보였다. 결과물은 도발적인 동시에 우스꽝스러웠다. 클레이 애니메이션 시리즈 <월레스와 그로밋>의 스트리트 웨어 같았다. 앤더슨은 학교 갈 때 입는 흔한 아이템을 10대들이 자신만의 기발한 방식으로 연출하는 데서 영감을 얻었다고 설명했다. 말 그대로 베이식 룩의 리모델링이었다.
앤더슨의 디자인은 조각 같은 면이 있지만, 그는 3차원을 2차원으로 해석하는 데 특출한 재능이 있다. 하이엔드 매거진의 화보로, 거대한 광고판의 이미지로, 무엇보다도 끝없이 이어지는 소셜 미디어의 스크롤 속 2차원 이미지로 말이다. “희한하게도 납작한 걸 좋아해요.” 앤더슨이 내게 말했다. “최종 이미지를 정말 좋아합니다. 패션은 궁극적으로 이미지와 욕망을 통해 판매로 이어지니까요.” 디지털 기술이 욕망을 이용하는 방식과 사진에 대한 그의 관심은 의복에 초현실적인 힘을 더하고, 온라인에 확산되게 만든다. 2023 봄/여름 컬렉션의 일부로 출시한 ‘픽셀’ 캡슐 컬렉션의 후디와 재킷, 팬츠는 해상도가 낮은 비디오게임의 8비트 이미지처럼 보이게 제작한 것. 온라인에 공개됐을 때, (온라인 이미지의 효과를 구현한 옷을 온라인으로 본다는 의미에서) 일종의 메타 유머가 됐다. 이 픽셀 후디를 실제로 착용한 사람 중에는 마크 제이콥스도 있었다. 그는 자신의 60세 생일 파티에서 이 옷을 입었는데 마케팅에 능한 거장이 새로운 거장에게 보내는 찬사였다.
앤더슨은 로에베를 럭셔리 브랜드라기보다 문화적인 브랜드라고 칭하는 걸 선호한다. 럭셔리 브랜드의 의미가 훼손됐기 때문이다. “럭셔리 브랜드는 매스 브랜드만큼 대중화됐습니다.” 그리고 로에베 같은 패션 하우스에서 추종자들에게 심미적 영감과 교육적 형태를 제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존하는 역사적 예술가와 대중이 접하기 어려운 디자이너의 작업을 소개하는 것도 포함된다. “맞아요, 럭셔리는 엘리트주의지만, 동시에 매우 가까이 있습니다.” 그는 프라도 미술관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회화 작품과 동일한 관점으로 럭셔리를 바라본다고 여깁니다. 소유하지 못하더라도 보는 데서 즐거움을 얻고 정서적으로 반응하죠.” 이제 로에베 부티크에는 앤더슨의 취향과 그가 수년 동안 가까이 지낸 독립 큐레이터 앤드류 보나치나(Andrew Bonacina)의 조언에 따라 로에베 재단의 작품이 전시돼 있다. 마드리드 로에베 플래그십 스토어에는 하워드 호지킨(Howard Hodgkin)이 애쿼틴트 방식으로 작업한 알록달록한 추상화를 볼 수 있다. 6m가 넘는 이 작품은 매장 입구 맞은편에 걸려 있다. 브랜드의 시그니처 백인 퍼즐 백, 스퀴즈 백, 플라멩코 백이 전시된 선반 위에는 에드문드 드 발(Edmund de Waal)의 하얀 도기가 진열장 안에 전시돼 있다. 앤더슨의 취향을 추앙하지만 5,000달러가 넘는 가죽 소재 배기 팬츠를 살 형편이 안 되는 이들에게는 지난 8년간 이어져온 유니클로와 JW 앤더슨 협업 컬렉션이 있다. 유니클로는 앤더슨이 리바이스와 함께 일상복으로 애용하는 브랜드다. 지난가을 유니클로는 JW 앤더슨의 ‘커브드’ 팬츠를 약 50달러에 판매했는데, 그 실루엣은 한눈에 보기에도 티치아노와 루벤스의 작품처럼 JW 앤더슨의 ‘트위스트’ 진과 비슷했다. 교활하게 왜곡된 재단선과 휜 다리를 패셔너블하게 만들 정도로 완벽한 비율까지.
