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에 간 무라카미, ‘귀여움과 대참사’에 대한 모든 것
아티스트 무라카미 타카시는 지난 2000년 일본 사진작가 아카사 마코와 함께 한 <현대 미술 저널(Journal of Contemporary Art)>과의 인터뷰에서 현대 미술 시장에서 살아남아 성공할 수 있는 규칙들을 제시했다(그는 데미안 허스트와 지금도 유의미하게 다가오는 피카소와 워홀이 가장 좋은 예라고 말했다): “먼저 예술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점하라. 둘째, 자신의 작품의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표현하라. 그 다음은 섹슈얼리티이다. 그리고 그 다음은 죽음이다. 죽음에서 무엇을 발견했는지를 보여줘라. 이런 사이클을 적절하게 반복하면 그 아티스트는 살아남을 수 있다.” 거의 20년이 지난 지금 모스크바의 거라지 현대 미술관(Garage Museum of Contemporary Art)에서 열리는 무라카미의 회고전 <Under the Radiation Falls>의 오프닝에서 그 규칙들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걸 확인하는 건 어렵지 않다.
많은 출판물들이 ‘일본의 앤디 워홀’이라 묘사하고, 뉴욕 타임즈 매거진이 ‘아티스트, 큐레이터, 이론가, 제품 디자이너, 사업가, 셀러브리티’라 칭한 무라카미는 30여 년 간의 커리어 동안 예술을 ‘럭셔리 오락의 최고 화신’이자 ‘무혈 혁명’이라 불렀다. 그는 도쿄 국립 예술대학에서 공부했고 니혼가(nihonga, 19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유럽과 전통 일본 회화의 세련된 혼합체)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고급’ 예술 대 ‘저급’ 예술로 양분하는 서구의 사고방식을 타파하는데 니혼가를 사용했고 2000년에는 아니메(일본 만화 영화)의 영향을 받은 자신의 스타일을 표현하기 위해 ‘슈퍼플랫(superflat)’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냈다. “미술과 대중적인 상품 사이의 구분은 완전히 비일본적이라는 것이 무라카미가 생각하는 원칙 중 하나다”라고 2005년 뉴욕 타임즈 매거진은 썼다. 이 잡지는 “메이지 유신으로 서구문물을 받아들이던 1868년에 일본에는 ‘미술’에 해당하는 단어조차 없었다. 그 후에야 그들은 외국의 ‘아트’이라는 개념을 수입했고 그에 해당하는 단어를 만들어냈다”고 설명했다. 고급과 저급 사이의 이런 모호함은 일본의 전통이라고 무라카미는 말한다. 그것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집중적으로 비난을 받긴 했지만 말이다.
무라카미는 카니에와 퍼렐 같은 뮤지션들과 루이 비통과 반스 같은 브랜드들과 협업을 해 왔고, 소더비 경매장에서 여러 번 기록을 세웠으며(“무라카미의 목표가 자본주의와 예술의 관계를 발견하는 것이라면 그의 작품 ‘My Lonesome Cowboy’-올가미 밧줄 모양으로 소용돌이치는 정액을 잡고 있는 노란 머리의 소년을 묘사한-가 1500만 달러에 팔렸을 때 그 목표는 달성된 듯 보인다”라고 파이넨셜 타임즈는 2015년에 썼다), 일본과 뉴욕에 카이카이 키키(Kaikai Kiki)라는 예술품 제작 및 경영 회사를 설립했고, 최근엔 <Jellyfish Eyes>(2015년작)로 극영화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올해만 해도 스칸디나비아에서 개인전 <Murakami by Murakami>가 열렸고, 시카고 현대 미술관에선 회화에 집중된 <The Octopus Eats Own Leg>전이 열렸으며 그 직후에 거라지 미술관 회고전이 이어졌다. 그렇다. 이 과정에서 그가 초기에 내세웠던 아름다움, 섹스, 죽음이 등장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모스크바에서도 가능한 건 아니었다.
