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화보

Capturing CALVIN KLEIN

2017.10.10

Capturing CALVIN KLEIN

샌더와 크리스찬 디올을 비롯해, 자기 이름을 딴 브랜드에서 성공을 거둔 라프 시몬스는 거대 패션 기업의 크리에이티브를 떠맡았다. 현재는 필립스 반 호이젠이 소유한 84억 달러 규모의 캘빈 클라인이다. 벨기에 출신인 49세의 시몬스는 캘빈 클라인 데뷔로 패션계를 현혹했다. 지난 2월의 데뷔 쇼 이후 처음으로 깊이 있는 인터뷰를 한 라프 시몬스는 지금 미니멀리즘의 전설인 캘빈 클라인 하우스에 활기를 주입하고 있다.0917-VF-6RAF583-01

“사실 저는 패션으로 시작한 게 아니었습니다. 아트, 디자인, 영화, 음악에 관심을 가졌고, 패션은 마지막으로 찾아온 거죠. 지금은 패션 일을 하지만… 만약 숨 쉬는 공기처럼 내게 필요한 것이 뭐냐고 물으면 그건 아트입니다. 저는 꾸준히 아트를 가까이해야 해요. ‘오늘 저녁에는 작품을 봐야지’ 정도가 아니라 하루 종일 봐야 해요.”

지난 2월 뉴욕 패션 위크에서 캘빈 클라인 데뷔 쇼를 성공적으로 마친 패션 디자이너 라프 시몬스(Raf Simons)가 말했다. 벨기에에서 태어난 그는 현재 49세다. 작년 8월, 시몬스는 거대하지만 정체를 겪던 84억 달러짜리 기업 캘빈 클라인의 CCO가 됐다. 그는 여성복, 남성복, 진, 언더웨어, 리빙용품, 향수를 관리하고 광고, 마케팅, 커뮤니케이션까지 전부 맡게 됐다. 필립스 반 호이젠이 2002년에 캘빈 클라인을 사들이고 캘빈 자신이 회사를 떠난 이후 디자이너 한 명이 이 정도의 역할을 맡은 것은 처음이다. 시몬스는 오래전부터 전 세계 패션 매체의 사랑을 받아왔다. 그가 1995년부터 앤트워프에서 디자인한 아방가르드한 남성복 라인도, 그가 질 샌더(2005~2012년)와 크리스찬 디올(2012~2015년)에서 선보인 하이엔드 스타일의 부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니 그가 캘빈 클라인을 책임지게된 것을 캘빈 클라인이 다시 돌아온 것처럼 환영한 것도 놀랄 일은 아니었다. <하퍼스 바자> 편집장은 시몬스의 데뷔 쇼 전날에 “우리는 모두 엄청나게 흥분해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바니스 뉴욕의 제니퍼 선우는 “라프는 대단한 선각자입니다. 그가 캘빈 클라인을 변신시키고 지금까지보다 훨씬 더 요즘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게 만들 능력이 있다고 확신합니다”라고 말했다.

