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의 언어로 풀어낸 꽃과 숨결, 봄
꽃의 숨결을 향기의 언어로 풀어낸, 논픽션과 두 거장 조향사의 미학적 여정.

보이지 않는 언어, 향기는 말없이 다가와 우리의 감각을 일깨운다. 때로는 문득 잊고 있던 기억의 문을 열어준다. 이 섬세한 언어를 해석하고 풀어내는 일은 논픽션이 추구하는 본질적 철학이자 그들만의 특별한 재능이다.
봄의 문턱에서 논픽션은 전설적인 두 조향사와 손을 잡았다. 모리스 루셀(Maurice Roucel)과 도미니크 로피옹(Dominique Ropion)은 장미, 와일드 플라워, 아이리스, 일랑일랑 네 가지 꽃의 본질을 담아낸 플로럴 오 드 퍼퓸, ‘플라워 컬렉션’을 선보인다. 논픽션이 만드는 플로럴 향수는 과연 어떤 느낌일까.
두 거장의 비전은 원물의 본질과 특성을 탁월하게 품어낸 LMR과 메종 로티에 1975의 향료를 통해 완성됐다. 네 개의 신작은 저마다 개성을 지니면서도 논픽션이라는 하나의 서사 아래 조화를 이룬다. 기억과 감정을 담은 스토리텔링, 혹은 섬세한 탐구로 발굴하는 본질의 미학. 꽃에서 영감을 발견하는 순간부터 최상의 향료를 엄선하고 플로럴 향기에 스토리텔링을 엮어내는 과정까지, 풍부한 상상력과 정교한 탐구를 넘나드는 두 마스터 퍼퓨머의 여정에 <보그>가 동행했다.
by MAURICE ROUCEL
“꽃은 가장 순수한 형태의 감정을 표현합니다. 기억, 무드, 감성을 즉각적으로 자아내는 힘이 있어요.” 모리스 루셀의 말이다. “꽃마다 개성이 있고,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도 다르죠. 어떤 꽃은 부드럽고 투명한 반면, 어떤 꽃은 화사하고 자극적입니다.” 그는 장미와 와일드 플라워를 매개로 ‘더 로즈(The Rose)’와 ‘영 메모리즈(Young Memories)’에 감성적 내러티브를 불어넣었다. ‘더 로즈’는 장미가 꽃 피우는 순간을 향으로 포착했다. 생기 넘치는 로즈 앱솔루트가 제라늄과 레드베리와 교차하며 묘한 조화를 이루고, 샌들우드 앱솔루트와 머스크가 따스한 온기를 더해 장미의 촉감까지 섬세하게 표현한다. ‘영 메모리즈’는 들판을 가로지르고 자연에서 뛰어놀던 어린 시절 봄날의 기억을 담았다. 민트와 바질의 청량함이 와일드 플라워의 활기와 어우러지며, 시더우드와 베티베르가 생동감을 더한다.
기존 플로럴 향수의 익숙한 매력에서 벗어나, 꽃의 예상치 못한 매력을 발굴했어요.
플로럴 향수는 흔히 부드러움, 섬세함 등의 키워드로 설명됩니다. 로맨틱하거나 경쾌한 성향도 있고요. 도발적일 수도 있는 꽃의 모습을 담아내고 싶었어요. 기존 플로럴 노트를 해체하고 하나씩 다시 쌓아 올림으로써 자연스럽고 전형적이지 않은 꽃향기를 만들자는 의도가 있었죠. 장미가 가진 모든 면모를 끌어내고 싶었어요. 꽃잎의 싱그러움, 시트러스만큼 밝은 꽃잎, 그리고 꿀처럼 달콤하면서도 약간 스파이시한 로즈 앱솔루트를 표현했습니다. 와일드 플라워는 섬세하거나 지나치게 달콤한 느낌보다는 초록빛 잎사귀의 싱그러움, 햇빛을 받은 야생적인 모습을 담아냈어요.
장미는 수천 년의 향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자 원료죠. ‘더 로즈’는 만발한 장미 부케가 연상되는 향기예요. 영감은 어디서 출발했나요?
꽃이 피어나는 과정에서 영감을 받아, 질감이 느껴지는 장미 향을 만들었어요. 이슬을 머금은 신선함부터 깊은 향까지 모두 담았죠. 아프로디테, 사랑과 열정에서 태어난 장미의 전설 같은 신화적 요소도 반영했고요. 사랑과 열정에서 피어난 장미처럼 관능적이고 우아하며 시대를 초월한 아름다움을 표현하고자 했답니다.
어린 시절을 통틀어 기억에 가장 강렬하게 남은 꽃향기는 무엇인가요?