뉴욕 타임즈가 “1917년 공산 혁명 이후 러시아에 만들어진 가장 오래 유지되어 온 개인 박물관”이라 평한 거라지 현대 미술관은 2008년에 설립된 이후 여러 후원자들의 도움과 박물관 수입과 더불어 대부분 공동 설립자인 다샤 주코바(Dasha Zhukova)와 로만 아브라모비치(Roman Abramovich)의 자금으로 유지되고 있다. 러시아에서 1950년대부터 지금까지 현대 미술의 유일한 공공 아카이브로서(러시아는 수십 년간 실험적인 예술 형태를 규탄해왔고, 외설적인 표현을 법으로 금함으로써 예술을 어느 정도 통제하고 있다) 거라지 박물관은 “국민, 예술, 역사를 창조하는 아이디어들을 위한 장소”로 스스로를 홍보하고 있다. (이곳은 이 나라에서 장애인들을 위해 가장 폭넓은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기도 하다.) 거라지 박물관은 7월에 무라카미 전시회의 준비과정으로 고리키 공원에서 일본 문화를 홍보하는 이틀간의 야외 페스티벌(J-Fest)을 개최했다. 사람들을 초대해서 “꽃꽂이, 종이 접기, 캘리그래피 등을 알리고 바둑과 장기 같은 전통적인 게임을 체험해 보고, 일본 음식과 친해지고, 다도에 참여할 수 있게” 했다. 올해 9월말에 시작해서 내년 2월 초에 끝나게 되는 전시 기간 동안 거라지는 교수들과 예술가들의 강의, 전통 일본 회화에 대한 워크샵, 영화 시리즈, 동작을 맞춰 추는 파라 파라 댄스 대회 등이 포함된 일반인 대상 프로그램을 선보일 예정이다.
거라지의 무라카미 전시회는 러일 관계의 전망이 수십 년 만에 가장 밝은 시기에 이루어졌다. 두 나라는 일본 북부 4개 섬에 대한 분쟁 때문에 2차 세계대전 이후 평화 협정에 합의한 적이 없고 엄밀히 따지면 72년간 전시 상태를 유지해오고 있다. 러시아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은 지난 2004년에 이렇게 말했다. “아시아는 세계, 경제, 그리고 정치에서 그 어느 때보다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발전을 간과할 수 없다.” 그리고 이런 관심은 대체로 러시아와 중국의 관계 강화(중국 시진핑 주석은 7월 현재 두 나라의 관계가 “단연 최고”라고 말한 바 있다)로 해석되었지만 지난 4월 만남 이후 푸틴과 아베 수상은 두 나라가 어떻게 경제 협력을 추진할 수 있을지 조사하기 위해 분쟁 지역에 공동 조사단을 보내기로 합의했다. 두 사람은 7월 G20 회에서 다시 만났고 여기서 아베는 다시 신뢰 문제를 꺼냈다. “평화협정에 합의하기 위해 두 나라 사이에 신뢰를 쌓을 필요가 있다. 이런 맥락에서 협력, 즉 이 섬들에서 생산적인 공동 활동을 전개할 준비가 되어 있다. 우리는 두 나라 사이의 신뢰를 높이고 싶다.”