기대가 컸던 지난 2월 뉴욕에서 열린 쇼는 성공적이었다. 캐시 호린은 <뉴욕 매거진> 리뷰에서 “캘빈 클라인은 새로워졌다”는 헤드라인을 썼다. <워싱턴 포스트>의 로빈 기브한도 “Calvin Klein is renewed”라고 썼다. 여성복과 남성복을 함께 보여준 이번 컬렉션은 캘빈 클라인이라는 브랜드의 핵심적인 두 요소인 미니멀리즘과 미국적인 면을 아이러니한 장식으로 뒤틀어 새롭게 보여줬다. 검은색 가죽 바이커 재킷에 은색 장미를 넣거나, 베이식 블랙 저지 드레스의 가슴 아랫부분에 슬릿을 넣는 등. 셔츠 없이 입는 멋진 회색 남성 수트, 플라스틱 안에 깃털로 장식한 칵테일 시프트 드레스 등도 선보였다. 여성용 밝은 노란색 레인 코트, 남성용 글렌 플래드 더블 브레스티드 오버 코트를 투명한 플라스틱으로 감싼 것은 경제적으로 부유했던 1950년대 미국 교외의 가족들이 소파를 감싸던 방식을 은유했다. 캘빈 클라인의 옛 모델이었던 브룩 쉴즈와 로렌 허튼은 맨 앞줄에 앉아 박수를 쳤다. 옆에는 줄리안 무어와 기네스 팰트로, 신디 셔먼과 레이첼 파인스타인, 래퍼 에이셉 라키, 다이앤 본 퍼스텐버그가 앉아 있었다. 퍼스텐버그는 나중에 내게 말했다. “난 라프가 디올에서 한 디자인도 좋아했지만, 그에게 캘빈을 맡긴 건 디올보다도 더 좋은 아이디어인 것 같아요.” 타미 힐피거의 기업 역시 캘빈 클라인이 속한 PVH 소유다. 힐피거는 축하 전화를 걸었다. “온라인으로 봤습니다. 훌륭한 쇼였고, 라프는 소비자와 패션계 양쪽 모두를 이해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쇼는 맨해튼 미드타운에 있는 캘빈 클라인 본사 1층에서 열렸다. 라프의 가까운 친구이자 자주 협업해온 아티스트 스털링 루비가 1층 공간을 설치 아트워크로 꾸몄다. 루비는 LA의 화가이자 조각가, 도예가다. 천장에는 미국적 클리셰와 심벌이 매달려 있었다. 야구 배트, 폼폼, 대걸레, 양철통, 푸른 데님 시트, 너덜너덜한 깃발 등등. 루비의 대표작인 부드러운 조각과 꾸미지 않은 파운드 오브제가 섞여 있었다(루비가 입던 검은 캘빈 클라인 브리프도 있었다). 캘빈 클라인 본사는 17층짜리 아르 데코 양식 빌딩인데, 루비는 1층부터 3층까지 검게 칠했다. 12층의 쇼룸에 광택이 있는 크롬 테이블과 의자를 놓고 빨강, 하양, 파랑을 뿌린 캔버스가 벽을 뒤덮었다. 시몬스에 따르면 이건 “추상화된 성조기”라고 한다. “이 공간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 전 즉시 스털링을 데려왔어요. 그 뒤로 더 많은 이야기를 지금도 계속하고 있죠.”

스털링 루비의 커다란 작품 두 점과 아주 커다란 신디 셔먼 사진이 10층에 있는 천장이 높은 커다란 흰색 사각형 방인 시몬스의 사무실을 압도하고 있다. 풍만한 양감의 빨간색 플러시 소파는 20세기 중반의 프랑스 디자이너 장 로이에(Jean Royere) 작품이다. 이 소파에는 안락의자 두 개가 딸려 있다. 유리와 나무로 된 커피 테이블은 1950년대 지오 폰티(Gio Ponti) 작품이다. 테이블 위에는 꽃병 두 개가 있고, 한쪽에는 진홍색 작약이, 다른 쪽에는 파란 수국이 꽂혀 있다. 시몬스 책상 위의 도자기 물병은 어디 것이냐고 물어보자 그는 피카소 작품이라고 대답한다. “저는 피카소와 워홀의 열렬한 팬이에요. 또 발튀스를 좋아합니다. 고양이들과 두 어린 소녀들이 나오는 작은 크기의 발튀스 작품이 아래층에 있는데, 거기에 푹 빠져 있어요.” 그는 루비, 마크 랜더, 앤 콜리어 등 자기 세대 아티스트의 작품으로 컬렉팅을 시작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제 흥미를 북돋운 것은 예전 세대, 주로 여성 아티스트들이었어요. 작품을 사들일 여력이 생긴 지금은 전부 수집하고 있다. 캐디 놀란드, 신디 셔먼, 로즈마리 트로켈, 이자 겐츠켄. 저는 그들에게 완전히 빠져 있고, 그 세대 남자들도 좋아합니다. 찰스 & 레이 임스, 리처드 프린스, 크리스토퍼 울.” 그는 조지 콘도와 고 마이크 켈리를 얼른 덧붙인다.