수선화 향을 처음 맡던 때가 떠오르는군요. 제가 좋아하는 꽃 중 하나죠. 장미가 ‘꽃의 여왕’이라면, 수선화는 ‘꽃의 황후’라고 부르고 싶을 정도예요. 매우 섬세하고 새로우면서도 풀잎 같은 초록 향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있죠. 샤넬에서 일할 때 오베르뉴 지방의 라르작(Larzac) 고원을 걷다가 수선화 들판을 지나게 되었어요. 공기를 가득 채운 그 향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했고, 순간 이 향을 언젠가 향수에 담고 싶다는 생각을 했죠.
향기는 기억을 끄집어내는 특별한 힘이 있죠. ‘플라워 컬렉션’을 통해 어떤 추억을 되돌아봤나요? 특히 ‘영 메모리즈’라는 이름에서도 느껴지는 시간 여행의 목적지가 궁금해요.
‘더 로즈’는 한 아름의 장미 부케에 얼굴을 파묻은 듯한 감각을 선물하고 싶었어요. ‘영 메모리즈’는 끝없이 펼쳐진 들판을 맨발로 달리던 순간을 담고 싶었고요. 피부에 와닿는 햇살, 바람에 실려오는 자연의 향기를 온전히 느끼던 그 순간이요. 와일드 플라워는 온실에서 자란 연약한 꽃과는 달라요. 거칠고 야생적이며, 태양 아래서 생명력을 가득 머금은 존재죠. ‘영 메모리즈’에서는 그 본질을 지키고 싶었어요. 달콤하고 부드럽게 표현하기보다는 민트와 바질의 생기 넘치는 청량함으로 원초적인 에너지를 강조했죠. 우리 모두의 봄여름을 닮은 향이에요.
최초의 후각적 기억은 무엇인가요?
대부분 자연에서 온 것들이에요. 시골의 푸른 내음, 바다의 짭조름한 공기, 해변의 투명한 바람, 햇살에 따스하게 데워진 모래 등이죠. 그런데 제 인생의 진정한 ‘프루스트의 마들렌’을 꼽는다면 1954년에 출시된 오리지널 ‘앙브르 솔레르(Ambre Solaire)’ 향기나, 어렸을 적 살던 동네 감자튀김 가게의 달콤하고 기름진 냄새가 아닐까 싶어요. 향수와 관련된 기억은 따로 있어요. 열다섯 살 무렵에 디올 ‘오 소바쥬(Eau Sauvage)’를 처음 맡았을 때의 전율은 지금도 잊지 못해요. 할머니가 쓰시던 부르조아의 ‘스와르 드 파리(Soir de Paris)’도 잊을 수 없고요. 그 오리지널 포뮬러는 사라졌지만, 향기는 제 감각의 일부가 된 것 같아요. 열아홉 살 무렵에 맡은 겔랑의 ‘아비 루즈(Habit Rouge)’가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죠. 수많은 향이 기억 속에 자리하고 있어요.
일상에서 즐기는 향 가운데 좋아하는 것은 뭔가요?
단 하나의 향을 고르긴 어렵지만, 빵이나 가공육처럼 식욕을 자극하는 구르망 계열 향을 좋아해요. 요리 중 퍼지는 다양한 냄새도 즐기고요. 꽃향기처럼 섬세하게 감정을 건드리는 향은 깊은 울림을 주죠.
작업실에서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물건은?
포뮬러 공식을 적는 수첩과 펜!
하나의 향수를 만들기 위해 테스트를 계속하다 완성됐다고 확신하는 순간은 언제인가요?
매번 좀 더 나아질 것 같은 유혹이 있어요. 향수는 끝없이 수정이 가능하니까요. 하지만 결국 ‘이제 됐다’는 결정을 내릴 수 있을 때입니다. 더 이상 손대지 않아도 충분하다는 확신이 들 때, 비로소 향수가 완성되는 거죠.
by DOMINIQUE ROPION
도미니크 로피옹은 ‘아이리스 콘크리트(Iris Concrete)’와 ‘브와 드 일랑(Bois d’Ylang)’을 통해 꽃의 근원적 아름다움에 천착했다. “꽃은 무한한 영감의 원천이죠. 꽃이 품은 다면성이 풍성할수록 훌륭한 향기의 원료가 됩니다.” 그의 철학이 담긴 ‘아이리스 콘크리트’는 다층적인 아이리스의 깊이를 암브레트 시드로 단단히 구현해냈다. 갈바넘의 씁쓸한 뉘앙스가 고급스러운 깊이감을 선사하고, 시더우드와 아이리스의 파우더리함이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브와 드 일랑’은 일랑일랑의 매혹적인 특성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 일랑일랑의 짙은 이국적인 향이 투베로즈 앱솔루트의 풍부함과 만나고, 샌들우드와 블론드우드의 부드러운 잔향이 여운을 남긴다.
고귀한 아이리스와 관능적인 일랑일랑은 다소 상반된 느낌이에요. 이 둘을 고른 이유가 궁금하군요.
