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na Be Me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을 정했어요. 그 사람이 바로 나예요.” 가브리엘 샤넬은 평생을 이 문장처럼 살았다. 2017년에도 가브리엘의 정신이 유효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칼 라거펠트가 뮤즈 네 명을 선정했다.
“드르르륵-!” 대낮에 스케이트보드가 아스팔트를 긁으며 지나가는 소리는 졸린 눈도 번쩍 뜨일 만큼 경쾌하다. 고개를 돌려보니 저 멀리 회색 비니를 푹 눌러쓰고 금발을 휘날리며 골목을 헤집고 다니는 한 스케이트보더의 모습이 보인다.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은 소녀는 심지어 언덕이 있는 스케이트 파크로까지 향했다. “조심해요, 카라!” 몸에 잘 맞는 청바지에 스니커즈를 신고, 형형색색 가방을 양어깨에 크로스로 걸친 채 서핑하듯 양팔을 휘젓는 그녀는 이 모든 게 촬영이란 걸 잊었는지 언덕을 내려와선 영락없는 아이의 표정으로 킬킬거렸다. 흐트러진 비니를 고쳐 쓰는 그녀의 손이 나의 시선을 가로챈다. 집게손가락의 반을 뒤덮은 사자 모양 타투, 그리고 리틀 블랙 재킷 소매 사이로 불룩하게 나온 하늘색 후디 소매! 1954년 마드무아젤 샤넬이 이 재킷을 처음 디자인했을 때, 스케이트보드를 즐기는 20대 모델이 입을 줄 상상이나 했을까? 아니, 반대로 생각한다면 이 재킷은 코르셋처럼 몸을 조이는 당대 패션에 반해 탄생한 자유로움을 상징하는 옷이 아니었던가? 젊음과 자유의 동음이의어인 스케이트 보드와 어울리지 않을 건 뭐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에 잠겨 있을 때쯤 카라가 들고 있던 스케이트보드가 바닥에 ‘쿵!’ 하고 떨어졌다. 뒤집어진 스케이트보드 데크엔 ‘가브리엘(Gabrielle)’이라는 단어가 쓰여 있었다. 곧이어 카라가 카메라를 든 누군가를 향해 말했다. “안녕? 가브리엘.” “이름이 뭐야?”
카라의 장난기 어린 대사를 뷰파인더 너머로 들은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패션 황제 칼 라거펠트다. 검은색 선글라스와 타이, 흰색 꽁지 머리, 가죽 장갑은 수십 년째 여전해서 오히려 반갑다. 칼은 광고 캠페인을 오랫동안 진두지휘해온 건 물론이고 촬영도 직접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카라 델레빈이 연기한 상황 또한 그가 직접 설정한 것. “저는 세상과 패션을 카메라의 관점으로 바라봅니다. 사진은 매일 제가 할 일에 중요한 객관성을 부여해주었죠.” 작년 피티 우오모에서는 지난날의 사진 업적을 기리는 전시 <Visions of Fashion>을 열 만큼 사진은 그에게 세상을 대해 온 태도의 응축인 셈이다. 카라의 무대가 끝남과 동시에 칼의 다음 뷰파인더가 어디로 향할지 궁금해졌다.
유선형 장식 계단의 난간에 손을 얹고 카펫이 깔린 계단을 한 칸씩 올라간 곳은 파리의 한 건물 안. 맨발의 캐롤린 드 메그레가 탁자 위에 턱 하고 걸터앉아 있다. 특유의 화장기 없는 수수한 얼굴과 눈썹을 덮는 부스스한 앞머리. 그녀는 은색 가방의 체인을 하나는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교차해서 메더니 재킷의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거리로 나갈 채비를 하던 중이었다. “가브리엘, 샤넬.” 캐롤린은 파리지엔답게 프랑스 발음으로 완벽하게 이 단어를 내뱉고는 벽난로 위 거울을 보며 소리 없이 활짝 웃어 보였다. 그 다음으로 칼은 배우 크리스틴 스튜어트를 어두운 창고로 불러냈다. 밑단을 묶은 흰 티셔츠, 검은색 후디, 스키니 바지, 워커, 한쪽으로 쓸어 넘긴 단발머리. 촬영장에서 본 크리스틴의 모습은 시상식 같은 공식 석상에선 자주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오히려 집에 있다가 칼의 요청에 한걸음에 달려 나온 것처럼 보일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크리스틴은 정말 개성적입니다. 그녀를 어떤 여배우와도 비교할 수 없어요. 정말 현대적이죠. 그게 어떤 의미이건 간에요.” 칼과의 작업을 “노동 집약적이지 않은, 즉흥 예술에 가까워요”라고 찬사한 바 있는 크리스틴은 창고 안을 힘겹게 달리고 멈추기를 반복하며 칼의 주문을 능수능란하게 받아냈다. 그녀가 먼지 덮인 창문에서 발견한 글씨는 다름 아닌 ‘가브리엘’이었다. 이쯤 되니 칼 라거펠트가 촬영장 곳곳에 심은 암호명은 ‘가브리엘’임이 틀림없었다. “모두가 그녀를 코코라고 불렀지만, 그녀의 진짜 이름은 가브리엘이었습니다. 샤넬의 모든 코드를 갖고 있는 이 새로운 가방에 ‘가브리엘’은 완벽한 이름입니다.” 