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on Ju
동양적 선과 한국의 색채로 응축된 서울 여자, 장윤주. 사진가 어윈 올라프의 뷰파인더 앞에서 장윤주가 20년 모델 이력을 재창조한다. 그리고 배우 유아인이 그녀와 4시간 동안 대화를 나눴다.
일하는 여자 사람 장윤주
5:5로 단정히 빗은 머리 위로 솟구친 기타 가방이 이색적 그림을 만든다. 합정동 뒷골목이 아니라 경리단 꼭대기의 내 집 비디오폰 디스플레이에 펼쳐진 풍경이니 더 그럴 수밖에. 경계를 풀지 않았던 직장 동료, 수없이 만나면서도 둘이서 커피 한 잔 나눈 적 없던 동료 배우가 내 집 초인종을 누른 것은 아마도 처음 있는 일이다. 등에는 기타 가방을, 한 손에는 일용할 양식을, 또 한 손에는 선물 박스를 바리바리 싸 들고 와 그녀가 내 집의 경계를 넘었다. 그렇게 그녀와 4시간을 함께했다. 기도하고, 먹고, 이야기하고, 기타 치고, 노래하고, 정원에 나가 이 맛이 그리웠다며 담배 한 대를 알뜰하게 피운 뒤 그녀는 떠났다. 자신이 가지고 온 것을 정성스럽게 다 풀어놓은 채.
장윤주와 앉았던 식탁 옆에는 그녀가 선물한 일러스트레이터 나난의 ‘롱롱타임 플라워’와 사람 ‘장윤주’에 대한 기억이 반듯하게 놓였다. 몇 해 전, 영화 작업을 함께 하며 알게 된 그녀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 알려진 패션모델이자 앨범 두 장을 발매한 뮤지션이다. 방송 활동도 활발했다. 굵직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특유의 입담과 두려움 없는 슬랩스틱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고, 그녀가 진행한 TV 쇼는 톱 모델로 성장한 수많은 신인 모델을 배출했다. 또 5년간 그 쇼를 진행했고, 그중 2년은 자정 시간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을 겸했다. 커튼이 없던 풍납동 옥탑방 출신의 아침형 인간인 장윤주는 그 많은 일과 일 사이를 제멋대로 오가며 ‘일’했다. 그리고 성취했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질문만이 답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질문이란 것의 가장 아름다운 형태가 ‘도전’이라는 것 역시. 두려움과 설렘을 동시에 드러내면서도 결국 후자에 응답한 그녀의 모든 도전은 결과와 수치에 목매는 세상의 천박한 척도를 벗어나 그 자체로 위대한 성취로 다가왔다. “일을, 그것도 새로운 일을 계속한다는 건 그만큼 연속적으로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는 거야. 하든지, 말든지. 모든 선택의 순간이 다 감사해서 기꺼이 그 많은 일을 해온 건 아니야.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감수하며 그 일에 내 영혼을 쏟아 부을 수 있었던 건 그럼에도 즐길 만한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지. 잠깐의 행복, 그 찰나를 향해서 가는 거야.”
2016년 여름. 장윤주는 지난 20년간 기꺼이 그리고 기똥차게 감당한 일을 잠시 접어두고 강제 칩거에 들어갔다. 그녀의 말을 빌리자면 ‘절대적 시간’을 통해 그녀는 임신과 출산이라는 전에 없던 위업을 이루고야 말았다.“15kg이 쪘어. 다른 엄마들은 육아가 너무 힘드니까 아이가 배에 있을 때가가장 편하다고 하던데 나는 리사를 낳고 나서 더 편해졌어. 몸이 가벼워지니까.” 몸이 가벼운 장윤주가 일을 쉬는 순간은 없었다. 물론 임신 전에는 몸이무거웠던 적도 없을 것이다. 아이를 가진 몸. 장윤주는 일을 하지 않았던 그 1년 남짓한 시간을 ‘절대적 시간’이라고 정의했다. 일을 할 수 없는 시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어떠한 선택도 허락하지 않는 절대적 ‘집안일’의 시간을 지나 가뿐한 몸을 되찾은 그녀는 ‘바깥일’을 향해 다시 세상으로, 타인에게로 향한다. ‘절대적 이유’라는 게 없다면 살아 있는 한 그녀는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무모한 포부로 가득 찬 청춘의 결기 같은 것으로 포장하는 일 없이 그녀는 ‘삽질’을 어설픈 팬터마임으로 모사하며 ‘일’하는 자신의 모양새와 의지를 유쾌하게 드러낸다.
