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넬 11.12 백, 클래식은 어떻게 탄생하나
시간을 재단하고 기억을 꿰매는 일, 클래식의 영원한 탄생을 지켜봤다.


2024년 샤넬의 하이 주얼리 이벤트에 참석하기 위해 모나코를 방문한 적 있다. 모나코의 샤넬 스토어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던 내게 어느 선배가 이렇게 조언했다. “샤넬에서 뭔가를 사고 싶다면 가방 혹은 트위드 재킷이지. 가방 중에서는 단연 클래식이니까. 평생이 아니라 대를 물려서 사용한다는 게 뭔지 알게 될 거야.” 누구보다 샤넬이란 브랜드에 대한 지식이 해박하며 이미 샤넬 제품을 여러 개 구입한 사람의 경험에서 비롯된 말이니 믿을 만했다. 물론 당장 살 수는 없었지만, 그 이야기는 내게 어떤 기준이 됐다.
그리고 1년 후 쇼핑의 본격적 트리거가 될 기회가 찾아왔다. (본래 쇼핑에서 필요한 건 세 가지, 계기와 합리화, 통장 잔고다.) 파리 북부 ‘우아즈(Oise)’ 지역의 샤넬 가방 공방에 초대받은 것이다. 여러 채의 아기자기한 집과 좁은 길이 구불구불 뻗은 한적한 마을 사이로 한참을 가다 보면 갑자기 미래적인 사각형 건물이 등장한다. 캉봉가 샤넬 스튜디오의 아이디어를 현실로 만들어주는 곳, 샤넬의 가방이 탄생하는 ‘베르뇌유 앙 알라트 아틀리에(Les Ateliers de Verneuil-en-Halatte, 베르뇌유)’다. 베르뇌유에서는 연간 8개에 달하는 샤넬 컬렉션을 비롯해 여러 컬렉션을 선보이지만 핵심적인 제품은 역시 11.12 백이다. 11.12 백을 만들기 위해서는 약 180단계가 필요하다. 열정을 갖고 40년 넘게 샤넬 가방을 제작하면서 쌓인 노하우를 경험하게 해주겠다면서 베르뇌유 아틀리에의 디렉터가 우리에게 가장 먼저 보여준 것은 1955년 가브리엘 샤넬이 처음 제작한 2.55 백이었다. 매우 적절한 선택이었다.
클러치나 핸드백 위주의 가방만 존재하던 시절, 숄더 체인을 처음 접목해 여성의 손에 자유를 허한 그 전설적 가방은 11.12 백의 전신이다. 2.55 백과 11.12 백은 샤넬 특유의 다이아몬드 모양 누비 패턴인 ‘마틀라세(Matelassé)’ 퀼팅이나 전체적인 모양뿐 아니라 정신이 닮아 있다. 바늘과 실로 소재를 다루고, 재봉으로 입체적인 형태를 완성하며, 안에서부터 옷의 구조를 고민해 겉으로 드러내는 방식과 철학 말이다. 샤넬이 이 백을 ‘꾸뛰리에의 가방’이라고 부르는 것도 과장은 아니다.
