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istopher Bailey
크리스토퍼 베일리는 스스로를 행운아라 말했다. 하지만 15년 동안 버버리를 이끌어올 수 있었던 건 운이 좋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서울을 찾은 자상한 영국 신사가 들려주는 행운과 행복 그리고 미래에 관한 따뜻한 소감.
서울 청담사거리에 자리한 버버리 플래그십 스토어. 이른 아침부터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전날 밤 매장에서 열린 160주년 기념 파티 덕분에 겨우 3시간밖에 못 잤다는 홍보 팀 직원이 마중을 나왔다. “지금 크리스토퍼 베일리가 한국 직원들과 워크숍을 하고 있어요.” 버버리의 속사정이 궁금한 마음에 잠시 4층 난간에 기댄 채 베일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희미하게나마 행운, 행복, 미래 등의 단어가 들리는 듯했다. 나는 외부인을 경계하는 직원의 눈초리에 촬영을 준비하는 척 몸을 움직였다. 그 와중에도 한 층 아래에서 웃음소리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머릿속엔 베일리가 강조한 단어들이 맴돌았다. 행운, 행복, 미래.
크리스토퍼 베일리가 그려온 성공의 궤적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영국 북동부 시골 출신 소년은 처음부터 패션을 꿈꾸진 않았다. “저는 다른 디자이너들처럼 다섯 살에 패션 디자이너가 되겠다고 다짐하진 않았어요.” 오히려 런던에서의 삶을 꿈꾸며 자랐다고 나에게 털어놓았다. 그리고 패션은 그 꿈을 이룰 수 있는 좋은 도구였다고 덧붙였다. 다행히 목수 아버지와 막스앤스펜서에서 일하던 어머니는 아들의 결정을 기꺼이 존중해줬다.
생각지 못한 행운은 갑자기 찾아왔다. 그가 다니던 런던 왕립예술학교를 방문한 도나 카란을 만난 게 결정적인 계기였다. 이 맨해튼 패션 여왕은 수줍음 많은 소년이 디자인한 옷을 직접 입어보기 위해 자신이 입고 있던 옷을 기꺼이 벗어 던졌다. “그녀와 인사한 뒤 3분 만의 일이었어요. 그 순간 ‘패션’이란 세상이 얼마나 신기하고, 흥미로운 곳인지 깨달았죠.” 당연히 그는 졸업과 동시에 뉴욕으로 스카우트됐다.
러브콜이 온 건 2년 뒤. 이번엔 밀라노였다. 당시 패션계를 호령하던 톰 포드가 이 얌전한 영국 청년에 대한 소문을 들었던 것이다. 비록 자신의 스타일과 달랐지만, 정점에 오른 디자이너의 손길을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아주 어두운 회의실에서 면접을 위해 만난 미스터 포드는 단번에 이 어린 디자이너를 유혹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베일리는 성공의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만약 진짜 원한다면 뭐든 이룰 수 있다고 믿게 됐습니다.”
인생의 전환점을 다시 마주친 건 2000년 겨울, 밀라노의 그랜드 호텔이었다. 그곳에서 베일리를 기다리던 인물은 당시 버버리 CEO였던 로즈 마리 브라보. 145세의 브랜드를 완전히 바꾸고 싶었던 브라보는 구찌에서 일하는 영국 청년을 만나기로 약속했다. “청바지에 화이트 셔츠, 블레이저를 걸치고 걸어 들어오는 그 모습은 스물아홉이 아니라, 열아홉 살처럼 보였어요.” 브라보는 베일리가 걸어오는 모습만 보고도, 버버리의 새 얼굴로 그를 낙점했다고 떠올렸다. “말 한 마디 하지 않았지만, 그가 옳은 선택이란 걸 알았어요.” 서른 명이 넘는 다른 후보들을 만났지만, 그녀의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 결심 덕분에 베일리와 버버리가 같은 운명의 배를 탈 수 있게 된 셈이다.
다시 청담동의 버버리 플래그십 스토어. 나는 5층에 자리한 VIP 룸에서 크리스토퍼 베일리와 마주 앉았다. 그곳에선 그가 직접 선택한 어쿠스틱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방 한쪽에는 그가 디자인한 남성용 코트가 걸려 있었다. 아마 참나무로 마무리한 벽도, 은은하게 빛나는 대리석 바닥도, 살짝 마음을 풀어놓는 은은한 조명도 모두 베일리를 거쳤을 것이다. 그는 버버리를 떠받드는 촘촘한 그물 같다. “모든 작업은 저를 통합니다.” 그 일의 방대함이란 상상하기 쉽지 않다. “훌륭한 팀과 함께 합니다. 그들이 제 비전을 이해하고 있다면 그렇게 어려운 과정이 아니죠.”