앤더슨은 1980년대 아일랜드 럭비 팀에서 활약한 유명 선수 윌리 앤더슨(Willie Anderson)의 둘째 아들이다. 윌리 앤더슨은 은퇴 후 국가대표 팀 코치를 맡았다. 아일랜드에서 윌리는 공을 다루는 기술뿐 아니라 결정적 순간에 보여준 활약상으로도 전설적인 인물이다. 1989년 뉴질랜드 럭비 팀 ‘올 블랙스’와의 매치에 뉴질랜드 선수들은 경기 시작 전 마오리 댄스를 추는 전통 의식 ‘하카’를 시작했다. 아일랜드 팀 주장이었던 윌리는 동료 선수들과 팔짱을 끼고 헤드밴드에 딱 붙는 반바지를 입은 뉴질랜드 선수들을 노려보며 상대편 주장을 제압했다. 앤더슨에게 아버지의 직업이 남성성에 대한 그의 인식에 영향을 미쳤는지 질문했다. “워낙 남성적인 운동이다 보니 오히려 우스꽝스러워진 면이 있죠. 매우 과장됐어요.” 그리고 자신이 선보인 쇼츠에 대해 설명했다. “신체에서 다리를 좋아해요. 몸의 일부가 길어진 흥미로운 신체적 표현이랄까요. 길이는 의복에서도 다양한 의미를 갖습니다. 남자가 입은 반바지에는 극도의 남성성과 여성성이 공존합니다. 어떤 맥락으로 표현하느냐에 따라 달라지죠.”
앤더슨이 성장한 ‘맥락’은 보수적인 시골이다. 그의 고향인 북아일랜드 마러펠트(Magherafelt)는 농지로 둘러싸인 곳이다. 친할아버지는 농부였고 앤더슨은 소년 시절의 대부분을 닭과 양 떼 사이에서 보냈다. “아일랜드에서 자란 게 도움이 됐어요. 섬에서의 삶이 어떤 건지 몰랐다면 지금의 나는 없을 겁니다.” 다시 말을 이었다. “창문이 작아서 바깥 풍경은 뭐든 커 보였습니다. 큰 세상은 더 커 보였죠.” 어린 시절 아일랜드는 종파 간 대립과 폭력으로 분열돼 있었다. 그의 가족은 개신교도였고 윌리는 운동선수였기에 남북 구분이 공식적으로 사라진 문화적 삶의 영역에 속했다(갈등이 심각했음에도 아일랜드 스포츠 팀은 지역 구분 없이 선수들을 기용했다). 그럼에도 사회문제를 무시하기는 어려웠다. “살면서 그런 갈등이 코앞까지 닥친 순간은 수없이 많았습니다.” 앤더슨이 회상했다. “하루는 학교에 가려고 나왔는데, 거리가 완전히 폐허가 돼 있었죠. 사람들은 무릎에 총을 맞은 상태였어요. 어떤 사람은 바에 갔다가 총에 맞아 머리가 날아가기도 했습니다.” 1998년 교사였던 앤더슨의 어머니 헤더(Heather)는 근처 도시 오마(Omagh)에 장을 보러 갔다가 끔찍한 차량 폭파 사건에 휘말릴 뻔한 적도 있다. 그 사건은 수십 년 동안 지속된 갈등으로 인한 최악의 비극이었다. 가톨릭교도와 개신교도 29명이 사망했고 200명 이상이 다쳤다.
대부분의 이웃에 비하면 앤더슨 가족은 덜 보수적인 편이었다. 10대 시절 그의 부모는 이비자에 별장을 구입했고, 앤더슨은 뜨거운 태양과 함께 밤늦게까지 문란하게 즐기는 남유럽 문화를 처음 접했다(그는 대부분 흐린 아일랜드의 하늘에 대해 설명했다. “빛이 널리 퍼지지 않는 나라죠.” 이는 컬러를 사용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는 모국의 날씨를 닮은 중간 회색조 의상이 사진에 잘 나온다는 점을 강조했다). 시각적 예술에 대한 앤더슨의 관심은 원단 회사 경영자이자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예술에 집착한’ 외할아버지의 영향을 특히 많이 받았다. 외할아버지는 그를 벨파스트와 더블린의 미술관에 데려갔으며 앤티크 시계를 수집했다. “살 수 있는 가장 좋은 시계를 사서, 더 좋은 시계로 업그레이드하셨죠.” 앤더슨의 외할아버지는 2020 봄/여름 로에베 컬렉션에 참석할 정도로 장수했다. 앤더슨은 그 컬렉션에서 17세기 스페인 귀족의 크리놀린을 연상케 하는 투명하고 구조적인 레이스 드레스를 선보였다. “외할아버지는 넋이 나갈 정도로 매혹적이라고 하셨지만, 매우 혼란스러워하셨어요.”
