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화보

Fearless Females – ①

2017.05.08

Fearless Females – ①

21세기에도 여성의 삶 곳곳에는 사회 정치적 차별과 불평등이 존재한다. 우리 여자들의 개인적 경험에 공감하고 두려움 없이 수면 위로 드러내며 여성의 존재를 찬양해온 이들이 바로 패션계의 여자 디자이너들이다.

Miuccia Prada

밀라노 폰다치오네 프라다 지붕 위에서 포즈를 취한 미우치아 프라다.

밀라노 폰다치오네 프라다 지붕 위에서 포즈를 취한 미우치아 프라다.

“위기는 늘 긍정적이에요. 왜냐하면 생각하게 만드니까요.” 미우치아 프라다는 이태리의 경제와 정치 문제를 되짚으며 말한다. “위기가 닥치면 현재 상황을 재정비하게 됩니다. 모든 게 잘 풀리면 사람은 게을러지죠!” 다양한 컬러의 가죽 바이커 재킷 밑으로 비어져 나온 터키색 깃털 목도리에 긴 크림색 스커트를 입어 불손한 톰보이 같은 옷차림을 한 프라다는 급진주의와 정치 소요 시대에 일에 뛰어들었던 과거를 회상한다. 1970년대 밀라노에서 사회주의자이자 페미니스트로서 패션계 여성으로 산다는 건 쟁취하고 싸워야 할 무엇이었다. 여성 기업인에게 있어서 이태리는 앞서 있지 않았다. 그리고 프라다가 정치학과 졸업생으로서 지지했던 좌파 문화는 옷과 액세서리가 결코 시시하지만은 않다는 생각에 눈살을 찌푸렸다. 문화적으로 유의미하다는 것을 인정하기는커녕 말이다.

“아주 힘들었어요.” 그녀는 프라다 본사 사무실에서 말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꽤 열정적이었죠. 그런 사상을 세상에 선포하는 것에 대해 불안해하긴 했지만 전혀 고민하진 않았으니까요. 저는 늘 제가 옳은 길을 가고 있다고 느꼈어요.” 그 길은 엄청나게 인기 있는, 86억 달러의 가치를 지닌 사업체로 이어졌다. 그뿐 아니라 그녀는 자신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그 길을 만들었다. 그녀는 군대 텐트에 사용되는 나일론, 병뚜껑, 깨진 거울, 식기 파편 같은 민주적이고 때론 별난 소재를 사용했고 패션의 편협한 시각에 작별을 고하는 방식으로 빈티지와 ‘보기 흉한’ 요소를 도입했다. “1970년대에 패션은 오직 백인들, 즉 북미인들과 부유한 부르주아 유럽인만을 대변했어요. 그런 엘리트주의적 사고가 부조리하게 느껴졌습니다.”

오늘날 프라다는 주변의 모든 것에서 아이디어를 얻는다. “그건 어떤 색상이 될 수도 있고, 거리에서 본 것일 수도 있고, 제가 들었던 것 중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바보 같은 이야기일 수도 있어요. 제 작업이 활기 넘치는 이유는 다른 분야와의 접목 때문입니다. 영화, 음악, 무용, 미술계를 흥미롭고 입체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면서 빠르게 머리를 회전해야 하죠. 모든 패션쇼에는 배경이 되는 이야기가 있어요. 어쩌면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고, 기이하고, 거친 그런 이야기 말이에요.”

사교계 인사가 아니라 사회적 존재이고, 모순적이지만 결코 무심하지 않으며, 연민을 느끼지만 감상적이진 않은 프라다는 관계 맺길 좋아한다. “제겐 다양한 사람들을 위해 옷을 만드는 게 중요해요. 같은 타입을 위해 무언가를 만드는 건 따분해요. 아름답고, 시크하고, 박식한 사람들은 정말 지루해요. 세계의 나머지 사람들, 그들의 용서할 수 없는 취향을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는 것이 제가 하려는 도전입니다.” 정치에 대해서 그녀는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이 “정말 모든 것을 흔들어놓았다”고 말한다. “이태리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났어요. 렌치(전 이태리 수총리는 국민투표에서 졌습니다. 좌파가 깨어나야 해요. 지금이 아니면 안 됩니다.” 더 이상 공산당원이 아닌 그녀는 계속 열정을 유지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찾고 있다. 멋진 프라다 재단 뮤지엄에서 열릴 다음 패션쇼는 이태리 예술 작품 속 파시즘의 역사에 관한 것이 될 거라고 그녀는 말한다. “우리는 절대 로고나 슬로건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제 브랜드로 정치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건 싫어요. 정치를 가볍게 생각해서가 아닙니다. 그런 생각을 드러낼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기 때문이죠.”