한때 패션 디자이너라는 직함은 한정적 일을 의미했다. “훌륭한 코트 한 벌을 디자인하거나, 근사한 백을 디자인하면 퇴근할 수 있었어요.” 이제 베일리에게 주어진 일은 모든 경계를 뛰어넘는다. “예를 들어 저 코트를 볼까요?” 방에 들어오는 순간 눈에 띄던 그 코트로 눈길을 돌렸다. “저 옷걸이, 바닥, 벽, 조명, 그리고 지금 이 음악까지. 이 모든 게 있어야 저 코트가 ‘저 코트’일 수 있어요. 저는 버버리가 선보이는 제품이 존재하는 맥락을 창조해내야만 합니다.” 그러한 배경을 완성하기 위해선 헌신적 태도를 필요로 한다. “압도적이지만 동시에 매우 신나는 일입니다. 일이많을수록 새 에너지가 생깁니다.” 해결해야 하는 문제와 도전해야 할 과제 앞에서 그는 좌절하는 법이 없다. “왠지 아세요? 절대 만족하지 못하거든요.”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말투로 스스로를 만족 불감증이라 말하는 남자를 바라보는 건 기묘한 경험이다. 그는 일에 중독된 전형적인 워커홀릭일까? 혹은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데에 쾌감을 느끼는 건 아닐까? 어쩌면 두 가지 모두 해당될지 모르겠다. “세상은 계속 움직입니다. 한 가지 일을 끝냈다고 마음을 놓고 있어선 안 됩니다. 함께 움직여야 하죠.” 사실 누구나 익숙한 것을 좋아한다. 익숙하다는 건 곧 편안하다는 걸 뜻한다. 베일리는 그런 안락함을 참을 수 없다. “익숙해지는 순간 변화를 줘야 합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렌즈가 필요하다고 스스로 주문을 걸죠. 모든 건 편안한 틀을 깨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한국에서 유행하는 “이불 밖은 위험해”라는 표현에 대해 들려주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저도 그 마음을 이해해요. 물론 저도 변화는 무서워요. 특히 뿌리 깊은 곳부터 바뀌어야 하는 변화라면 계속해서 의문이 들기도 하죠.”
패션 디자이너 출신이 CCO(치프 크리에이티브 오피서)와 CEO를 겸직하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다. 덕분에 그는 새 구두 디자인은 물론 회사 재정 상태까지 고민해야 했다. “언젠가부터 스스로를 불편하게 하는게 편해졌어요. 살짝 상처받기 쉬운 상태로 스스로를 몰아넣으면 오히려 자신감이 생겨요. 이상하게 들리나요?” 다가오는 7월 그는 스스로를 또 새로운 환경에 던져 넣어야 한다. 셀린을 부활시킨 마르코 코베티에게 CEO 자리를 물러주고, ‘프레지던트’라는 이름을 달게 될 예정이니까. “모든 일을 옳고 그름의 기준으로 바라보면, 익숙한 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어요. 본능을 믿고 움직여야 해요.”
15년 전 처음 버버리에 들어섰을 때 베일리를 흥분시킨 것도 바로 그런 점이었다. 아름다운 역사를 지닌 브랜드가 시대를 좇아가지 못하고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창립자 토머스 버버리는 모험가이자 발명가 그리고 크리에이티브한 디자이너였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해요. 당시 버버리는 그 모든 DNA를 잃어버린 상태였어요.” 그는 버버리라는 보석이 빛날 수 있도록 모든 면을 갈고닦아야 했다. 라이선스 비즈니스는 모두 사라졌고(“더 이상 버버리 로고의 수건은 없죠.”), 프로섬 컬렉션을 통해 패션 브랜드로서의 매력을 되살렸다. 클래식한 버버리의 멋을 보여주는 동시에 새로운 멋을 강조했다. 이 모든 건 버버리가 지닌 특유의 영국적 태도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그는 진 캠벨이 표지에 등장한 지난해 12월 <보그 코리아> 커버를 들어 보였다. “진을 예로 들어볼까요? 아주 클래식한 아름다움을 지녔지만, 얼핏 보면 살짝 불손하고 반항적이죠. 어딘가 어긋난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금욕적이고 엄격해서 빅토리아 시대의 느낌을 주기도 해요. 제가 원하는 버버리는 그런 영국적 태도를 지녀야 했어요.”