카라와 캐롤린, 크리스틴이 메고 있던 가방이 바로 2017년 샤넬의 비전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피사체인 것이다. 수많은 샤넬의 앰배서더 중 딱 네 명만 고르는 건 칼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가브리엘 백의 디자인과 관련이 깊은 사람들을 선정해야만 했습니다. 오늘날의 현대적인 사람들 말이에요. 이들은 모두 개성이 뚜렷하고, 각자 완전히 다른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레디투웨어, 꾸뛰르, 공방 컬렉션 등 1년에 여섯 번의 쇼를 거치며 전에 없던 ‘새로움’을 내놓는 샤넬이지만 브랜드의 근간이 되는 가방을 발표하는 건 2011년 보이 백 이후 처음이다. “샤넬은 몇 년에 한 번씩 주기적으로 새로운 스타일을 강조하려고 합니다. 이번엔 가브리엘이죠.” 샤넬의 패션 사업부 회장 브루노 파블로브스키(Bruno Pavlovsky)가 가브리엘 백의 탄생이 왜 이정표가 되는지에 대해 설명했다. 창립자의 실명을 붙인 만큼 이 가방은 가브리엘 샤넬의 정신을 고스란히 담았다. 우선 샤넬이 항상 현실을 반영했다는 점이다. “샤넬은 단지 디자이너가 아니었습니다. 당대의 여성이기도 했죠.” 가브리엘은 현실의 여성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아는 여성이었다. 여성을 둘러싼 기존 인습에 반대하는 삶을 살았으며 이를 패션으로 승화시켰다. 남성의 속옷에 쓰이던 신축성 좋은 저지 소재로 드레스를 만들었으며, 군복에서 영감을 받은 브레이드 장식과 패치 포켓을 트위드 재킷에 적용했고, 스트랩이 달린 군용 가방을 크로스백으로 만들어 여성의 두 팔을 자유롭게 했다는 게 유명한 업적. 칼은 2017년의 현실을 반영하고자 했다. “가브리엘 백은 가상현실(VR)의 고글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카드보드지와 몇 개의 렌즈만 있다면 누구든 아이폰으로 DIY VR 헤드셋을 만들 수 있고, 현실 속에 가상현실을 접목한 증강현실(AR) 게임으로 몬스터를 잡는 시대! 과연 한 발은 현재에, 한 발은 과거에 담그고 있는 칼의 안목을 당해낼 자는 없다.
이 가방에 가브리엘의 정신이 들어 있다는 걸 보여주는 두 번째 요소는 실용성이다. 고글 형태를 가방의 바닥면으로 사용했는데, 이 부분은 열처리를 거쳐 손으로 툭툭 치면 소리가 날 정도로 매우 가벼우면서도 견고한 질감을 가지고 있다. 바닥이 움직이지 않으니 형태가 안정적이어서 물건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게다가 길고 짧은 크로스백에 한정되었던 2.55 백, 보이 백과는 달리 가죽, 골드, 실버 메탈로 엮은 ‘더블 체인 스트랩’은 어떻게 메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의 스타일링을 보여준다. “각자 자신만의 방식으로 샤넬의 가브리엘 백을 들면 그때마다 서로 다른 분위기가 연출되는 거죠.” 칼의 의도처럼 가브리엘 백은 특정한 분위기나 장소, 성별에 구애받지 않는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가브리엘 백의 마지막 모델, 바로 퍼렐 윌리엄스다. 그는 브랜드 역사상 최초로 첫 남성 가방 모델이 됐다. 칼이 퍼렐을 불러낸 곳은 공연이 끝난 무대 뒤다. “하나, 둘, 셋, 이제 밀 거예요!” 바퀴가 달린 음향 장비 박스 위에 올라탄 퍼렐을 스태프들이 힘껏 밀었다. 무대 뒤에서 할 수 있는 모험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퍼렐은 이내 가브리엘 백을 둘러메고 닌자처럼 조명이 달린 난간을 오가며 외나무다리 묘기를 펼쳤다. “눈 감지 말아요. 눈을 열고 바라봐요. 그녀가 당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까요?” 퍼렐이 샤넬의 단편영화 <환생(Reincarnation)>을 위해 작곡한 노래 ‘CC The World’의 한 대목이 생각나는 아찔한 순간!
카라 델레빈의 도시 탐험부터 퍼렐의 콘서트장 백스테이지까지, 네 인물과 칼이 함께한 여정은 네 사람의 삶의 일부분을 엿보는 것과도 같았다. 그리고 칼은 자연스럽게 100년 넘게 이어온 가브리엘의 정신을 오늘날의 사진과 영상에 담아냈다. “사람들은 그때의 샤넬이 지금과 같지는 않았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중요한 것은 지금의 결과입니다. 샤넬의 정신은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 에디터
- 남현지
- 포토그래퍼
- COURTESY OF CHAN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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