솔직함과 유쾌함은 주제를 널뛰기하며 마구 뱉어내는 말의 어색한 행간을 단단하게 채워주고 대화 상대의 심각함을 박살 내는 그녀의 강력한 무기다. “귀족 출신 모델 스텔라 테넌트처럼 가만히 있어도 귀티가 줄줄 흐르는 그런 사람이 아니잖아, 나는. 나는 그런 귀티가 없는 사람인가, 자괴감도들고…” 장윤주와 나는 귀티, 부티, 빈티 같은 단어를 콤보로 연발하고는 함께 깔깔대며 웃었다. 일을 그만두고 싶었던 적은 없었냐고 물었던 참이다. 일의 숭고함을 환기하는 그녀지만 그런 투정쯤은 일로 먹고사는, 더럽고 치사해도 기필코 살아가야 하는 모두가 하는 것들이지 않은가. 필연적인 투정의 여부가 궁금한 게 아니라 내 못난 구석에서 일과 타인에 대한 그녀의 인정과 애정이 부러웠다. 배가 아파서 물었다. 다 그만두고 싶었던 적은 없었냐고.
“모델 일을 20년 하는 동안 10년 정도의 시간은 일을 그만두고 싶다는생각을 계속했던 것 같아. 나라는 사람을 계속 포장하며 사는 게 힘들었어. 명품을 몸에 휘감고 그걸 더 잘 보여주는 승부를 펼치는 게 내 일인데, 사실 난 그렇게 럭셔리한 삶을 살지도 않았고, 고작 풍납동 옥탑방 출신이잖아. 계속 ‘척’해야 하는 삶에 부대끼고 자신감도 없었어. 귀족 출신 모델 스텔라 테넌트처럼 가만히 있어도 귀티가 줄줄 흐르는 그런 사람이 아니잖아, 나는. 나는 그런 귀티가 없는 사람인가, 자괴감도 들고.”
자괴감은 과하고 괴리감에 가까울 것이다. 가만히 두었으면 괜찮았을 소외당한 세계. 20년간 그녀를 따라다닌 스포트라이트도 그녀의 영혼까지 비추지는 못했다. 럭셔리 아이템도, 사람들의 박수와 인정도 그녀의 영혼을 살찌우지는 못했다. 그래서 그 수많은 일을 해야만 했던 게 아닐까. “보디(Body)가 전부는 아니야!” “보디로만 평가해서는 안 돼!” 장윤주는 대화 내내 그 말을 수도 없이 반복했다. 그것으로 평가받고 사랑받은 그녀에게는 그것이 한계이고 족쇄였으리라. 정신과 영혼의 자세가 곧 몸의 자세를 만들고 움직임이란 것 역시 그렇다지만 ‘몸’으로 대변되는 모든 결과의 외형을 넘어 대중의 시선이 모델의 내면에까지 닿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녀는 2008년, 스물아홉 살에 첫 음반 <Dream>을 내놓으며 몸의 이야기가 아닌 영혼의 이야기를 노래했다. ‘보디’를 향한 각광 속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당한 내면의 세계를 직접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마저도 5년 가까운 시간을 고민한 결과였는데 거기에는 윤종신의 조언이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모든 것에는 적기가 있다. 40대가 되면 기술적으로 잘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20대의 이야기를 하면 손발이 오그라든다. 지금 할 수있는 건 지금 해라. 준비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인터뷰가 진행되기 몇 달 전 출산 후 흐트러진 몸을 수습하던 그녀는 자신의 복귀에 대한 나의 생각을 물어왔다. 돈, 부기, 휴식, 불안, 대중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고 그녀는 초심으로 돌아가 꿈과 비전을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지금 자신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그 고단한 삶을 살아 여기까지 왔는데 무슨 수로, 어째서 그때의 초심으로 돌아가야 하는가. 나는 그녀에게 현재에 집중하라고 했다. 거기에 지금의 초심이 있다고. 먼 훗날 돌이켜볼 만한 그 ‘초심’ 말이다. 인생에서 처음 맞이하는 매 순간, 우리는 초심을 일궈낼 기회를 날려버리고 지난날의 초심에 얽매이고 어쩌면 그 초심조차 잃어버린 채 지금을 흘려보내고 있지는 않은가.
