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작품은
지난 10년 동안 한국에서 개봉한 신카이 마코토의 영화 가운데 관객 수 10만 명을 넘긴 작품이 한 편도 없는데 하물며 〈너의 이름은.〉이 300만이라니. 약속이라기보단 차라리 염원이었고 조금은 헛된 희망처럼 보였다. 그런데…
1 너의 약속이 지켜졌다
‘약속을 지켰다’는 문장 대신 ‘약속이 지켜졌다’고 수동형 문장을 쓴 이유는 처음부터 너 혼자 힘으로 지킬 수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만약 한국 관객 수가 300만을 넘기면 한 번 더 한국에 가겠습니다”라는 약속. 무려 300만 명의 도움이 필요한 그 약속.
너의 영화는 개봉 19일 만에 관객 수 300만을 넘겼다. 350만을 넘기는 데 걸린 시간은 31일, 딱 한 달이었다. “실사와 애니메이션을 포함한 역대 일본 영화의 한국 흥행 1위”라며 언론이 먼저 흥분했다. “<너의 이름은.>이 한국 관객들에게 이렇게 매력적으로 느껴진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약속대로 다시 한국을 찾은 너에게 공중파 뉴스 프로그램 앵커가 물었다. 너는 대답했다. “소년과 소녀가 만나서 강하게 이끌리는 매우 단순하고 보편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점이 어쩌면 한국 젊은이들의 공감을 샀을지도 모르겠습니다.”(SBS <나이트라인>, 2017년 2월 9일) ‘소년과 소녀가 만나서 강하게 이끌리는 매우 단순하고 보편적인 이야기’는 네가 늘상 해오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지금까진 왜? 그런데 이번에는 왜?
2 너는 게임 회사에 다녔다
“판타지 롤플레잉 게임을 만드는 회사에서 검과 마법의 세계만을 그리는” 사람이었다. “아침 6시에 일어나 양복 입고 만원 지하철로 출근해 다시 만원 지하철에 몸을 싣고 퇴근하는 생활”에 지친 너는 회사 생활 틈틈이 혼자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다. 니이츠 마코토라는 본명을 숨기고 신카이 마코토라는 예명으로 5분짜리 단편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1999)를 발표했다. “‘내가 살고 있는 세계’를 그리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검과 마법의 세계 말고) 아파트 계단이나 편의점 간판처럼 내가 현실에서 보는 것들이 나오는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 ‘내 일상을 스스로 긍정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허핑턴포스트재팬>, 2017년 1월 2일)
첫 작품이 호평 받자 너는 회사를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애니메이션에 매달렸다. 7개월 동안 죽을 힘을 다해 오직 혼자만의 힘으로 <별의 목소리>(2002)를 완성했다. “풍경과 빛을 사진에 가까운 정밀한 묘사로 재현하는 작화 스타일로 첫사랑, 고백, 엇갈림, 그리움 등의 멜로적 감성을 세밀하게 새겨 넣는” 이른바 ‘신카이 월드’의 탄생. 그때 미카코의 입을 빌려 너는 말했다. “있잖아. 난 말야, 노보루 군. 그리운 것이 너무 많아. 예를 들면 말야. 여름을 동반한 시원한 비, 가을바람의 내음, 우산에 떨어지는 빗방울, 봄 흙의 부드러움, 한밤중 편의점의 평온한 분위기, 방과 후의 서늘한 공기, 칠판지우개 냄새, 한밤에 트럭이 지나가는 소리, 그리고 소나기 내리는 아스팔트의 냄새 같은 것들.”(<별의 목소리> 중미카코의 대사) 내가 심드렁하게 보아 넘기는 일상의 풍경을 너는 ‘그리운 것’이라고 말했다. 그 흔해빠진 풍경이 너의 작품으로 인해 내게도 새삼스러워졌다. ‘그만하면 됐다’는 말의 뜻을 모르는 사람처럼 세밀한 묘사에 매달리는, 단지 잘 그린다는 느낌을 넘어 뭔가 필사적인 기운이 느껴지는, 너의 그림. 중력에 이끌려 궤도가 휘는 혜성처럼, <초속 5센티미터>(2007)를 지나 <언어의 정원>(2013)으로 이어지는 그 필사의 화풍에 이끌려 나는 너의 우주에 편입되었다. 삶도 풍경도 감정도 모든 것이 그저 초속 5센티미터의 속도로 움직이는 차분하고 섬세한 ‘신카이 월드’에 매혹되었다. 내 일상이 다 볼품없진 않고 내 청춘이 다 실패한 건 아니라는 너의 조용한 격려가 내겐 제법 힘이 되는 날들이었다.