예술에 대한 이런 대화가 허세로 보일지 몰라도, 시몬스의 유쾌하며 진심 어린 태도와 꾸밈없는 플라망(벨기에 북부에서 사용하는 네덜란드어) 억양 때문에 생기가 넘친다. 그는 물론 지성과 교양을 갖추고 있지만, 그와 대조되는 평범한 사람 같은 느낌도 난다. 49세인 그는 키가 크지도 작지도 않고, 몸집 역시 비대하지도 마르지도 않았고, 짧은 갈색 머리는 고전적 로마 스타일로 앞으로 빗었다. 그의 외모에서 가장 시선을 끄는 것은 그의 큰 코발트 블루색 눈이다. 말할 때 상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기 때문에, 시몬스가 풍기는 정직함과 안정감이 더욱 강하게 느껴진다. 그는 심플하고 패셔너블한 차림이다. 검은색 프라다 개버딘 팬츠, 검은색 발렌시아가 모터사이클 부츠, 로버트 메이플소프의 이미지가 아래쪽에 스크린 인쇄가 되어 있는 오버사이즈 라이트 블루 코튼 셔츠. 이 셔츠는 메이플소프 재단과 협업한 2017 봄 라프 시몬스 남성복 컬렉션 중 하나다. 그가 키우는 보스롱종 개 루카를 위해 사무실 문밖에 놔둔 개 침대조차 예술 작품이다. 쇼룸에 있는 것과 같은, 스털링 루비가 물감을 뿌린 것이다.

“패션을 두려워하는 예술가들이 많습니다. 자신들의 이미지에 해가 될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저는 패션을 두려워하지 않는 예술가가 좋습니다. 그 궁극적인 예가 스털링입니다.” 물론 시몬스와 루비 이전에도 함께 일한 디자이너와 예술가는 있었다. 달리는 1930년대에 스키아파렐리와 함께 ‘랍스터 드레스’를 디자인했다. 할스톤은 1970년대에 워홀의 ‘꽃’을 사용한 드레스를 만들었다. 좀더 최근에는 제프 쿤스가 고전 명작을 사용해 루이 비통 핸드백을 디자인해 논란이 됐다. 하지만 이들은 대부분 한 번의 실험으로 끝난 경우이다. 라프와 스털링은 벌써 10년째 함께 작업을 하고 있다. 그들이 만난 것은 10년도 더 전, 당시 루비의 딜러였던 마크 폭스를 통해서였다. 폭스가 시몬스를 데리고 루비의 LA 스튜디오에 갔다. 2008년에 루비는 도쿄의 라프 시몬스 매장 디자인을 도왔다. 다음 해에는 작은
데님 컬렉션을 함께 만들었고, 2014년에는 라프 시몬스×스털링 루비 남성복 라인을 리미티드 에디션으로 선보였다. 손으로 직접 그린 캔버스 파카의 가격은 3만500달러였다. 시몬스가 디올에서 만든 첫 꾸뛰르 컬렉션 중 가장 아름다운 것은 루비가 그린 추상화의 감각적이고 흐릿한, 그린과 핑크 줄무늬를 재현한 소재로 만든 옷이었다(비슷한 그림 한 점이 2013년 초에 크리스티 경매에서 170만 달러에 팔렸다).