장윤주는 모델이라는 일의 범위를 가능한 한 모든 방식을 통해 확장해왔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과 대중이 함께 성장시킨 ‘장윤주’라는 확장적인 모델을 가지고 현재의 순간에 와 있다. 그녀가 들려준 윤종신의 말을 더하자면 대중을 상대로 일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주장하는 순간 그 주체는 ‘구려지기’ 마련이다. 주장하거나 평가한다고 결정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인생은 오디션 프로그램이 아니지 않은가.
그녀에 대한 단상
대한민국에서 ‘모델’을 대변하는 장윤주에게 현재 대한민국에서 모델의 역할이란 무엇일지에 대해 물었다. 그 한계와 해법 그리고 방향성에 대한 그녀의 생각도 함께 물었다. “20대 때는 항상 ‘패션모델 장윤주’라고 나를 소개했어. 근데 지나고 보니 나는 말 그대로 수많은 것의 모델일 수 있겠더라고. 단어 그 자체로 ‘모델’ 말이야. ‘롤모델’같이 흔하지만 좋은 말도 있고, 모델하우스도 있고. 으하하하. 우리는 어쩌면 모두 타인에게 어떠한 모델일 수 있어. 음악의 형태, 그림의 형태, 건축의 형태 같은 것처럼 사람으로서의 형태그리고 인생의 형태를 보여주는 모델. 나는 ‘사람 장윤주’라는 세상에 존재하는 하나의 ‘모델’에 가깝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 그렇다면 나는 그랬으면 좋겠어.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고, 진취적으로 살아가는, 선량함을 가진 ‘모델’. 그게 타인에게 비전이 되고 긍정적 영향을 줄 수 있잖아. 누군가 나를 통해 꿈꾸기도 하고. 뭐 꼭 오‘ 드리 헵번처럼 살겠어!’ 그런 건 아니지만 나 역시 어떠한 사명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
그녀는 우리의 대화가 지나고 난 그날 이후 몇 차례 첨언의 문자를 보내왔다. 욕심 많은 내가 기자들에게 그러는 것처럼. 그녀는 위로자가 되고 싶다고 했다. 단단히 ‘쿨병’에 들어 어떤 위로에도 도무지 곁을 내주지 않던 나를 위로한 그녀의 노래가 내게 어떤 의미였는지 그녀 스스로가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관심’이라는 영광을 부여잡고 그 이면의 고통에 신음하는 일은 지금 당장 극단적으로는 내가 겪고 있는 일이지만 조금만 돌아보면 누구라도 감당하고 있는 일이다. 자신을 ‘Showing’ 하는 것이 곧 일의 전부였던 패션모델로 10대의 이른 나이에 데뷔해 갖은 평가와 성취, 오해와 결핍의 삶을 살아온 그녀는 소외당한 자신의 내면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세상 속에서 ‘일’로써 가진 노력과 성취를 오롯이 제 것으로 사유화해 거들먹대지도 않을 것이다. 데뷔 20주년을 맞은 모델 장윤주의 ‘일’, 그 일이 만드는 영향력에 대한 그녀의 성찰은 그녀가 소화한 위대한 디자이너들의 의상 그 이상으로 아름답다.