앤더슨은 외할아버지에게 예술에 대한 애호뿐 아니라 감식안과 목표에 대한 강한 소유욕을 물려받았다. 그는 경매 사이트를 드나드는 것이 ‘매우 위험한’ 습관이 됐다는 걸 인정했다. 앤더슨이 여러 작품을 구입한 런던의 현대미술 갤러리스트 토머스 데인(Thomas Dane)은 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최근 흥미로운 컬렉터 중 한 명이죠. 그의 관심 분야는 놀라울 정도로 폭넓습니다.” 앤더슨이 수집하는 작가 중 한 명인 앙리 고디에 브르제스카(Henri Gaudier-Brzeska)는 프랑스 소용돌이파 조각가이자 화가로 제1차 세계대전 당시 23세의 나이로 전투 중 사망했다. 라텍스와 왁스를 부어 조각을 만드는 미국 현대 작가 린다 벵글리스(Lynda Benglis)도 그의 리스트에 있다. 영국 조각가 앤시아 해밀턴(Anthea Hamilton)은 나비 같은 일상적 사물이나 대상을 확대하는 초현실적 설치 작품으로 유명하다. 앤더슨은 현대미술에 대한 열정을 자신의 창의적 작업에 적용하는 데 능숙하다. 벵글리스는 로에베 주얼리를 디자인했으며, 로에베의 조나단 앤더슨 아카이브 북 커버는 디자이너의 작업이 아니라 해밀턴의 작품 사진이다. 2022 가을/겨울 캠페인에 등장한 가죽으로 만든 거대한 호박이다.
2017년 앤더슨은 영국 웨스트 요크셔에 위치한 헵워스 웨이크필드 갤러리 전시 <Disobedient Bodies>에서 큐레이터 역할을 처음 맡았으며, 그 후 여러 미술관과 갤러리에서 전시를 기획했다. 헵워스 갤러리 전시에서 그는 루이즈 부르주아(Louise Bourgeois)와 사라 루카스(Sarah Lucas)의 조각품을 장 폴 고티에와 레이 가와쿠보, 그리고 자신이 디자인한 의상과 나란히 배치했다. 앤더슨에게 큐레이팅을 제안한 건 당시 헵워스 갤러리의 헤드 큐레이터 앤드류 보나치나였다. “조나단은 전시에 포함시키고 싶은 작가에 대한 존경심과 설렘으로 가득 차 있었어요. 초반에는 패션을 포함하는 것에 거부감을 가졌죠. 자신이 일하는 분야이기에 예술가에게서 느끼는 마법이나 신비로운 감정이 전혀 없었으니까요.” 보나치나는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앤더슨이 의복도 조각적인 표현의 형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했다고 말을 이었다. “예술가가 생각하고 만드는 방식에 일종의 동류의식을 느끼면서, 패션도 못지않게 급진적일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된 겁니다.”
