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ited Colors of Fashion
패션과 정치가 만났다. 정치 집회로 변신한 캣워크, 걸어 다니는 피켓이 된 티셔츠, 그리고 모두의 손에 묶인 반항의 표식. 2017년 혼란스러운 사회를 반영하는 패션이라는 거울의 역할은 뭘까.
“불확실한 시대일수록 우리를 강하고 안전하게 지켜주는 유대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인권을 존중하는 이들을 묶는 유대감 말입니다. 패션 커뮤니티가 함께 힘을 합쳤고, 두려울 것이 없다는 것을 세상에 보여줍시다.” 스피커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불과 몇 분 전만 해도 지지 하디드가 요염하게 거닐던 곳의 분위기가 순간 엄숙해졌다. 핑크색 모자를 쓴 모델 군단이 한 발짝 뒤로 물러났고, 무대로 미쏘니 일가가 올라섰다. 가문을 이끄는 안젤라 미쏘니가 마이크를 들고 관객을 향해 소리친 것이다. 마침 존 레넌의 ‘Power to the People’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관객들의 우레 같은 환호성이 밀라노 프로카치니 거리의 창고를 가득 채웠다. 이곳은 여성 인권 집회가 아니다. 2017년 가을 유행을 미리 선보이는 미쏘니 패션쇼장이다. 대체 이번 시즌 패션쇼엔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최근 국제 정세를 먼저 살필 필요가 있다. 지난해 유럽을 뜨겁게 달군 ‘브렉시트’, 전 세계에 충격을 준 트럼프의 승리, 이태리 총리의 갑작스러운 사임, 그리고 곧 다가올 프랑스 대선 등. 냉전 이후 이토록 다양한 정치, 사회적 이슈가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온 적이 또 있을까(한국 기자들 역시 종종 국내 정세에 대한 조심스러운 질문을 받곤 했다). 이 와중에 여성과 성 소수자, 이민자와 난민의 인권은 위험한 위치에 몰렸다. 여성 비하 발언 논란에도 불구하고 당선된 미국 새 대통령은 반이민 행정명령을 내렸고, 영국과 프랑스의 보수 정치인들은 난민에 대한 경계를 적극적으로 드러냈다. 그러니 어느 업계보다 소수자의 역할이 중요한 패션계가 입을 닫고 가만있을 리 없었다.
언제나 그렇듯 가장 소란스러운 곳은 뉴욕. 때로 쇼장은 디자이너의 작업을 살펴보는 곳이 아닌, 촛불 집회 현장으로 느껴지곤 했다. 디자이너 트레이시 리즈는 시인 네 명을 초대해 여성의 관점을 이야기하는 시를 낭독했고, 마라 호프만은 여성 인권 행진 ‘위민스 마치’의 주도자 넷을 초대해 여성 인권 운동가의 함께 글을 읽었다. 프라발 구룽과 크리스찬 시리아노는 ‘The Future Is Female’ ‘I Am an Immigrant’ 등의 문구가 새겨진 티셔츠를 선보였다. 아시아인과 흑인 디자인 듀오가 이끄는 퍼블릭 스쿨은 트럼프의 선거 문구였던 ‘Make America Great Again’을 풍자한 ‘Make America New York’이라는 문구를 모자에 새기기도 했다. “우리는 민족주의와 고립주의, 외국인 혐오증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퍼블릭 스쿨을 이끄는 다오이 초의 말이다. 그렇다면 왜 뉴욕일까? “이 도시는 다채로운 문화와 이민자들로 이루어진 곳이니까요.”
정치적 분위기는 런던과 밀라노로 이어졌다. 아쉬시는 트럼프를 겨냥한 듯한 ‘More Glitter Less Twitter’ 등의 문구가 적힌 스웨터를 선보였고, 보라 악수는 초대장에 ‘Peace’ ‘Freedom’이라고 적힌 피켓을 그려놓았다. 가레스 퓨는 미래 암흑사회를 그리는 어두운 쇼를 선보였고, 도 나텔라 베르사체는 ‘Courage’ ‘Love’ ‘Equality’ 등의 문구를 옷 곳곳에 프린트했다. 그리고 이어진 미쏘니 쇼에서는 위에서 언급한 그대로 디자이너의 호소력 짙은 연설이 이어졌다(모든 좌석에는 ‘위민스 마치’에서 시작된 ‘Pussy Hat’이 선물로 놓여 있었다).