“제 예전 스튜디오 매니저는 라프를 다른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형제라고 불렀죠.” 루비는 시몬스보다 네 살 어리다. “저는 펜실베이니아의 농장에서 자랐습니다. 시몬스는 벨기에 쪽 플랑드르 지방의 아주 작은 시골 마을에서 자랐죠. 우리 둘은 벗어나고 싶었어요. 지금 우리는 둘 다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며, 우리가 하고 있는 게 뭔지 파악하려 애쓰고 있습니다. 라프 시몬스는 벨기에 네이르펄트에서 1968년 1월 12일에 태어났다. 군 야간 경비원 자크 시몬스와 청소부 알다 베커스 사이의 외아들이다. 네이르펄트는 네덜란드와 독일 국경과 가깝다. “거긴 마을이에요. 할 일이 전혀 없었어요. 부티크, 갤러리, 영화관, 아무것도 없었죠.” 그는 엄격한 가톨릭 고등학교를 다니며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배웠다. 온통 검은 옷을 입고 디페쉬 모드(Depeche Mode)와 야주(Yazoo) 등의 영국 뉴웨이브 밴드를 숭배하던 몇 안 되는 아이들 중 하나였다. “보통 부모님들이 원하는 진로는 의사나 변호사였어요. 저로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죠.” 그는 CNN에서 방영하던 <스타일 위드 엘사 크런치(Style with Elsa Klensch)>를 통해 처음으로 패션에 눈을 떴다. “저는 그 프로그램에 매료됐습니다. 전 세계 패션 디자이너들이 나왔어요. 몬타나, 뮈글러, 일본 디자이너 등이었죠. 저는 패션을 공부할 수 있다는 걸 몰랐어요. 그림이나 조각을 공부할 수 있다는 것도 몰랐죠. 누구도 말해주지 않았어요. 우리 부모님은 완전히 다른 세계에 있었습니다.”

1986년에 그가 가까운 도시 헹크(Genk)의 비주얼 커뮤니케이션 연구소에 들어가게 된 것은 거의 우연에 가까웠다. 그는 5년 동안 산업 디자인과 가구 디자인을 공부했다. 4년 차일 때 시몬스는 월터 반 베이렌동크의 스튜디오에서 인턴으로 일했다. 베이렌동크는 드리스 반 노튼, 앤 드멀미스터 등과 함께 ‘앤트워프 식스’로 불리는 벨기에 아방가르드 패션 디자이너 중 한 명이다. 그들은 1980년대 초에 앤트워프의 왕립예술학교를 졸업한 뒤, 80년대의 앤트워프를 북부에 있는 꼬마 밀라노로 탈바꿈시켰다. 반 베이렌동크는 시몬스를 파리에서 열린 마르탱 마르지엘라 쇼에 데려갔다. 역시 벨기에 출신인 마르지엘라는 놀이터에서 동네 아이들이 모델들 옆을 뛰어다니는 쇼를 연출했다. 시몬스가 본 첫 패션쇼였고, 그는 자신의 감정적 반응이 격렬한 데에 놀랐다.

헹크에서 학교를 마친 그는 몇 년 동안 앤트워프에서 가구 디자이너로 자리를 잡으려 애썼다. 1995년에는 라프 시몬스 남성복 레이블을 론칭했다. 깡마른 길거리 아이 두 명이 등장하는 영상을 곁들였다. 이 무렵에 그는 그 뒤로 5년 동안 함께 살게 될 여성 베로니크 브랑키노를 만난다. 브랑키노는 왕립예술학교를 막 졸업하고 자신의 여성복 라인을 시작한 참이었다. 다음 해에 시몬스는 파리에서 첫 런웨이 쇼를 선보인다. 영국-미국 대학생 룩에서 군더더기를 제거하고 전부 블랙으로 구성한 의상을 벨기에 소년들이 입고 나왔고, 포스트펑크와 뉴웨이브 음악을 크게 틀었다. “그는 즉시 성공을 거뒀고 그 영향도 컸습니다. 그가 이끌면 다른 이들도 따랐죠.” 당시 프랑스 <보그> 편집장이었던 조안 줄리엣 벅이 나중에 쓴 글이다.