난독증을 가진 앤더슨은 일반적으로 학자들이 갖는 인내심이나 집중력을 갖지 못했고, 예술적 표현을 발산하는 무대로 연극을 선택했다. 10대 시절, 영국의 국립 청소년 음악 극단에 들어가 ‘한여름 밤의 꿈’ 같은 작품을 각색한 뮤지컬 무대에 섰다. “배경에 등장하는 요정 5번 같은 역할을 맡았습니다.” 열아홉 살이 됐을 때 워싱턴 D.C.의 무대 연극 연기 학교(Studio Theatre Acting Conservatory)에 등록한 그는 처음으로 집을 떠나 가족의 지인이 사는 주택 지하실에서 지냈다. 새로운 환경을 경험하는 것은 신나는 일이었다. “미국에 사는 아일랜드인이었죠. 그리고 미국에선 누구나 아일랜드인을 좋아하고요.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상태였고 아는 사람도 없었어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조차 몰랐죠. 사람들을 만나면 보이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들이 어느 학교 출신인지, 그들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알려 하지 않았습니다.” 아일랜드에 살 때 앤더슨은 술을 마시지 않았고, 담배를 피우지도 않았으며, 자신의 성 정체성을 철저히 숨겼다. “어렸을 때 아마 반에서 제일 재미없는 애였을 거예요. 모든 걸 억누르려고 그랬을 겁니다.” 그가 말을 이었다. “워싱턴에 갔을 때 내가 남자에게 끌린다는 걸 깨닫게 됐죠.” (요즘 앤더슨은 폴 안글라다(Pol Anglada)와 사귀고 있다. 카탈루냐 출신 작가로, 그가 그린 퀴어 이미지는 JW 앤더슨 제품으로 출시되기도 한다.) 앤더슨은 술을 마시고 담배도 피우기 시작했다. “영화관에서 <부기 나이트>를 상영하고 있었는데 영화 보는 내내 담배를 피웠어요.”
“연기가 재미없어지더라고요.” 연기가 자신의 방식이 아니라는 걸 깨닫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됐습니다.” 그는 아일랜드로 돌아가 더블린의 백화점에서 잠시 일하면서 남성복 판매에 집중했다. 그리고 패션을 공부하기 위해 아트 스쿨에 지원했다. 스텔라 맥카트니와 알렉산더 맥퀸 등 유명 디자이너의 모교인 센트럴 세인트 마틴에서 입학을 거절당해 실망했지만, 런던패션대학의 남성복 코스에 입학해 2005년에 졸업했다. 그가 전문성을 성장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교실 밖에서 배운 것들이었다. 옷을 디자인하는 법 외에 소비자를 끌어들이는 요령 같은 것 말이다. 대학 시절 프라다에서 시간제 VMD로 일했을 땐 미우치아 프라다의 오랜 친구이자 동료였던 뛰어난 스타일리스트 마누엘라 파베시(Manuela Pavesi)와 일했다. 파베시는 2015년에 암으로 세상을 떴지만, 젊은 앤더슨에게 자신의 브랜드를 시작하라고 격려했고 앤더슨은 서른이 되기 전에 브랜드를 론칭했다. “그녀는 아이템을 매치하는 방식에서 매우 정확했어요. 그런 건 본 적이 없었죠. 처음에는 모방하고, 자신감을 얻으면 자신의 것을 시도하기 시작합니다. 프라다의 윈도우 작업을 하기로 한 건 내가 한 최고의 선택이었어요. 루벤스가 티치아노에게 느낀 것만큼 내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곳에서 배울 수 있었으니까요.”
모두가 앤더슨의 시간과 창의성을 필요로 하기에 그에게는 주저할 시간이 없다. “자신의 직감을 따르고 재검토하지 않습니다.” 보나치나가 말했다. 앤더슨은 확신에 차 있는 게 분명하다. 2013년 로에베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됐을 때 그는 자신의 직감에 집중하느라 하우스 아카이브를 참고하지 않았다. 아카이브는 100년이 넘는 동안 수집하고 보관한 오브제와 의류를 아울렀다. “하지만 나중에 아카이브를 둘러보면서 다른 사람이 하기 전에 이걸 활용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는 2015년에 이렇게 말했다.