“일을 통해서 내가 하고자 하는 건 메시지를 전하는 삶이야.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든 위로자가 되고파. 내 삶을 통해. 오늘 네가 느낀 것처럼.” 편집된 이미지로 자신을 드러내고, 타인을 관찰하고, 관계를 맺는 것은 더 이상 모델이나 연예인의 일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기술의 비약에 따라 욕망의 형태를 달리하는 인간 사회에서 현대인들의 삶의 방식은 과거의 소셜라이징 형태를 완전히 밀어내고 모든 개개인을 무대 위로 끌어 올렸다. 집밖의 세상에서 관객에 머물렀던 제 삶의 모든 주인공들이 이제 저마다의 무대를 자신의 단편으로 패셔너블하게 채우고 관심과 애정을 부어줄 관객을 기다리며 살아간다. 이 순간, 소셜 미디어의 존폐를 따지거나 반기를 드는 것은 퍼거슨 할배로 족하다.
장윤주가 들려주는 삶의 이야기는 현재의 시스템을 살아가는 우리를 선명하게 비춘다. 그녀는 온전히 타인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받아들이고 있다. 내 것과 네 것을 가리느라 시비가 끊이지 않는 세상에서 우리가 얼마나 끈끈하게 얽혀 있는지, 서로에게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주며 살아가는지를 그녀는 안다. 책에서 배우거나 누가 가르쳐주어서가 아니다. ‘절대적 시간’을 가르쳐준 리사가 그런 것처럼, 결코 평범하지 않은 인생이 그녀에게 남긴 흔적이다. 그녀는 그것을 번뜩이는 훈장으로 자랑질하지 않는다. 모든 과정에 대한 의문에 파묻혀 번뇌로 허송세월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녀는 대신, 그 남들과 조금 다른 삶의 흔적이 남은 자신을 세상을 통해 긍정적으로 사용하는 방식을 고민하고 있다.
우리가 닿은 피부와 피부, 시선과 시선의 저편에 무엇이 있을까. 그것과 가장 무관한 화려한 일로 세상에 이름을 남긴 장윤주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삶의 자세다. 저마다의 장벽으로 담장을 이룬 세상에서 그 너머의 사연과 사람들을 들여다보는 일. 내 집에 들어온 건 장윤주인데 내가 이만큼 장윤주의 세상을 들여다보았다.
세상이 일터이고 그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필연적 사건을 마주하며 살아가는 것이 곧 일이다. ‘일하는 장윤주’ 그녀는 데뷔 20주년을 맞아 진행된 인터뷰(를 가장한 수다) 내내 화려했던 왕년의 기억을 늘어놓는 대신 담담하게 다음 20년을 기약하고 있었다. 그녀가 지나온 런웨이의 길이가 얼마나 되는지 따위를 상상하는 일은 무의미하다. 우리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그런 그림으로 장윤주를 기억한다. 그녀는 그 기억을 소중히 보듬을 것이나 결코 거기에 머물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경리단을 떠나기 전 자신의 목소리로 불러준 김광석의 노래처럼 ‘바람이 불어오는 곳’, 그곳으로 스며들고 있다. 설렘과 두려움으로 불안한 행복을 향해. 꿈에 보았던 그곳으로. 그녀가 세상에 건넬 위로가, 여기에서 보아도 눈부시다. 그녀를 바라본 수많은 시선 중 하나에 지나지 않을 나의 단상이 그녀를 조금 덜 외롭게 하기를! 그녀가 내게 건넨 위로처럼.
바람이 불어오는 곳, 그곳으로 가네. 그대의 머릿결 같은 나무 아래로. 덜컹이는 기차에 기대어 너에게 편지를 쓴다. 꿈에 보았던 길, 그 길에 서 있네. 설렘과 두려움으로 불안한 행복이지만 우리가 느끼며 바라본 하늘과 사람들. 힘겨운 날들도 있지만 새로운 꿈들을 위해. 바람이 불어오는 곳, 그곳으로 가네.
- 글
- 홍식 A.K.A. 유아인
- 에디터
- 김미진, 남현지
- 포토그래퍼
- ERWIN OLAF
- 모델
- 장윤주
- 헤어 스타일리스트
- 한지선
- 메이크업 아티스트
- 이지영
- 세트 스타일리스트
- 최서윤 (Da;r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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