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악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찾는 오디언스가 늘고 있다. 유대인 학살자인 아이히만이 당신과 별다르지 않은 사람이라는 내용에, 지금 사회를 살아내는 우리가 공감하기 때문이다.
오디언스 일부는 분개할지도 모르겠다. 이제부터 바로 우리의 이야기, 당신이 숨기고 싶은 치부를 적나라하게 까발릴 작정이니까. 한나 아렌트도 그랬다. 그가 유대인 학살 책임자인 아이히만의 재판을 참관하고 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분노 그 자체였다. 아마도 믿었던 우리 편에게서 욕 먹는 기분 아니었을까? 아이히만이 손에 피를 철철 흘리는 도살자도 살인마도 아니요, 당신과 똑같은 사람이라고 했으니 말이다. 그가 조직 사회의 충실한 일원으로 자기 일에 성실하고, 집에서는 따뜻한 가장이었으며, 친구들 사이에서는 믿음직한 동무였다는 아렌트의 보고에 사람들은 자신의 속내를 들킨 듯 격하게 반응했다.
반응은 크게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유대인 사회에서 나왔다. 아이히만이 유대인을 아우슈비츠로 소개, 이송하는 과정에서 유대인 지도자들의 적극적 협력이 있었다는 아렌트의 고발 때문이었다. 사실이 그랬다. 독일 게르만족의 순혈주의를 원했던 아이히만과 유대인들만의 국가를 꿈꾼 시오니즘 지도자들은 이 목표를 위해 강제적 인종 분리를 해야 한다는 데 의견이 일치했고, 일부 희생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당시의 신생국가 이스라엘과 미국의 유대인 사회는 이런 치부를 들춰낸 아렌트가 정말 미웠을 것이다. 또 다른 반응은 보통 사람들에게서 나왔다. 아이히만의 악이 평범한 데서 나온 것이라면 선량하고 평범한 나도 악인이란 말인가 하는 항의였다. 악은 살인, 강도, 강간을 일삼는 범죄자들의 것이지 나와는 무관하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당신 안에도 아이히만이 있다’고 한 셈이니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아렌트의 말은 맞았다. 사람들은 악을 자신과 분리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음습한 곳에서나 벌어지는 일로 가둠으로써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준다. 최근의 탄핵 정국에서 박근혜, 최순실 다음으로 욕을 많이 먹은 이는 아마도 우병우였을 것이다. ‘앞뒤가 똑같은 민정수석’ 우병우를 야유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오히려 씁쓸한 기분이었다. 출세주의 엘리트 우병우와 능력은 없지만 선량하고 평범한 자신을 비교함으로써 대속(代贖)을 받으려는 사람들… 글쎄, 정말 그런가? 가족과 ‘먹고사니즘’을 핑계로 기회만 닿으면 언제든 더 많이 쟁취하고 싶었던 사람이 당신 아니었나?
당신의 ‘혐의 없음’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악을 남의 일로 분리하고 싶은 마음은 내가 속한 사회에 대해서도 무혐의 처분을 내린다. 유대인 협력자들을 부정하고 그것을 온전히 아이히만의 일로 돌려야만 자기들의 순결성이 확보된다고 믿은 이스라엘 정치인들이 그러했다. 일본의 위안부 범죄를 비난하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순결한 열여덟 살 소녀들만 있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창녀와 팔려간 여자는 피해자의 지위조차 얻을 수 없는 지워진 존재들이 되며, 우리들 안의 범죄는 은폐되고 부정된다.
아렌트의 공로는 추상적이고 절대화된 악을 현실의 일로 끌어내린 점에 있다. 인간이 유한한 존재인 한 죄악은 불가피하다는 기독교의 원죄관이 그러하다. 이런 차원의 악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구체적인 악을 평평하게 만들어버릴 뿐이다. 추상화된 악, 얼굴이 없는 악은 개개인 모두에게 면죄부를 주거나, 악을 개개인이 알아서 해결할 문제로 격하시킨다. 그러나 문제는 당신이 참여하고 만들어온 시스템이 악이라는 데 있다.