로에베의 시작은 19세기 중반 마드리드로 거슬러 올라간다. 1872년, 소규모 공방 수준의 사업체에 독일 출신의 가죽 장인 엔리케 로에베 로에스베르그(Enrique Loewe Roessberg)가 합류했고 그는 자신의 이름을 내건 브랜드명을 지었다(스페인어를 할 줄 모른다면 ‘로에베’라고 발음해야 한다는 것을 알기 어렵다. 앤더슨은 이 점에 착안했고 배우이자 코미디언 댄 레비(Dan Levy)가 바이럴용 짧은 동영상을 만들었다. 철자법 대회를 패러디한 이 영상에서 오브리 플라자(Aubrey Plaza)를 비롯한 여러 인물이 도전하지만 아무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한다). 19세기 말, 회사는 카예 델 프린시페(Calle del Príncipe)에 매장을 열었고 곧 로에베는 스페인 왕가에 가죽 제품을 납품하게 됐다. 마드리드 외곽의 온도 조절이 가능한 창고에 보관된 로에베 아카이브 컬렉션은 192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가장 오래된 아이템 중에는 빳빳하게 풀 먹인 칼라를 보관할 수 있도록 디자인된 커다란 조개껍데기 모양 상자와 오늘날 기내 수하물 규정에는 맞지 않는 유리병 세 개가 담긴 손바닥만 한 상자도 있다. 로에베 아카이브 관리자 마르타 곤살레스 데 라 루비아(Marta González de la Rubia)는 시설 곳곳을 안내하면서, 회사 설립 초기에는 샘플 보관에 대한 규정이 제멋대로였고 포장 방식은 특히 더 그랬다고 설명했다. 금속 선반에 전시된 크림색 상자에는 로에베라고 새겨져 있는데 20세기 초에 우연히 발견한 것이다. 그 아래 선반에는 현재 로에베 매장에서 사용하는 쇼핑백이 후세를 위해 보관돼 있다. “종이봉투에 지나지 않더라도, 우리에게는 사실상 역사적 자료입니다.” 곤살레스 데 라 루비아가 말했다(종이봉투에 지나지 않더라도 가치가 없다고 하긴 어렵다. 나는 중고 거래 플랫폼 빈티드(vinted.com)에서 그 종이 쇼핑백이 10달러에 판매되는 걸 본 적 있다).
로에베는 1940년대 호세 페레스 데 로사스(José Pérez de Rozas)의 지휘 아래 백과 여러 액세서리와 함께 처음 의류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페레스 데 로사스는 1970년대까지 일하면서 30년 정도 회사 이미지에 변화를 가져온 아티스틱 디렉터다. 그 시절 아카이브는 1975년 무슈 디올과 협업한 적 있으며 1977년에는 젊은 조르지오 아르마니가 로에베를 위해 몇 가지 의류를 디자인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나르시소 로드리게즈가 캐롤린 베셋 케네디의 웨딩드레스를 디자인한 이듬해, 1997년에 디자인 디렉터로 임명된 후에도 의류 컬렉션에서 이렇다 할 흥미로운 점은 찾아보기 어렵다. 앤더슨이 합류했을 때 로에베가 완전한 백지상태는 아니었지만 그가 자신의 색을 입힐 여지는 충분했다. 2014년 파리에서 공개된 첫 컬렉션에는 오늘날 하우스 시그니처로 자리 잡은 요소가 이미 포함돼 있었다. 허리선이 낮은 슬라우치 팬츠가 등장했고, 하우스 정체성과도 같은 가죽 소재와 함께 가벼운 코튼과 리넨 소재가 풍부하게 사용됐다. 로에베를 위한 계획에 영감을 준 자료 중에는 1997년 이탈리아 <보그>에 실린 스티브 마이젤의 사진도 있다. 한 무리의 나른한 모델들이 해변가에 앉아 있었고 그중 두 명은 예스럽게도 책을 읽고 있다(또 한 번의 티치아노 루벤스 모먼트였다. 마이젤의 사진은 알렉스 카츠에 대한 오마주였기 때문이다). “스페인을 생각하면, 해변가에 있는 모습이 떠올라요.” 앤더슨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육지에 둘러싸인 마드리드의 로에베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의문을 제기하겠지만, 브랜드가 겨냥하는 젊은 전 세계 고객에게는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앤더슨의 관리 아래 로에베의 의류 컬렉션 파트는 파리로 옮겼지만 가죽 제품은 여전히 마드리드에서 생산되고 있다. 소규모 산업 단지에 자리한 공장은 도심에서 30분 거리에 있으며, 가죽을 선별하고 재단하는 전문 기술을 훈련받은 수백 명의 지역 주민이 일하고 있다(공장 내부에서 옮기기 위해 가죽을 수레에 걸쳐둔 모습은 당나귀가 수레에 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최근 공장을 방문했을 때 퍼즐 백의 제조 과정이 얼마나 복잡한지 알게 됐다. 가죽 조각을 규격에 맞게 가로로 반을 자른 다음, 바깥 테두리를 남기고 풀로 보강재를 붙인다. 그리고 스웨이드로 안감을 댄다. 이 과정에서 가죽 조각은 스티치로 연결한 부분이 일상생활을 견딜 정도의 내구성을 갖추면서도 동시에 너무 두꺼워지지 않도록 얇게 공정한다. 장인 몇 명이 감초 같은 모양의 기다란 검정 가죽으로 한 쌍의 매듭을 묶어 플라멩코 백을 거의 완성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칭찬하는 앤더슨의 장인 정신이 실제로 행해지는 현장이었지만, 장인의 작업이 낭만적이지만은 않았다. 이들은 다른 작업에 배치되기 전까지 한 번에 2시간만 이 작업을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반복성 긴장 장애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욕망의 대상과 이미지 뒤에는 숨겨진 대가가 있다.