시몬스는 유스 컬처, 유스 컬처의 큰 부분을 구성하는 어두운 음악에서 주로 영감을 얻었지만, 그는 1990년대를 지배한 미니멀리스트 슈퍼스타들의 작업에도 탐닉했다. 헬무트 랭, 미우치아 프라다, 질 샌더, 캘빈 클라인 등이었다. “2년 동안 전 헬무트 랭에 푹 빠졌습니다. 그리고 다른 세 디자이너들에게도 빠졌죠.” 당시엔 예술이 시몬스의 비전에 지금만큼 중요하지는 않았지만, 시몬스와 브랑키노 주위의 신에는 1960년대 워홀 팩토리의 오픈 도어 정책과 가족 같은 분위기가 있었다. 현재 뉴욕에서 잭 포즌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프랑스 작가 크리스토퍼 니케는 1990년대 말 잡지 <셀프 서비스>에 실릴 브랑키노 인터뷰를 진행했고, 곧 그녀의 제의로 시몬스의 모델이 된다. “라프와 베로니크의 디자인 방식에는 시너지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벨기에 패션의 작은 골든 커플 같았어요.” 니케의 말이다.

시몬스-브랑키노 일행들은 앤트워프의 아티스트 바에서 놀았다. 시몬스는 여기에서 사진가 윌리 반데페르(Willy Vanderperre)를 처음 알게 됐다. 반데페르는 그 뒤로 시몬스의 질 샌더, 디올 광고 캠페인 촬영을 맡았다. 이제 캘빈 클라인도 맡게 된다. 반데페르와 그의 남자 친구 올리비에 리조(Olivier Rizzo)는 당시 왕립 예술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었고 브랑키노의 친구였다. 리조는 후에 그들의 광고 스타일링을 맡게 된다. “테라스에 사람들이 잔뜩 앉아 있었는데, 내가 모르는 사람은 라프뿐이었습니다. 검은 터틀넥을 입고 있었는데, 따뜻한 여름 저녁이었기 때문에 눈에 띄었죠.” 반데페르의 말이다.

2000년에 모든 것이 멈췄다. 시몬스는 브랑키노와 헤어졌고 ‘혼란(Confusion)’이란 이름의 컬렉션을 선보인 뒤 회사 문을 닫았다. 그리고 비엔나의 응용 미술대학교에서 패션을 가르쳤다. 하지만 시몬스는 곧 업계로 돌아왔다. 벨기에의 의류 제조 기업 히세만스 클로딩 그룹이 그에게 자금을 지원했다. 그러나 2001년 6월에 그가 컴백해 파리에서 선보인 컬렉션은 하마터면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될 뻔했다. ‘공포 세대에게 침 뱉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바람이 되날릴 것이다(Woe onto Those Who Spit on the Fear Generation… The Wind Will Blow It Back)’라는 불길한 제목이 붙은 이 컬렉션에서는 후드와 마스크를 쓰고 거친 메시지가 적힌 오버사이즈 스웨트셔츠를 입은 모델들이 불꽃을 들고 등장했다. 처음에 혁신적이고 시적이라는 찬사를 받았던 이 컬렉션은 3개월 후 미국에서 9·11테러가 일어나자 무신경한 테러리스트 취향이라고 규탄을 받았다. 논란은 잦아들었지만, 시몬스의 새로운 방향은 계속해서 그의 시그니처 라인을 정의하는 요소가 됐다. 몸통 중간에서 잘라낸 크고 거친 니트 아래에 블랙이나 화이트 셔츠를 길게 받쳐 입는 룩이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저는 언제나 두 가지를 해야만 합니다.” 시몬스는 그 시기에 예술, 사진, 출판 프로젝트를 진행한 이야기를 내게 들려줬다. 이 모든 프로젝트는 동시대와 문화에 대한 예술적이고 사회적 의식이 있는 관찰자라는 그의 명성을 높여줬다. 그는 1999년에 영국 패션 사진가 데이비드 심스와 함께 첫 책 <Isolated Heroes>를 냈다. 시몬스가 앤트워프 거리에서 캐스팅한 젊은 노동계급 남성들의 삭막한 클로즈업 사진들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탈리아의 큐레이터 겸 예술 작가 프란체스코 보나미가 피렌체에서 대규모 전시를 도와달라고 연락을 해왔다. 예술뿐 아니라 패션도 다루는 전시였다. 피티궁전 미술관에서 2003년에 열린 이 전시의 제목은 ‘네 번째 성: 사춘기의 극단(The Fourth Sex: Adolescent Extremes)’이었고, 같은 제목의 책도 나왔다. 제이크와 다이노스 채프먼 형제, 트레이시 에민, 길리언 웨어링 등이 작품을 선보였다. 이 기간 내내 그는 비엔나에서 초빙 강사로 일했다. 그는 가르치는 것을 좋아한다. “질 샌더에 자리가 나서 도저히 계속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만뒀죠.”