— 글 / 키아라 바르치니(Chiara Barzini)

Phoebe Philo

셀린을 입은 피비 파일로를 촬영한 곳은 그녀의 집.

셀린을 입은 피비 파일로를 촬영한 곳은 그녀의 집.

셀린 매장에 들어서면 여자들의 머릿속엔 어떤 일이 일어난다. 최근 독특하게 디자인된 셀린의 메이페어 플래그십 스토어를 방문했을 때 나는 그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 수 있었다. 디자이너 친구와 함께 갔는데, 그는 셀린이 자신의 아내에게 미친 영향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그녀는 이 구역에 들어서면 제 말이 들리지 않는 것 같아요. 이것저것 마구 사고 싶어 하죠.”

우리가 원하는 것은 2008년부터 셀린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피비 파일로가 아주 아름답게 해석한 패션이다(최근 어느 유럽 도시의 아주 멋진 패션 매장에 도둑이 들었다. 도둑의 유일한 목표물은 종류에 상관 없이 오직 셀린 제품이었다). 그녀는 우리에게 갑옷인 동시에 편안한 담요 역할을 해주는 옷을 선사한다. 여기엔 너무나도 멋진 디테일과 컬러의 놀라운 조합과 폭발(민트 그린, 밤색, 주홍색)이 있다. 이브 클랭 블루의 보디 프린트가 들어간 흰색 시프트 드레스가 대표적인 예다. “그녀의 옷에서 마음에 드는 건 여성스러운 요소가 아이러니하게 결합된, 과감하고도 중성적인 테일러드 룩입니다.” 아티스트 신디 셔먼은 말한다. “그녀의 옷을 입으면 애쓰지 않아도 마음을 가다듬고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죠.”

파일로는 이렇게 말한다.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옷을 입었을 때 편안함과 함께 좋은 기분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디자인을 현대 생활의 혼란, 복잡함 그리고 모순을 헤쳐나가는 여자들에게 ‘제안’한다. 그녀는 셀린에서 자신이 엄청난 성공(8년간 이윤이 네 배 이상 늘었다)을 거둔 것을 인정한다. “프로젝트 전체가 제 기대를 훨씬 뛰어넘었습니다. 전략을 세워서 여기까지 온 건 아니에요. 저는 어떤 계획도 없습니다.” 본능적 접근 방식과 마찬가지로 그녀는 자신의 작업을 말로 표현하는 것에 두려움에 가까운 수줍음을 느낀다. 생각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이 그것의 진실성을 훼손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녀가 종종 설명하듯 그녀가 말해야 하는 모든 것은 옷 안에 담겨 있다. 그녀가 어떻게 현재의 위치에 오르게 됐는지는 흥미로운 부분이다. “저는 저에게 풍부하고 적절하게 느껴지는 것을 밖으로 꺼내놓습니다. 진실하게 느껴지지 않으면 그것을 만들 수 없어요.”

파일로는 런던 중심에 위치한 우아한 조지 왕조풍 타운하우스의 빛이 가득 들어오는 사무실에서 편안한 회색 모헤어 스웨터 드레스, 진, 그리고 바닥이 두꺼운 화이트 스니커즈 차림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진한 금발은 상투처럼 위로 틀
어 올렸고 깨끗하게 각질이 제거된 얼굴과 매력적인 옅은 푸른 눈은 고양이처럼 날카로워 보였다. 이곳에서 그녀는 작업에 집중하고 있다. 전 동료의 말을 빌리자면 “완전히 집중하고, 의욕이 넘치며, 유머 감각이 뛰어난 데다, 방 안엔 즐거움이 가득하다”고 한다. 그렇게 집중하다가 뒤로 물러나기도 한다. “제 삶에는 다른 많은 것이 있어요. 패션과 거리가 아주 멀고 뭔가를 만들어내는 일이 아닌, 인간관계에 더 중점을 둔 그런 것들 말이에요.” 그녀는 말한다. “제가 패션 산업에 대해 알고 있는 건 그것이 아주 빠르고 아주 힘들다는 겁니다. 많은 자양분을 필요로 하죠. 그건 상관없어요. 저는 인간이고 제 능력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잘 보살펴야 하는 다른 것들이 있어요.” 예를 들면 세 아이와 남편, 온전한 정신 상태와 행복 같은 것들 말이다. “저는 종종 뒤로 물러납니다.”