변화에 대한 베일리의 집착 덕분에 달라진 건 버버리의 외양만이 아니다. 우리가 버버리를 만나는 방법도 완전히 바뀌었다. 우리는 단순히 트렌치 코트를 사기 위해 버버리를 찾지 않는다. 유튜브에서는 버버리가 완성한 단편영화를 관람하고, 애플 뮤직에서는 버버리가 추천하는 플레이리스트를 찾아 듣는다. 스마트폰을 통해 런던에서 열리는 쇼를 실시간으로 지켜보는가 하면, 패션쇼 무대에 올라오자마자 매장으로 달려가 쇼핑할 수도 있다. 이 모든 변화는 누구보다 먼저 테크놀로지를 받아들이는 데에 거침없는 베일리의 결정 덕분이다. “할아버지는 전기 기술자였어요. 그분은 늘 새로운 기술과 기계에 집착하셨죠. 그 성격을 제가 물려받았나 봅니다.”
패션과 테크놀로지의 만남에 집착하는 건 단순히 유전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저는 두 눈을 크게 뜨고 살아갑니다.” 유난한 선언적 말투에 놀라 그 의미에 대해 내가 되묻자, 한참 고민하던 그가 천천히 답했다. “지난 15년 사이에 우리의 삶은 송두리째 바뀌었어요. 그런데 우리가 일하는 방식이 바뀌지 않는다는 건 모순 아닐까요?” 9년 전 처음 인터넷으로 패션쇼를 생중계하고, 런웨이에 오른 의상을 바로 예약 주문할 수 있도록 모험을 감행한 것도 버버리였다. 익숙한 시즌 시스템에서 벗어나 ‘See Now, Buy Now’에 맨 먼저 도전한 것도 마찬가지다. 그의 결정으로 인해 우리는 영국 조각가 헨리 무어에서 영감을 받은 새 컬렉션이 2월 20일 런던 패션 위크에 오르자마자 바로 손에 넣을 수 있게 됐다.
“사람들의 의심 어린 눈초리를 기억해요. 럭셔리 패션 컴퍼니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했죠. 하지만 그건 곧 우리가 이토록 열심히 일하는 목적에 모순되는 것 아닌가요? 우리 모두 많은 사람과 함께 패션을 즐기려고 일하잖아요.” 논란을 불러일으키고자 한 건 아니었지만, 이런 결정은 패션계 전체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러나 정작 그 파도를 일으키기 시작한 주인공은 태연했다. “고객은 우리가 제작 시스템을 바꾼다 해도 신경 쓰지 않아요. 고객이 바라는 건 아름다운 뭔가를 보고, 새로운 감정을 느끼는 거니까요.”
이렇게 보면 끊임없이 미래를 향해 돌진할 것만 같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과거지향적 성향을 지녔다. “노스탤지어에 빠지지 않는다는 사람들 중에 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있을까요? 노스탤지어는 곧 추억을 지닌다는 걸 의미하는걸요. 아무런 추억도 없는 사람이 어떻게 미래를 꿈꾸겠어요.” 그가 스스로를 규정하는 몇 가지 단어 중에는 ‘로맨틱’ ‘긍정적’ ‘행복’도 있다. 그 뿌리는 어린 시절에서 비롯된다. “부모님은 제게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았어요. 그저 제가 행복하고, 만족하는 삶을 살기를 바랐죠. 덕분에 많은 걸 느끼고, 꿈꾸고, 그리며 성장했습니다. 다행히 그것이 제 직업이 됐어요. 운이 좋았죠.”
행운은 그가 가장 많이 사용한 단어 중 하나였다. 패션을 통해 어린 시절 꿈꾸던 음악, 건축, 영화 등 다양한 분야를 경험할 수 있는 것도, 특별한 ‘커리어 플랜’이나 야망이 없이도 그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 역시 모두 운이 좋았다. 그가 요즘 가장 감사한 건 두 딸이다(남편 사이먼 우즈와 함께 키우는 세 살배기 첫째 아이와 인터뷰 직전 막 돌을 지난 둘째 아이). “아이를 키운다는 건 정말 삶이 송두리째 바뀌는 경험이에요. 모든 것을 새롭게 돌아보게 합니다.” 그의 눈동자에 벅찬 감동이 솟아올랐다. “우리가 두 딸에게 선사하는 모든 경험이 영향을 끼칩니다. 그건 놀라운 경험이에요.”
- 에디터
- 손기호
- 포토그래퍼
- KIM HEE JUNE, COURTESY OF BURBER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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