앤더슨이 재임한 지 7년째 됐을 때, 로에베도 다른 모든 패션 브랜드처럼 팬데믹으로 소비자들이 집 밖으로 나올 수 없는 상황 속에 의류와 액세서리를 판매하는 과제에 직면했다. “모든 걸 잃을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죠. 팬데믹 이후에도 좋은 상태를 유지하려면 정말 잘해내야 했습니다.” 봉쇄령이 끝난 후 발표한 컬렉션은 좋은 반응을 이끌어냈다. 앤더슨은 매너리즘 작가 야코포 다 폰토르모(Jacopo da Pontormo)가 1528년에 그린 대표적인 파스텔 톤 작품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에서 영감을 얻었고 몽환적인 연한 핑크와 블루 톤 칼럼 드레스, 무릎이 동그란 형태로 오픈된 레깅스가 등장했다. 레깅스는 폰토르모의 작품 속 상실감에 빠진 인물들의 노출된 다리를 연상케 했다. 당시 앤더슨은 <보그>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팬데믹이 지나고 모든 걸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려면, 새로운 미학이 탄생하는 순간도 허락해야 합니다.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요.”
지난해 12월 프라도 미술관에서 만났을 때 앤더슨은 마음속에 다시 시작한다는 개념을 ‘다시’ 품었음이 분명했다. 그것에 대해 털어놓을 의사나 자유는 없었지만 말이다. “기존의 것을 깨부술 새로운 방식을 찾아야 해요.” 그는 쉴 새 없이 갤러리를 옮겨 다니며 말했다. “나는 무언가를 이뤘습니다. 내가 그걸 다시 부수고 다시 세우거나 혹은 다른 누군가가 그걸 다시 부수고 다시 세우겠죠. 다시 익숙한 곳에서 벗어나 낯선 미학에 도전해야 할 때라고 느껴요.” 그는 말을 이었다. “새로운 자극이나 새로운 것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새로운 회화 작품에 몰두하거나 새로운 것을 찾고 싶어요. 내가 됐다고 느낄 때까지 절대 멈추지 않을 거라는 건 확실합니다.” 그는 내년쯤 JW 앤더슨을 개념적인 형태의 기업으로 바꿀지도 모르겠다고 혼자 중얼거렸다. “JW 앤더슨을 처음 시작했을 땐 ‘난 패션 디자이너가 될 거야, 그리고 이런저런 걸 해서 유명해져야지’라고 여기는 건방진 애송이였어요.” 그가 고백했다. “이제 마흔이고 내 브랜드로 더 급진적인 프로젝트를 진행하려 합니다. 이상하게도 다시 일을 더 어렵게 만들고 있네요.” 앤더슨의 말대로 로에베처럼 잘 알려진 하우스에서 그는 그저 손님일 뿐이기에 ‘서로를 도발하는’ 두 개의 패션 라인을 운영하는 것에서 즐거움을 찾는지도 모른다. 한 브랜드에서 어떤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2주 뒤 다른 쇼에서 완전히 상반된’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식으로 말이다.