절대적으로 미감을 중시한 하얀 복도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첫 번째로 도착한 방에는 가죽과 리본, 실 등이 가득했다. “소재를 고르고, 개발하고, 보관하는 곳이에요. 1,500개가 넘는 가죽과 900개가 넘는 리본이 있죠.” 베르뇌유 아틀리에의 디렉터가 놀라는 내게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11.12 백을 만드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장 아름다운 소재를 선택하는 거예요.” 그들이 말하는 아름다운 소재가 되기 위해서는 아주 까다로운 심사를 거쳐야 한다.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의 태너리(Tannery, 가죽을 생산하는 작업장)에서 가져온 최고급 가죽을 두고 정확하게 샤넬이 원하는 컬러가 맞는지, 두께는 일정한지, 아주 작은 구멍은 없는지, 촉감이나 주름 정도, 질감은 어떤지, 작업하기는 수월한지 등 확인 작업을 끊임없이 거친다. 무작위로 여기저기 두께를 재고 손으로 모든 부분을 팽팽하게 당겨보면서 체크하는데, 이건 단순히 오점을 찾는 것뿐 아니라 이 가죽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부분을 찾기 위함이다. “보통은 가운데 부분이 가장 아름다워요.” 가죽 퀄리티 담당자가 내게 가죽을 직접 만져보라고 권했다. “가운데는 확실히 부드럽죠?” 분명히 그렇긴 했지만, 미세한 차이였다. 역시 클래식은 디테일이 가장 중요하다는 걸 손끝으로 체감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선별된 완벽한 가죽은 재단 단계로 이동한다. 11.12 백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는 20개의 가죽 조각이 필요하고 그만큼 정밀한 재단은 필수적이다. 재단실에는 커다란 기계 하나가 놓여 있었다. 과거에는 포르투갈에서 신발을 만들었다는 재단사가 기계에 가죽을 넣기 전 또 한 번 가죽 상태를 체크한다. 그리고 가죽을 기계 위에 완전히 평평하게 펼쳐놓으면, 레이저 패턴이 가죽 위에 투사되고 순식간에 정교한 재단이 이루어진다. 샤넬은 2018년 이후 악어, 도마뱀, 뱀 등 이그조틱 가죽과 모피 사용을 금지해왔다. 윤리적 기준에 부합하는 고품질 이그조틱 가죽을 조달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11.12 백의 소가죽과 양가죽 역시 육류 소비를 위해 도축한 동물의 가죽만 사용하고 있다. 이그조틱 가죽은 특성상 수작업이 필요한 경우가 많고 지금도 여전히 트위드처럼 소재에 따라 손으로 재단하지만, 소가죽과 양가죽은 표면이 매끄러워 레이저를 활용한 재단이 훨씬 정밀하고 효율적이다. 실패 확률이 현저히 줄고 자투리 가죽을 재활용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이렇게 남은 가죽 조각은 잘게 빻고 압축해 단단한 가죽 소재로 다시 탄생하고 프로토타입 제작이나 슬링백 힐 굽 등에 활용된다.
베르뇌유 아틀리에에는 아름답게 해가 든다. 이 공방을 건축할 때 가장 중요하게 고려한 것도 햇빛이다. 이곳엔 총 470명의 직원이 근무 중인데, 그중 300명의 장인들은 건물의 맨 위층, 자연광이 가득한 작업실에서 일하고 있었다. 문득 10여 년 전, 애플워치의 신제품 키노트를 보기 위해 미국 애플 본사를 방문한 기억이 떠올랐다. 무성한 초록 숲에 둘러싸인 눈부시게 하얀 건물 안에서, 놀라울 만큼 좋은 채광 아래 무언가를 비밀스럽고 치밀하게 만들어내는 느낌.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자부심이 그대로 전해졌다. 그리고 흥미로운 것은 모든 장인이 자신을 소개할 때 ‘이곳에서 일한 시간’을 꼭 함께 말한다는 것이다. 가죽에 열을 가해 볼륨감 있는 형태를 만들어내는 장인은 이곳에서 5년, 재단사는 15년째 이 공방에서 일하고 있었다. 공방 투어의 하이라이트인 맨 위층 작업실을 함께 둘러본 장인은 무려 38년 경력자였고, 어느 책상에는 3년부터 41년 경력의 장인 네 명이 둘러앉아 자연스럽게 기술을 전수하고 있었다. 결국 베르뇌유는 단순한 작업장 이상의, 한 세대를 다음 세대로 이어주는 학교이자 공동체였다.