셀린을 위한 최근 과제는 온라인 시장을 추진하는 것이다. 처음에 파일로는 매장에서 옷을 직접 만져보는 생생한 경험을 지지하면서 디지털에 저항했지만 지금은 관심을 갖고 그것을 수용하고 있다. “더 많이 배우고 그것을 이해하는 것, 그리고 우리와 우리의 가치에 도움이 되는 방법을 찾고 있다는 면에서 아주 흥분됩니다.”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말한다.

43세라는 나이에 대해 파일로는 이렇게 말한다. “나이 드는 것의 좋은 점 중 하나는 자신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된다는 거예요.” 그녀가 타협을 거부하고, 휴식을 취하고, 파리 하우스를 위해 런던에서 작업을 하는 것으로 자신의 세계를 보호하고, 사생활을 철저하게 지키는 데에는 조용한 힘이 있다. 연약함을 인정함으로써 역으로 대담해질 수 있는 것이다. “추호도 제가 실패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아요.” 테이블에 걸터앉아 그녀는 말한다. “쉽게 상처받고, 확신이 없고, 두렵게 느껴질 때가 있어요. 저의 또 다른 면은 위험을 감수하고, 질문을 던지고, 가능한 한 그 순간에 두려움을 느끼지 않습니다. 실수하고 착각하는 것 또한 우리를 인간답게, 소중하게, 창의적으로 만드니까요.”

아트 컨설턴트인 파일로의 남편 맥스 위그램은 그녀가 끌로에의 수석 디자이너가 된 2001년에 <보그>에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세상은 그녀의 눈을 통해 해석됩니다.” 그건 바뀌지 않았다. “저는 늘 자신이 패션계의 아웃사이더처럼 느껴졌어요. 제 자신, 저의 환경, 저와 가까운 사람, 그리고 물론 좀더 큰 세계의 관찰자 같아요.” 친구인 건축가 소피 힉스는 “그녀는 패션에 사로잡혀 있지 않아요. 보다 폭넓은 방식으로 문화를 느낄 만큼 패션과 충분히 거리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아마 그것이 그녀가 그렇게 성공한 이유일 겁니다”라고 말한다.

브렉시트로 인한 영국인들의 분노와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 이후 파일로는 ‘아주 불안정하게 느껴지는’ 분위기를 경험하고 있다. “아주 많은 불신이 느껴져요. 그것이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죠. 소수자들이 특히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요. 우리가 늘 접하는 모든 복잡한 문제(종교, 여성, 남성, 세계화)에 대해 얘기하려 하지 않는 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그것이 좋거나 혹은 나쁘다고만 판단하고 싶어 해요. 그건 문을 닫아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에 대해 분명하게 말하지 않으면 그것을 치유할 수 없을 거예요. 저는 늘 다양하고 색다른 것을 좋아했어요. 저는 ‘다른 것’에 대해 아주 호기심이 많아요. 개방성과 틈새를 포용하는 데 관심이 많습니다. 그런 요소를 갖고 있지 않으면 끌리지 않아요.”

파일로는 미국에서 개인적이고 자생적 행동주의가 늘고 있음을 느낀다. “사람들이 힘과 용기를 모으기 시작했어요.” 스튜디오에서 그녀의 팀은 종종 현재의 분열된 정치 상황에 대해 토론한다. “그런 상황이 주위를 둘러보며 타인에 대해 연민을 느끼고 그들과 연결되는 것을 어떻게 차단하는가. 우리는 디자인하면서 이런 얘기를 나눕니다. 그런 것들이 자연스럽게 화제가 되죠. 옷이나 제품과 전혀 상관없는 대화를 나눕니다.” 이런 식으로 그들의 대화가 컬렉션에 반영된다고 그녀는 믿는다. “우리가 컬렉션을 만드는 동안 그런 얘기가 방 안에서 오가니까요.”