우리는 고야의 작품을 전시한 갤러리에 들어섰다. 고야는 궁정화가이자 예리한 사회 비평가로, 그림을 통해 전쟁을 기록하고 불의를 지적했다. “흥미로운 점은 어떤 분야든 실력을 제대로 갖추려면 업무 경험에서 여러 단계를 거쳐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는 일주일 만에 모든 것에 싫증 내는 세상을 살고 있기에 끊임없이 자신을 재발견해야 합니다.” 우리는 일명 ‘검은 그림’으로 알려진 고야의 연작 앞에 다다랐다. 70대 중반의 화가가 말년을 보낸 마드리드 외곽의 농가 벽에 그린 것이다. 이 작품은 끔찍하기로 유명하다. 한 작품은 사투르누스가 아들을 잡아먹는 모습을 묘사한다. 튀어나올 듯 눈을 크게 뜨고 흠뻑 젖은 모습으로 피가 뚝뚝 떨어지는 자식의 몸을 산 채로 뜯어 먹고 있다. 또 다른 작품 ‘마녀의 안식일’은 숫염소처럼 보이는 형체 주위에 마녀들이 입을 벌리고 둥그렇게 모여 있는 모습이다. 이 작품에 깔린 어둠은 20년 동안 지속된 전쟁과 기근, 정치적 격동에 대한 고야의 환멸과 이어진다. “급진적인 행위나 정치적 또는 사회적 행동이 새로운 무언가를 촉발하기도 한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앤더슨이 말했다. “이 작품이 없었다면 프랜시스 베이컨은 존재하지 않았을 거예요. 루치안 프로이트도 마찬가지입니다. 얼굴에 단 몇 번의 붓 터치만 더해서 그 인물의 감정을 표현하는 법을 배울 수 있으니 말이죠.”
앤더슨은 소비자의 감상이 아니라 동료 예술가의 열정과 절박함을 담아 이야기했다. 고야의 미적 진화에 깊이 공감하는 것이 분명해서 혹시 그림을 그리는지 물었다. 미술관을 함께 둘러보는 동안 그가 확신에 차지 않은 유일한 순간이었다. “내가요? 그림을 그리냐고요? 그럴 리가요.” 그가 한숨을 쉬었다. “그려본 적은 있죠.” 갑자기 그는 수줍어했다. 선악과를 먹은 후 벌거벗었다는 걸 깨달은 아담처럼 말이다. “바깥 풍경보다는 방 하나를 꾸며서 그 방을 그리는 쪽이 더 좋아요. 풍경은 그리 흥미롭지 않아서요.” 그러고 나서 얼른 화제를 돌렸다. “할 수만 있다면 2주마다 집 벽 색깔을 바꾸고 싶어요. 집에 있을 때면 물건 위치도 아주 많이 옮긴답니다. 쉽게 질리는 편이거든요.”
앤더슨에게 그가 존경하는 작가들과 자신의 작품을 동급으로 여기는 걸 내키지 않아 하는 것 같다고 했다. “나도 그림을 잘 그리면 좋겠어요.” 그가 인정했다. “회화의 대가로 유명해지고 싶어요. 12점의 대작에만 집중해서 작업하고 능력을 인정받는 거죠. 패션은 좀 더 어려운 편이에요. 지속적인 작업이죠. 정말 좋은 결과물을 얻기 위해 엄청난 양의 결과물을 쏟아내야 해요. 우리는 소비자 천국, 아니 지옥에 살고 있으니까요.”
“지금까지 로에베에서 해온 것은 이해하려는 노력입니다. 내 브랜드에서도 시도하고 싶고 앞으로도 계속하고 싶은 작업이에요. 무언가를 만들어야 하는 이유를 이해하고, 소유할 수 없음에도 그것을 욕망하는 이유를 이해하려는 노력이죠.” 앤더슨은 이제 학생이 아니라 거장이다. “더 이상 열여덟 살이 아니라 성인이라는 걸 깨닫게 되면 다른 사람들을 우러러보지 않을 겁니다. 루벤스처럼 앞으로 나아가 자신만의 언어를 만들어야 해요.” 그가 말을 이었다. “자신이 언제든 교체 가능하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건 좋은 일이에요. 패션의 가장 위대한 점은 우리 모두 언젠가는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진다는 것입니다.” (VK)
- 글
- REBECCA MEAD
- 사진
- NWAKA OKPARAE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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