런웨이 밖에서도 정치적인 분위기는 팽배했다. 첫 번째 쇼였던 LA의 타미 힐피거는 관객들에게 하얀색 손수건을 선물했다. 패션 사이트 ‘비즈니스 오브 패션’에서 시작한 이 운동은 하얀색 반다나를 통해 패션계 모두가 “연대, 통합 그리고 포용성을 대표하자”는 것. 이 손수건을 착용하고 사진을 찍은 후 ‘#TiedTogether’라는 해시태그와 함께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하면, 이미지 하나에 5달러씩 미국시민자유연맹(ACLU)과 유엔난민기구(UNHCR)에 기부하게 되는 프로그램. 발렌티노의 피엘파올로 피촐리와 디올의 마리아 그라치아 키우리는 손목에 이 손수건을 감은 채 피날레 인사에 나섰고, 리뎀션 쇼에서는 모든 모델들이 손수건을 한 손에 들고서 당당히 걸어 나왔다.
모든 디자이너가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적극적으로 드러내진 않았다. 한때 열렬한 사회주의자였던 미우치아 프라다는 이번 시즌 백스테이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정치적이고 싶지 않습니다.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두 눈을 반짝이며 이렇게 말을 이었다. “저는 그런 것을 몰래 숨겨둡니다.” 60~70년대에 대한 향수와 그녀만의 장식적 본능이 폭발했던 컬렉션에서 그녀의 정치 성향을 찾기란 쉽지 않은 일. 하지만 패션 대모가 컬렉션 테마를 펠리니 영화 제목에서 따온 <City of Women>이라고 정한 것만으로도 큰 힌트가 되어줄 것이다. 그리고 소녀의 방처럼 꾸민 세트장 구석에서 어느 기자는 이런 문구가 적힌 것을 발견했다. “우리는 현대사회가 형태를 갖추는 데에 있어 정치적 참여와 사회적 업적을 통해 여성들이 맡은 역할을 살펴보고자 했다.” 이 정도면 프라다 여사의 입장은 꼭 티셔츠에 적혀 있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을 듯하다.
은밀하게 스스로의 입장을 밝힌 디자이너는 또 있다. 뉴욕에서 첫 번째 쇼를 선보인 캘빈 클라인의 라프 시몬스는 스스로 이민자가 된 경험을 컬렉션에 풀어놓았다. “말로 하지 않을 겁니다. 대신 쇼에서 보여주겠습니다.” 쇼를 선보이기 직전 미국 <GQ> 인터뷰에서 하 수상한 시대에 디자이너로서 사는 것에 대한 질문을 받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물론 주저앉아 울 수도 있겠죠. 혹은 ‘그냥 내 일을 할 거야. 내가 해야 할 일을 할 거야’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그건 단지 책임감이 아니라 도전 과제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건 스스로 생각하는 미국에 대한 찬가. 특히 데이비드 보위의 ‘This is Not America’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성조기 스커트가 찰랑이는 건 이번 시즌 가장 세련된 정치적 표현이었다.
모두가 시몬스처럼 노련하지는 않다. 게다가 함부로 정치적 의견을 비쳤다가는 일부 고객들에게 배척 받는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떤 방식이든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밝히는 건 분명 커다란 용기가 필요하다. 두려워하는 디자이너를 비난할 수 없다. 누군가는 지금 디자이너들은 일에만 집중하기엔 어려울 때라고 짐작하기도 했다. 비록 샤넬에선 로켓을 발사하고, 셀린에서는 무대가 빙글 빙글 움직였지만, 이번 시즌 우리를 확 사로잡는 뭔가가 부족했던 것이 이러한 고민 때문이라는 것이다. “디자이너들도 저희들 대부분처럼 세계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정신이 팔려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지금은 힘을 얻고 창조적이며 자유롭기에 쉬운 시간은 아닙니다.” 미국 보그닷컴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샐리 싱어는 이번 시즌을 마무리하며 이렇게 평했다. 하지만 그녀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창의력만이 압제와 인종 차별주의 그리고 옹졸함에 대한 우리의 가장 큰 동맹입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 한 시즌 정도 쉬면서 앞으로의 전투를 위해 준비할 시간이 필요한 건지도 모릅니다.”
패션이 가진 파급력은 어느 때보다 커졌다. 그 와중에 패션이 가져야하는 책임감도 커졌다. 그 책임감은 티셔츠의 문구로, 무대의 연설로, 패션쇼의 사운드트랙으로 해석됐다. 그리고 그 이미지와 영상은 순식간에 전 세계로 공유되는 중이다. 이 모든 풍경이 앞으로 어떤 식으로 영향을 끼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러한 ‘액션’ 가운데 진실한 감정이 느껴진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논란이 더 아름다운 패션으로 우리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더 로우의 올슨 자매는 뉴욕 컬렉션에서 셔츠 곳곳에 ‘Dignity’ ‘Hope’ ‘Freedom’이라는 단어를 아주 작게 수놓았다. 미니멀해서 어느 때보다 호화로웠던 컬렉션 가운데 발견한 그 작은 외침은 쉽게 잊히지 않을 듯했다. 지금 가장 필요한 건 그런 품위 넘치는 행동이니까.
- 에디터
- 손기호
- 포토그래퍼
- INDIGITAL, GETTYIMAGES / IMAZINS, COURTESY PHOT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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