— 글 / 이브 맥스위니(Eve MacSweeney)

Stella McCartney

런던의 레이븐스코트 공원에서 어깨 위에 붉은 여우 ‘칼리’를 얹고 촬영한 스텔라 맥카트니. 자신이 디자인한 페이크 퍼 코트를 입고 있다.

런던의 레이븐스코트 공원에서 어깨 위에 붉은 여우 ‘칼리’를 얹고 촬영한 스텔라 맥카트니. 자신이 디자인한 페이크 퍼 코트를 입고 있다.

스텔라 맥카트니는 자신이 디자인한 오버사이즈 더블 브레스티드 카멜 코트로 몸을 아늑하게 감싸고 실버 체인 팔라벨라 백을 무릎에 늘어뜨린 채, 안이 보이지 않는 SUV 뒷좌석에 웅크리고 앉아 미친 듯 휴대폰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녀는 회의와 회의 사이에 식료품 쇼핑을 하고 동시에 온라인 경매 사이트에서 뭔가를 산다. “뭐였는지 기억나지 않아요.” 맥카트니의 비서는 잔뜩 쌓인 수트 백과 함께 맞은편에 앉아 그녀에게 앞으로 있을 미팅을 상기시켰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다. 그녀는 자신의 양심에 따라 말하는 데 거리낌이 없는 디자이너다. 동물의 권리와 유방암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고 가정 폭력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인다. 그래서 현재 45세인 그녀의 주요 관심사가 정치라는 것은 전혀 놀랍지 않다.

“S/S 컬렉션은 우익에 대한 반발이었어요.” 그녀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정체된 런던의 교통 상황을 내다보며 말했다. “옷에 ‘All is Love’라고 썼습니다. 그리고 모든 모델들이 춤을 췄죠. 심판과 분노 이후엔 서로에 대한 사랑과 존경이 있습니다. 현 상황을 우리의 작업에 좀더 적극적으로 반영해야 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상기시키기 위한 저만의 방식이었어요.” 스텔라는 “물이 아직 반은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 여자”라고 자신을 표현했다. 브렉시트와 트럼프의 승리 이후 그녀는 부정적 사고가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갑자기 그녀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냥 주저앉아 투덜대며 축 처져 있어선 안 되죠.” 수영장처럼 파랗고 커다란 그녀의 눈이 반짝였다. “우리는 모든 걸 비틀고 뒤집어서 효과적인 해결책을 찾아내야 해요.” 국제 여성 폭력 추방 운동인 ‘화이트 리본 데이’의 동료 지지자 셀마 헤이엑은 스텔라를 ‘타고난 활동가’라고 묘사한다. “그녀는 해결책을 찾는 데 있어 열정적이고, 실용적이고, 창의적입니다. 그리고 아주 헌신적이고 체력도 놀라울 정도죠.” 실제로 맥카트니는 사생활뿐 아니라 사업에서도 자신의 믿음을 고수한다. 그녀는 자신의 제품에 가죽이나 모피를 사용하길 거부한다. “다양한 사람들이 액세서리 사업에 성공할 수 없을 거라고 수도 없이 말했어요.”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회상한다. “하지만 현재 우리는 다른 가죽 하우스에 비해 더 많은 아이코닉한 백과 슈즈를 갖고 있습니다. 중요한 건 스타일을 타협하지 않으면서 의식있는 소비자들을 위해 아름답고 갖고 싶은 백을 만드는 거죠. 그것 때문에 돈을 잃기도 했어요. 하지만 돈은 저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아닙니다.”

그녀가 자신의 사업체뿐 아니라 남편 알라스데어 윌리스(부츠 브랜드 ‘헌터’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와 많은 친구들, 런던의 집, 약 162만m²에 달하는 조지 왕조풍의 시골집, 그리고 6세에서 12세에 이르는 네 아이들을 아우르는 우주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아침 7시부터 9시까지는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줍니다. 그리고 일하러 가죠. 집에선 책을 읽고 잠을 잡니다. 제 목표는 7시 전에 집에 오는 거예요.” 그녀는 너무 바빠서 하루를 5분 단위로 꼼꼼하게 계획해야 한다고 말한다. “저만을 위한 시간을 갖고 있다고 느낄 때는 말을 탈 때예요. 1시간 동안 승마를 하고 나면 컨디션이 회복됩니다.”

— 글 / 플럼 사익스(Plum Sykes)

    포토그래퍼
    ANNIE LEIBOVITZ, DAVID SIMS, COLIN DODG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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