그러나 위태로운 건 섬 문제만이 아니다. 지난달 블라디보스톡에서 열린 동방경제 포럼에서 푸틴과 아베는 최근 북한의 핵실험을 지역에 대한 “무서운 위협”이라고 비난했지만 북한의 비핵화에 대한 방법에 대해선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했다. 아베는 미사일 방어 기술을 원하지만 일본과 미국의 안보동맹 때문에 몇몇 분석가들은 러시아가 일본을 완전히 독립적인 외교상대로 보지 않는다고 믿고 있다. 일본이 무력하다는 이런 관점 -미국에 의해 어린애 취급 당하는 것처럼 보이는 나라-은 무라카미가 자신의 작품 속에서 파고드는 주제이기도 하다. “우리는 우리가 불리한 입장에 있다는 걸 깨달아야 해요. 하지만 그것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죠. 우리는 미국이 우리의 아버지라는 걸 압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아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우리는 불리한 위치에 있어요. 우린 도움이 필요해요.” 무라카미는 지난 2005년 뉴욕 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거라지의 수석 큐레이터 카티아 이노젬트세바(Katya Inozemtseva)와 그녀의 팀은 전시를 기획하기 위해 2년 동안 4번 도쿄를 방문했다. 이들은 두 개 층에 할애된 전시 공간에 80여점의 작품(조각, 그림, 드로잉, 판화, 영화 등을 포함해서)을 5개의 챕터로 분류했다. ‘게주츠(Geijutsu, 芸術, 학습과 테크닉)’ 챕터에는 푸시킨 국립 미술관에서 빌려온 역사적인 일본 판화들과 회화 작품들이 무라카미의 2015년작 <Lion Peering Into Death’s Abyss>과 그의 <Enso> 시리즈 중 몇몇 그림들과 나란히 전시되어 있다. 2005년 <Little Boy> 프로젝트에서 영감을 얻은 ‘리틀 보이 앤 팻 맨(The Little Boy and the Fat Man)’ 챕터는 원자폭탄 제조, 배치, 그리고 그 후유증을 둘러싼 사건들로 구성되었다. ‘카와이(귀엽다)’ 챕터에는 핑크 벨벳 벽, <Jellyfish Eyes>를 상영하는 방, 그리고 이노젬트세바 팀이 나카노 브로드웨이에 있는 무라카미의 스튜디오 인근에서 구입한 수 천 개의 장난감 피규어들로 가득한 거울 달린 복도가 포함되어 있다. ‘스타지오(스튜디오)’ 챕터에는 무라카미의 스튜디오를 재현해 놓았고 팀원들이 실내에서 신는 싸구려 고무 샌들의 대체 버전이 가득하다. 미술을 전공하는 러시아 학생들을 위한 현장 수업도 준비되어 있다. ‘아소비 & 카자리(놀이와 장식)’ 챕터는 카이카이 키키 세계에서 온 소위 ‘기생하는 장식물들’이다. 그리고 유리창에 활짝 핀 꽃 스티커에서부터 이중 폴리카보네이트로 감싼 건물외부에 투사된 영상에 이르기까지 전체 공간에 침투해 있다. 그리고 화장실 옆에는 함께 포즈를 취할 수 있는 실물크기의 무라카미 스티커가 붙어 있다. 오프닝 날 기자회견에 앞서 무라카미가 직접 참가한 아이들을 위한 미끄럼틀도 있다. 미끄럼틀은 그가 만든 캐릭터인 미스터 도브(Mr. DOB)의 쭉 뻗은 혀를 빠르게 타고 내려오게 되어 있다. (“아주 무서웠어요!”라고 자신의 시그니처인 플러시 천 모자와 반짝이는 무지개 색 가운을 입은 무라카미는 미끄럼을 타고 내려와서 말했다. “어른에겐 추천하지 않아요. 하지만 아이들은 아주 신날 겁니다!”)
섹슈얼리티는 역사적으로 무라카미의 작품에서 큰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그것은 오타쿠 문화(무라카미는 오타쿠를 긱(geek)이라 표현하지만 그것은 만화, 아니메, 그리고 비디오 게임에 사로잡힌 광팬을 뜻한다)와 여성의 신격화와 동시에 대상화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거라지 전시회에선 그런 섹슈얼리티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 주제에 대해 크레믈린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도록 조심했기 때문이다. (바로 지난 여름 ‘러시아 장교들’이라는 애국주의 단체-그들은 자신들의 목표가 “주민의 애국 교육”에 있다고 언명했다-가 미국 사진작가 조크 스터지스(Jock Sturges)가 알몸 노출과 어린이 모델들을 기용했다는 이유로 그의 전시회를 반대했다. 한 시위 참가자는 작품 중 하나에 오줌을 쌌고, 친 크렘린 국회의원과 몇몇 정부 관료들은 그 전시회를 소아성애라고 칭했다. 결국 얼마 가지 않아 전시회는 막을 내렸다.)