11.12 백이 완성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분명 하나하나 놀라운 경험이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건 안에서 꿰매고 뒤집는 방식의 봉제를 뜻하는 ‘피케 르투르네(Piqué-retourné)’였다. 2.55 백은 1955년 당시 장갑에 사용하던 부드러운 양가죽을 가방에 적용한 최초의 예다. 그 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은 11.12 백 역시 소재는 물론이고 제작 기법 또한 패션에서 유래했다. 그 지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피케 르투르네다. 입체감 있는 표현과 겉면에 스티치가 보이지 않는 매끄러운 마감, 안감도 겉면처럼 아름다워야 한다는 꾸뛰리에의 철학을 가방에도 그대로 접목한 것이다. 승마에서 영감을 얻은 마틀라세 퀼팅이 끝나면, 모든 가죽을 바느질로 정교하게 연결한 후 41년 경력의 장인이 가방을 뒤집는다. (그 작업대에서 가장 많은 경력을 자랑하는 장인의 몫이었다.) 매끈한 가죽뿐 아니라 트위드 소재나 비즈가 잔뜩 박힌 가방 역시 같은 작업 과정을 거친다. 오랜 내공이 쌓인 장인의 손길로 가방을 뒤집자, 우리가 아는 11.12 백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 과정이 어찌나 신속하고 정확한지 숭고하다는 인상마저 받았다.
마지막 과정은 가방 체인을 만드는 일이었다. “가죽 스트랩 두 줄을 동일하게 반으로 접어 이 체인 안에 엮으면 됩니다.” 체인을 전담하는 장인이 내게도 방법을 알려주었다. 장인이 빠르고 쉽게 가죽 체인을 완성해나가는 모습을 보고 잠시 자신감을 가졌지만 내가 만든 체인은 엉망이었다. “검지를 잘 활용해야 해요. 두 줄이 서로 꼬이지 않아야 하거든요. 힘 조절을 잘못하면 금세 울퉁불퉁해집니다.” 장인은 친절하게 조곤조곤 가르쳐주었지만 내 손가락은 둔하기만 했다. 그 작업을 왜 38년 경력의 장인에게 맡기는지 단번에 이해했다.
이 모든 과정을 거치면 마지막 퀄리티 체크가 이뤄진다. 가죽 오염이나 손상 여부, 마틀라세 퀼팅 마름모꼴의 정확도(마틀라세 마름모 스티치의 간격이 가품을 구별하는 첫 번째 기준이라고 한다), 완벽한 대칭과 가방의 흔들림 같은 균형과 안정성까지, 모든 부분을 세밀하게 들여다본다. 처음 가죽을 고를 때부터 완성 단계까지 정말 수백 번 점검이 반복된다.
내게 베르뇌유 아틀리에는 패셔너블한 호그와트 같았다. 방문을 열 때마다 새로운 풍경이 펼쳐졌다. 어느 방에서는 실험이 한창이었다. 인공적으로 눈비가 내리거나 바람이 부는 환경을 만들어놓고 가방이 다양한 조건에서 견딜 수 있는지 내구성을 테스트하고 있었고, 다른 방에서는 다음 컬렉션을 위한 가방 제작이 한창이었다. 또 다른 방에는 오래된 가방이 가득했다. 고객이 오랜 시간 샤넬 제품을 즐길 수 있도록, 평생에 걸쳐 제품을 지속적으로 케어하는 ‘샤넬 에 므와(Chanel & Moi)’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내 가방이 떠올랐다. 대학 입학 때 아빠에게 선물 받은 나의 첫 번째 샤넬 백. 무엇보다 의미 있는 물건이라 지금까지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지만 꽤 낡아서, 당장 가져와 관리를 부탁하고 싶었다.
이번 베르뇌유 아틀리에 투어는 2025년 가을/겨울 패션 위크가 막 끝난 다음 날 이루어졌다. 이번 시즌 내내 편집장과 후배 에디터 두 명이 함께 움직였는데, 어느 쇼장을 나서는 길에 편집장이 우리에게 이런 말을 했다. “패션은 보이는 게 중요해.” 패션은 결국 직관적이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베르뇌유 아틀리에에서 11.12 백의 모든 것을 보고 온 나의 감상도 마찬가지다. 11.12 백은 직관적으로나 다면적으로나 아름다웠다. 겉으로 보이는 것만큼 안쪽도, 과정도, 의미 역시 그랬다. 그래서 오래 보고, 오래 들고, 오래 기억하게 된다. (VK)
- 디지털 디렉터
- 권민지
- 사진
- COURTESY OF CHANEL
- SPONSORED BY
- CHAN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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