2005년 5월에 앤트워프 출신의 37세 라프 시몬스가 질 샌더 남녀 컬렉션 디자인을 맡게 됐다는 발표가 나오자 패션계 사람들 대부분은 놀랐다. 질 샌더는 함부르크에서 회사를 시작해 성공시킨 다음 1999년에 프라다에 팔고 나서도 디자이너겸 사장으로 남았다. 6개월 뒤 프라다 CEO 파트리치오 베르텔리와 충돌해 질 샌더를 떠난 그녀는 2003년에 돌아왔다가 2004년에 다시 나갔다. 시몬스가 2006년에 처음 선보인 여성복 컬렉션은 블랙과 중간색을 선호한 샌더의 원칙을 따르면서, 독일 작센 지방풍의 엄격함은 부드럽게 한 것이었다. 2012년 초의 마지막 컬렉션쯤 와서 그는 샌더의 미니멀리즘을 완전히 낭만화하여, 팬츠 수트가 아닌 드레스를 강조했고, 감미로운 핑크색도 많이 사용했다. 질 샌더를 새로 구입한 일본의 온워드 홀딩스는 곧 시몬스를 내보내고 디자이너 질 샌더를 다시 데려왔다. 한편 디올에서 인종차별 발언으로 문제를 일으킨 존 갈리아노를 대체할 디자이너 후보 중 하나로 시몬스를 고려하고 있다는 소문이 몇 개월 동안 돌았다. 2012년 4월에 그가 선택됐다는 발표가 드디어 나왔고, 시몬스는 애타게 기다려온 오뜨 꾸뛰르 데뷔를 피에르 가르뎅, 아제딘 알라이아, 도나텔라 베르사체, 마크 제이콥스, 샬롯 램플링, 제니퍼 로렌스, 모나코의 샤를린 왕비, 디올의 소유주 베르나르 아르노 LVMH 사장 같은 사람들 앞에서 하게 됐다. 시몬스는 쇼장을 자신의 아이디어를 반영한 설치 미술로 변신시켰다. 엄청난 양의 난초, 장미, 참제비고깔, 미모사로 모델들이 걸어 들어오는 살롱 벽을 뒤덮었다. 놀라움을 주는 요소이기도 하지만, 시몬스는 크리스찬 디올의 정원과 꽃에 대한 사랑에 보내는 경의의 의미도 이 장엄한 디스플레이에 담았다. 컬렉션은 디올의 전설적인 1947년 뉴 룩을 21세기에 맞게 지적으로 재발명했다고 엄청난 찬사를 받았다. <WWD>의 브리짓 폴리는 “브라보, 라프. 축하해요, 디올”이라고 기사를 썼다.

시몬스는 말했다. “디올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20세기 중반 디자이너였나? 아니에요. 발렌시아가예요. 하지만 디올의 작품 세계는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죠. 제가 그의 디자인에 뭔가를 추가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그가 저의 궁극적 영웅이 아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는 디올에서 3년을 일한 뒤 2015년 10월에 원만하게 나왔다. 10개월 후 그는 뉴욕으로 옮겼다. 설립자가 없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다른 기업의 디자인을 책임지기 위해서였다.