3 너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에 정신없이 빠져든 고등학생”이었다
“이와이 슌지의 영화를 굉장히 좋아하는 팬”이기도 하다. 하루키와 쏷지. 두 사람의 감성이 너에게 창을 열어주었지만 동시에 벽에 가두기도 했다. “그래 봐야 늘 사춘기 감성의 맥 빠지는 연애담”이라는 비판이 뼈아픈 너. 뛰어난 ‘묘사’에 어울릴 힘 있는 ‘서사’가 더 간절해진 너. “<별을 쫓는 아이: 아가르타의 전설>(2011)을 만들기 시작할 즈음 이대로는 미래가 없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너는 고백했다. 몇 년 동안 시나리오 작법을 연구한 끝에 마침내 <너의 이름은.>을 구상했다. “<초속 5센티미터>가 시(詩)에 가까웠다면 이제야 제대로 된 소설과 같은 이야기”라고 말했다. 하지만 ‘소년과 소녀가 만나서 강하게 이끌리는 매우 단순하고 보편적인 이야기’로 쉽게 시작해놓고 끝을 어떻게 맺어야 할지 한참 고심했다. 왜냐하면, 왜냐하면 말이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 이전의 일본인은 ‘일본 사회는 이대로 계속 나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전에는 내 작품에서도 변하지 않는 일상에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있었다. 편의점에서 오고 가는 행동이나 너무 늦어버린 기차 같은 설정 말이다. 그렇게 사소한 일상에 풍부한 의미를 더하려 했다. 하지만 2011년 이후 그러한 전제는 무너졌다.”(<허핑턴포스트재팬>, 2017년 1월 2일)
그날 이후 모든 일본인이 “만약 내가 당신이라면…”의 말줄임표에 갇혔다. “만약 내가 그때 그곳에 있었다면?”의 물음표가 낚싯바늘처럼 가슴에 걸려 있다. 수많은 말줄임표에 묻어둔 상실의 슬픔과 커다란 물음표마다 매달린 재난의 공포. “시골 소녀 미츠하가 도쿄 소년 타키가 된다는 코믹한 이야기”로 시작해 “최종적으로는 도쿄의 타키가 ‘만약 내가 그 마을에 살고 있었다면’이라고 생각하는 이야기로 바뀌는” 스토리텔링의 힘이 거기서 나온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포기하지 말고 단 하나의 목숨이라도 되돌리고 붙들어야 한다’고 외치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었다”고 너는 말했다.
4 <너의 이름은.> 시나리오를 썼을 때가 2014년이다
세월호 참사 소식을 연일 접했다. 배가 가라앉는 순간에도 학생들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안내 방송을 한 사실이 정말 충격적이었다. 그때 느낀 것도 이 작품에 녹아들어 있다.”(<매거진 M>, 2017년 1월 18일) 그래서 너의 주인공들은 가만히 있지 않는다. 지금까진 늘 초속 5센티미터의 속도로 머뭇대던 너의 주인공들이었지만 이번에는 서로를 구하기 위해 뛰고 또 뛴다. 지금까지 너의 작품에 없던 속도감이 이번에는 생겼다. 언제나 포기하고 돌아서는 게 너의 주인공들이었는데 끝까지 서로를 포기하지 않는 커플을 처음 보았다. 사라지고 멀어지고 잊혔던 모든 것이 다시 되살아나 관객 마음 위로 별처럼 쏟아져 내리는 클라이맥스. 구하지 못했다는 미안함과 잊힐지 모른다는 두려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그 회색빛 감정에 형형색색의 판타지를 묶어 예쁘고 단단한 매듭을 만들어준 라스트 신. 그 역동적인 해피 엔딩 앞에서 어느 누가 담담할 수 있을까. 너답지 않은 이야기라고 어느 누가 입을 삐죽일 수 있을까. 거대한 상실의 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의 마음 같지 않을까.
“소중한 사람, 잊고 싶지 않은 사람, 잊어선 안 되는 사람. 너의 이름은?” 이 마지막 대사를 가슴에 품고 극장 문을 나선 관객 360만 명(2월 12일 현재). 누구는 그 숫자를 ‘흥행’이라고 부르지만 나는 다만 ‘응답’이라고 부르고 싶다. 너의 부름에 우리가 응답했다. 미츠하의 부름에 타키가 응답했듯이. 세상엔 응답하지 않을 수 없는 어떤 운명 같은 부름이란 게 있는 법이니까.
- 글
- 김세윤(영화 칼럼니스트)
- 에디터
- 김나랑
- 포토그래퍼
- COURTESY OF MEGABOX PLUS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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