거라지의 무라카미 전시회에는 부적절한 작품이 전혀 없다. ‘Lonesome Cowboy’ 류의 작품도, ‘Hiropon(히로퐁, 모유를 뿜으며 뛰어다니는 소녀)’도, 한 때 크리스티에서 기록을 세운 ‘Miss Ko2’ 같은 긴 다리의 웨이트리스도, 카니에 웨스트 같은 사람들을 매료시킨 관능적인 여성 피규어도 없다. 그 결과 이번 회고전은 어느 게스트의 말처럼 “거세” 효과-무라카미의 가장 유명한 작품들은 음란한 영역으로 방향을 튼 작품들이다-가 느껴지는 동시에 전시된 작품에 관심을 집중시킨다. 예를 들어 ‘Time Bokan’(2006년)의 해골 모양 버섯 구름과 수십 개의 미국 장난감 병정들이 빛 기둥을 오르는 ‘Polyrhythm’(1991년), 강판들이 열리면서 원자탄 폭발의 뜨거움을 시각화한 강렬한 투광 조명 고리를 드러내는 1992년 조각 ‘Sea Breeze’ 같은 작품들 말이다.
그래서 우리가 오프닝 전날 박물관 맨 꼭대기 층에 있는 유리벽에 둘러싸인 멤버스 클럽(거라지 PR 담당자가 “아주 웨스 앤더슨스럽다,”고 말한 인테리어 디자인)에 함께 앉았을 때 가장 의미 있게 느껴졌던 건 무라카미 작품의 이런 좀 더 암울한 면들이었다. 무라카미는 핵 낙진(실제 낙진과 감정적인 낙진)에 대해 얘기했다. 특히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투하와 그 결과로 인한 불안, 수치심, 그리고 특히 수십 년에 걸쳐 일본의 무기력감이라고 생각해온 것들에 대해 언급했다. 지금은 점점 커져가는 북미간의 긴장 때문에 다른 국가들도 같은 기분을 느낀다. 8월 말 역사적으로 러시아의 미사일 프로그램과 연관이 있는 우크라이나 공장에서 몰래 구입해 제작한 북한의 시험 미사일이 일본 상공을 지나갔고 일본은 전국에 경보를 발령했다. 일본 시민들은 대피하라는 경보를 전달하는 휴대폰 소리와 TV 소리에 잠을 깼다. 무라카미는 휴대폰의 경보 소리가 “아주 시끄러웠고” 거의 가짜 뉴스처럼 보였지만 북한의 미사일은 “진짜”였다고 말한다.
그의 캐릭터들은 논쟁의 여지가 있는 “소름 끼치는 면”도 갖고 있다. 모두 꼭 껴안고 싶은 커다란 눈의 작은 조각상들이지만 중간 중간에 괴물 같은 요소들이 있다. 무라카미는 올해 초 <사우스 차이나 모닝 포스트>지와의 인터뷰에서 가장 온건하고 귀여운 얼굴들조차 보고 난 후에 그 텅 빈 미소가 머리를 떠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했다. (카와이(귀엽다)와 카와이소(가엾다, 불쌍하다)가 어원이 같은 것에는 이유가 있다.) “2차 대전 후에 우리는 할 말이 없었어요. 그래서 우리는 그저 미소를 지으며 어떤 대화든 긍정적으로 이끌어가려고 노력합니다. 조금 전 신문에서 아베 수상이 미소 짓고 있는 사진을 보았어요. 아베는 도날드 트럼프를 만나러 갔을 때도 미소를 지었어요. 그러나 헬로 키티의 경우처럼 미소를 짓고 있는 수상은 귀엽지만 약간 소름끼치기도 합니다.”