두 꽃은 예측할 수 없을 만큼 신비로운 면모를 품고 있어요. 현대 조향에서 상대적으로 잘 사용하지 않은 꽃이지만 아이리스와 일랑일랑은 제 감각과 가장 깊숙이 공명하는 향이죠. 아이러니하게도 조향 훈련 시절, 두 꽃은 너무 낯선 향이었어요. 후각적 기억이 없는 소재였기에, 오히려 성인이 된 후에야 비로소 점진적으로 그 매력을 발견하게 되었고요. 두 꽃의 숨겨진 측면을 재조명하고, 섬세한 결을 향으로 풀어내는 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익숙하면서도 새롭게 느껴지는 향을 만드는 게 목표였죠.
아이리스는 추출이 까다로운 원료죠. ‘아이리스 콘크리트’를 위해 특별히 고른 원료에 대해 알려주세요.
이번 컬렉션엔 IFF사 LMR 연구소에서 탄생한 최고 품질의 아이리스를 사용했어요. 풍성한 플로럴 뉘앙스에 더해진 파우더리한 노트가 인상적이죠. 동시에 드라이한 우디 노트도 가지고 있어요. 나무뿌리같이 진한 향에, 은은하게 달콤한 캐러멜 노트가 어우러져 있습니다. 다채로운 면모에 깊이감 있는 표현까지 가능한 특별한 원료예요.
‘플라워 컬렉션’을 창조하면서 어느 단계에 시간을 가장 많이 투자했나요?
서로 다른 노트 사이의 완벽한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에 향료가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지점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조정하고 실험했죠. 완벽한 균형을 가진 향수는 단순히 좋은 냄새를 넘어 가장 풍부한 후각적, 감정적인 경험을 선사하니까요.
작업에 영감을 주는 예술품이나 아티스트가 있나요?
건축에 관심이 많아요. 형태와 기능,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건축에서 늘 영감을 얻습니다. 언어와 시에도 애정이 깊은데, 특히 운율이나 중의적인 의미를 지닌 시어에 자주 매료되죠. 최근에는 논픽션, 구정아 작가와 함께 베니스 비엔날레의 한국관 전시 <구정아-오도라마 시티>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기회를 가졌어요. 매우 뜻깊고 감사한 경험이었고, 작가의 시적이고 풍부한 세계관을 더 가까이 마주할 수 있어서 기억에 남아요.
조향 감각을 어떻게 훈련하나요?
늘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새로운 음식을 맛보거나, 음악을 듣고, 예술품을 감상하는 것과 같이 다른 감각을 자극하는 활동을 주로 해요.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향을 고른다면요.
단 하나만 고르기는 절대 불가능하죠! 장미, 수선화, 아이리스, 투베로즈와 같이 가장 기본적이라 여겨지는 꽃향기에 특별한 애정이 있습니다. 하나의 꽃에서 수천 가지 이야기를 끌어낼 수 있으니까요. 또 캐시메란 같은 합성원료도 좋아해요. 복합적이고 다면적인 캐릭터가 큰 매력이라고 할 수 있죠.
향수 창작 과정에서 어느 단계가 가장 중요할까요?
많은 사람이 간과하는 중요한 과정으로 향수 숙성 단계를 꼽을 수 있어요. 와인처럼, 향수도 시간이 필요합니다. 서로 다른 원료가 균형을 맞추며 자리 잡아 조화로운 향으로 통합되는 시간이죠. 그 과정 없이는 아무리 좋은 원료를 조합해도 깊이 있고 균형 잡힌 향을 완성할 수 없어요.
자연에선 찾을 수 없지만, 향수로 재현하고 싶은 향이 있나요?
언젠가 ‘비의 향’을 구현해보고 싶어요. 흙 내음이 섞인 빗방울, 숲속을 적시는 부드러운 비처럼, 자연원료로는 추출할 수 없지만 독특하고 감성적인 경험을 전달할 수 있는 향이죠. 상상만 해도 벌써부터 신이 나네요.
한국의 향수 시장을 평가한다면요?
최근 몇 년간 한국은 예술, 디자인, 음악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어요. 그런 선구적이고 창의적인 에너지가 향수 시장에도 흐르고 있다고 느껴요. 과거에는 가볍고 깨끗한, 자연에서 영감을 받은 향수가 주류였다면, 이제 대담하고 복합적인 포뮬러로 구성된 향에 대해 관심이 높아지고 있어요. 이 같은 변화는 한국 시장의 역동적이고 혁신적인 정신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 같아요. 후각 경험의 경계를 확장해나가는 모습이 흥미로워요. 저와 논픽션이 그 일부가 될 수 있어 영광이고요. (VK)
- 컨트리뷰팅 에디터
- 우주연
- COURTESY OF
- NONFI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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