“패션 브랜드에 언제나 유산은 있습니다.” 시몬스는 지난 12년 동안 질 샌더, 크리스찬 디올, 캘빈 클라인으로 옮긴 것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굵직한 유산이 없는 곳엔 갈 수 없어요. 제가 뭣하러 가겠어요?” 그는 캘빈 클라인이 설립된 것이 라프가 태어난 1968년이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는 그 사실에 크게 압도되지도 않고, 대부분의 수익을 언더웨어와 진으로 벌어들이는 이 브랜드와 함께 물려받은 문제를 크게 걱정하지도 않는다. 클라인과 그의 사업 파트너 배리 슈워츠가 2002년에 PVH에 기업을 매각했을 때(현금과 주식으로 4억3,000만 달러를 받았고, 15년간 로열티를 받기로 했다고 한다), PVH는 클라인이 맡던 다양한 라인의 디자인을 여러 디자이너들에게 나눠 맡겼다. 광고와 마케팅 의사 결정은 기업 이사들에게 넘겼다. 그러므로 CCO라는 새 직함을 맡은 시몬스는 디자이너 네 명을 대체한 셈이다. 여성복의 프란시스코 코스타, 남성복의 이탈로 주첼리, 진과 언더웨어의 케빈 코리건, 가정용품의 에이미 멜렌이다. 클라인처럼 시몬스는 모든 걸 맡게 되었다. 그는 평소처럼 체계적이고 철학적인 방식으로 이 임무에 접근하고 있다.“캘빈의 유산과 마케팅력에 대해 말하고 싶은 게 있다면, 저는 이걸 내 머릿속에서 추상화시킨 다음에 어떻게 다룰지를 알아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캘빈의 옷에 대해 묻는다면, 사실 지금으로선 난 별로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존중할 생각이 없어서가 아니에요. 그보다는 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브랜드를 어디로 끌고 가고 싶은지 명확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클라인은 배짱이 두둑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늘 작은 포맷으로 촬영해서 광고하던 언더웨어 같은 것을 도시 한복판에 5m짜리 빌보드로 광고하는 사람에게 저는 매료돼요. 저는 그런 사람입니다. 과감하게 용기를 내죠.”

시몬스는 프랑스인 남자 친구 장 조지 도라지오(Jean-Georges d’Orazio)와 함께 작년 여름에 뉴욕으로 집을 옮긴 후 아주 바빴다. 도라지오는 캘빈 클라인 브랜드 경험 파트의 고위 디렉터가 됐다. 오랫동안 함께 디자인해온 피터 뮐리에 (Pieter Mulier)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합류했다. 윌리 반데페르와 올리비에 리조는 새 언더웨어 광고 캠페인에 참여했다. 다양한 인종의 앙상한 소년들이 별로 타이트하지 않은 흰 언더웨어를 입고 워홀, 댄 플래빈, 리처드 프린스, 스털링 루비등의 작품 앞에 선 모습이었다(<뉴욕 타임스>는 참지 못하고 “과거 캘빈 클라인 모델들의 몸은 언더웨어 밖으로 터져나올 것 같았다… 라프 시몬스의 모델들은… 언더웨어를 다 채우지도 못하는 것 같다”고 언급했다). 스털링 루비는 매디슨 애비뉴에 있는 캘빈 클라인 플래그십 매장의 리뉴얼을 맡았다. 열광적 반응을 받았던 첫 캘빈 클라인 컬렉션을 공개하기 9일 전, 2월에 시몬스는 자기 이름의 남성복 라인을 뉴욕 첼시의 가고시안 갤러리에서 공개했다. 그가 재미없었던 뉴욕 남성복 패션 위크의 구세주라는 리뷰가 쏟아졌다.