무라카미는 러시아 사람들이 “따뜻하고 개방적”이라고 언급했지만-그는 러시아의 기후 때문에 이런 것을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작품에 대한 “그들의 반응이 어떨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그는 미국인들은 일본인이 거부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작품을 이해한다고 여러 인터뷰에서 얘기한 바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들 자신의 무기력함에 거울을 비추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 시민들이 평생 처음으로 핵전쟁이 실제 가능하다고 느끼고 그 핵전쟁이 한 일본 예술가의 마음에 준 충격을 반영한 예술 작품을 보기 위해 러시아-과거 미국의 핵 불안의 주요 요인이었던 나라-에 올 수도 있는 지금의 상황에 대해 그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무라카미는 자신의 작품은 바뀌지 않았다고 말한다.(이번 전시회에 메탈 톤의 둥근 해골 그림 두 점을 포함해 새로운 작품들이 추가되긴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런 관심의 변화와 “DJ가 리믹싱”하는 것처럼 “완전히 새롭게 편집”한 덕분에 그의 작품에 대한 인식은 바뀔 것이다. 다른 사람의 눈을 통해 자신의 작품을 보는 건 낯선 일이라고 무라카미는 말한다. 처음에 그는 ‘시나리오’나 큐레이터의 시각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모든 작품들이 잘 배치되었는지 보기 위해 모스크바와 와야 했다고 말한다. 핵 질문과 관련해서 그는 아티스트들이 잔인함을 아름다움으로 바꾼 역사가 있다고 말하면서 프란시스코 고야의 작품 ‘1808년 5월 3일’을 언급했다. “그 그림은 너무나 사랑스러워요. 하지만 전쟁은 현실입니다. 그리고 아주 무섭지요.” 그리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폭력을 호감 가는, 혹은 심지어 귀여운 무언가로 표현하는 문제(예를 들어 그의 무지개색 버섯구름의 경우처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저의 성장 배경을 생각해 보세요. 귀여움과 재앙, 그건 아주 다르지만 같은 것에서 나옵니다.” 그는 원폭투하에서 탄생된 또 다른 오해 받는 생명체인 고질라를 예로 들었다. 사람들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방법은 “우리 사회에서 예술을 필수품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무라카미는 자신의 팬덤과 그들의 끊임없는 셀카 요청-블라디미르 레닌과 이시오프 스탈린이 공식적으로 묻혀있는 하우스 오브 유니온에서 열린 애프터 파티에서 그는 포위된 채 불가능할 정도로 많은 아이폰을 위해 포즈를 취했다-에 지치면 말을 하지 않는다. 그는 영화에 더 집중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그는 어린 시절 무서운 영화들과 TV 쇼에 자극 받고 쉽게 위로 받았던 것처럼 영화를 만드는 일이 현실의 공포를 쏟아 붓는 방법일 뿐만 아니라 “순수한 욕망”이라고 말한다.(이 대목에서 다시 한 번 고질라가 언급되었다.) 나중에 그는 방안을 가득 채운 러시아 기자들에게 계속 진행 중인 자신의 <Jellyfish Eyes> 3부작에 거의 3천말 달러를 투자했다고 말했다. 그는 할리우드를 접수하길 기대하고 있다.
“사람은 늘 새로운 것을 만들어야 해요”라고 무라카미는 2009년 데미안 허스트의 책 <Requiem I>을 위한 인터뷰에서 말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제대로 된 것을 만들어야 한다는 거예요. 그것은 많은 실험과 실패가 포함된 과정입니다. 저는 진정한 창작 행위의 시작은 이런 인식이 함께 할 때에만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예술은 계속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진화해야 해요.”
- 글
- 알렉산드라 코디나(ALESSANDRA CODINHA)
- 에디터
- 윤혜정
- 사진 제공
- the Garage Museum of Contemporary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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