아렌트는 시스템에 매몰된 사람들이 일상에서 어떻게 악을 수행하는지를 세 가지 요점을 들어 밝힌다. 첫째는 타인에 대한 공감 불능이다. 고도로 조직화된 현대사회가 목적에 부합하는 합리성만을 선으로 치는 효율 만능의 시스템을 만들어냈다는 점은 여러 사상가들이 지적하는 부분이다. 슬픔이나 동정과 같은 감정적 찌꺼기는 프로세스에서 제거해야 할 대상이다. 현대가 받들어온 과학적 이성이 개인을 흩어진 점과 숫자로만 파악하고, 살아 있는 인간을 얼마든지 조작 가능한 대상으로 여기는 데서 아이히만과 같은 공감 불능의 괴물이 탄생하였음은 물론이다.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은 둘째로 반성 능력과 맞닿아 있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에 대해 자기 혼자서는 생각할 줄도 모르는 ‘사유 불능자’라고 표현했는데, 여기서 독자적 사유 능력이란 반성 능력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반성이란 단어는 원래 지나간 일을 후회하는 등의 일상 용법보다는 ‘되돌려 비춘다’는 뜻에 더 가깝다. 타인을 바라보듯 자신에 대해서도 그 행위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능력이다. 이것이 왜 능력이냐면 끊임없는 훈련과 예민한 감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국가가, 사회가, 부모가 하라는 대로 당신 생각을 맡기는 게 편하다면 당신도 아이히만일지 모른다. 당신은 좀더 고독해질 필요가 있다.
이러한 사유의 불능성은 셋째로 자신의 언어가 없다는 것과도 연결된다. 아렌트에 따르면 아이히만의 머릿속은 국가가 주입한 언어로 넘치도록 차 있었다고 한다. 그는 재판에서 ‘살인’이나 ‘학살’ 같은 말은 일절 사용하지 않고 유대인 격리를 ‘청소’ 또는 ‘소독’으로, 학살은 ‘최종 해결책’으로 불렀다고 한다. 나치의 언어 코드는 말단 실행자들의 죄책감을 덜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실제로 아이히만은 유대인들의 참혹한 고통에 깊은 동정을 한 적도 여러 번이지만, 결국 단숨에 고통을 덜어줄 효과적 방법을 찾아내고는 자부심을 느꼈다고 한다. 언어가 없는 이들은 남에게서 빌린 언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으며 그 언어에 묻어 있는 감정까지 함께 가질 수밖에 없다. 당신이 명품 가방을 든 여성을 ‘된장녀’라고 표현하는 순간, 그 여성은 아무 잘못도 없이 명품이나 탐하고 남자에게 빌붙는 한심녀가 된다. 우리는 당신의 말로 당신이 누구인지 알 수밖에 없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이후 학계에서는 아이히만이 평범하고 어리석은 관료가 아니라 어리석음을 가장할 정도로 교활하고 치밀한 출세주의자였다는 연구가 여럿 나왔다. 아렌트가 아이히만에게 속았다는 것이다. 그렇다 해도 그의 논지가 빛바랜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평범한 당신과 내가 불의한 시스템을 인정하고 심지어 앞장서서 그것을 수행하는 순간 악의 일부가 된다는 통찰 말이다. 집에서는 길냥이를 돌보고 주말농장에서 땀 흘리는 살뜰한 당신도, 우리도 아이히만일 수 있다. 회사 일로 부하나 거래처에 모욕적 언사를 서슴지 않는 한 말이다. 불의 앞에서는 침묵하면서 당신의 권리는 알뜰하게 챙기는한 말이다. 거기에는 우리의 욕망 대신 ‘공동의 선’이라는 명분이 늘 있게 마련이다.
- 글
- 안희곤(사월의책 대표)
- 에디터
- 김나랑
- 포토그래퍼
- KIM YOUNG HOON
- 모델
- 이유진
- 스타일리스트
- 원세영
- 헤어 & 메이크업 아티스트
- 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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