4월에는 개인 고객을 위한 주문 제작 서비스인 캘빈 클라인 바이 어포인트먼트(Calvin Klein by Appointment)를 소개했다. “꾸뛰르예요. 그저 오래된 프랑스 단어를 쓰기 싫었을 뿐이죠.” 5월에는 패리스 잭슨을 데리고 메트 갈라에 갔다. 며칠 뒤 <Page Six>는 그녀가 “캘빈 클라인의 새 얼굴이 되기로 하고 1,000만 달러 단위의 계약을 했다”는 뉴스를 보도했다. 시몬스는 “저는 그 정도의 배경을 가진 사람이 독립적 위치를 취하는 페르소나를 지녔다는 것에 매료됐습니다. 그녀 안엔 아름다운 음과 양이 있습니다. 아주 수줍은, ‘난 지나친 하이프(Hype)는 피하고 싶어’라는 태도가 있어요.” 6월엔 브룩 쉴즈가 돌아온다는 발표가 나왔다. 카메라를 보고 “나와 내 캘빈 사이에 뭐가 있는지 알고 싶어요? 아무것도 없어요”라고 말하던 악명 높은 TV 광고 이후 37년 만이다. 게다가 6월에 미국 패션 디자이너 위원회는 라프 시몬스를 남성복 최고 디자이너, 여성복 최고 디자이너로 선정했다. 이런 영예를 누린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1993년에 두 상을 다 받은 캘빈 클라인이다. 시몬스는 말한다. “정말 엄청났어요.” “저는 오늘 아침에 캘빈을 처음 만났습니다. 웨스트 빌리지의 산탐브라우스에서 아침 식사를 했어요. 아주 좋았어요. 편했고요.” 시몬스는 “진작 만났어야 했지만, 저는 밤낮으로 일하기 시작했고, 그는 아주 많이 돌아다녔습니다. 이제야 만났고, 모든 것이 좋습니다”라고 말했다(캘빈 클라인은 이번 기사에 코멘트하기를 사양했다).

시몬스는 자신의 첫 임무는 캘빈 클라인의 전성기에 브랜드가 누리던 소비자 로열티를 복구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제가 패션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을 때, 남녀들은 한 하우스나 몇몇 하우스를 선택했지만, 보통 선택하는 브랜드가 한정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브랜드에 단단히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제가 파리에서 쇼를 보러 다니기 시작했을 때, 저는 꼼데가르송 여성복, 마르탱 마르지엘라 여성복, 고티에 여성복 등을 봤습니다. 이제 여성들은 가방은 이 브랜드, 구두는 저 브랜드, 스커트는 또 다른 브랜드를 삽니다. 하지만 이 세 브랜드가 상징하는 바는 서로 완전히 달라요. 저는 코카 콜라 제로에 무척 헌신적이에요. 다른 것은 원하지 않아요. 우리가 패션 브랜드와 그런 관계가 될 때, 그건 옷 때문만이 아니에요. 옷과 패션은 서로 다른 것이니까요.”

“디자이너가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만족은 누군가가 제 옷을 입은 것을 볼 때 옵니다. 그게 누구든 상관없습니다. 길거리의 아이일 수도 있어요. 큰 영감을 주죠. 제가 그 옷을 보던 방식과는 다를 때가 많기 때문이에요. 사람들에게 어떻게 옷을 입혀야 하는가에 대한 사고 과정을 다시 가동시킵니다. 제게 있어서는 패션이 그때 그 순간에 어떻게 작용하는지가 지극히 중요해요. 과거에 대해 로맨틱한 감정은 없어요. 끝난 건 끝난 거예요. 전 미래에 대해 로맨틱합니다.” 레이 가와쿠보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회고전을 가졌다. 시몬스도 그런 걸 꿈꿀까? “아니요.”

패션이 미술관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아니요.” 자신이 예술가라고 생각하나요? “아니요.” 하지만 예술을 하고 싶어질지도 모르겠어요. 일단 패션 디자이너로 규정되고 나면 사람들이 비판할 거라는 걸 알아요. 하지만 그건 완전히 다른 거예요. 그건 오직 제가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느끼는 발언일 것이고, 저는 그 목소리를 낼 것입니다. 만약 하고 싶어진다면, 그건 아마 그저 내가 뭔가를 해야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제 일을 하지 않으면 미쳐버릴 거예요. 아이디어는 어떤 식으로든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BOB COLACELLO
    포토그래퍼
    JACK PIER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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