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llow Light
이연희는 어떤 시공간에 놓여도 고유의 분위기를 지켜왔다. 드라마 〈더 패키지〉에서 그녀는 다시 한번 설레는 순간을 선사한다.
이미지만으로 캐릭터가 설득되는 배우가 있다. 그동안 맡은 역할이 하나의 대표적 이미지를 형성하거나 타고난 외모가 선명한 이미지가 되거나. 이연희는 전자와 후자를 소프트아이스크림처럼 혼합해 우리 머릿속에 각인된 배우다. 데뷔 초, 감독들은 말간 얼굴을 한 팔다리가 가느다란 소녀를 자전거 뒷자리에 태우거나 비 오는 날 우산을 씌우곤 했다. 이른바 국민 첫사랑으로 불리는 특정 시기. 다만 이연희는 누군가의 추억 속에 존재하는 아련한 존재이기보다는 좋아하는 남자에게 씩씩하게 들이대거나(<순정만화>), 긴 생머리가 아닌 편할 대로 불쑥 잘라버린 단발머리를 한(<백만장자의 첫사랑>) 소녀였다. 이연희에게는 슬픈 멜로디보다는 밝고 경쾌한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나는 요즘 모니터나 스크린에서 이연희를 보며 상상한다. 학창 시절 모두의 시선을 빼앗던 소녀가 타고난 외모를 보고 접근해 들쑤시는 사람들에게 휘둘리지 않고, 자신이 가고 싶은 길을 마음껏 걸어갈 때 이연희처럼 살게 되지 않을까. 조선시대에 태어났다면 <조선명탐정: 사라진 놉의 딸>에서처럼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 남장과 게이샤를 오가고, 1997년에 20대가 되었다면 <미스코리아>에서처럼 8등신 ‘기럭지’를 숨기지 못해 미스코리아의 길을 걸어갔을 것이다. <결혼전야>처럼 오랜 연인과 결혼하기 일주일 전 혼란스러운 마음에 원나잇 스탠드를 해버릴지도 모르겠다. 혹은 얼마 전 종영한 <다시 만난 세계>에서처럼 첫사랑 남자 친구가 이루지 못한 셰프의 꿈을 대신하고자 주방에서 땀을 뻘뻘 흘리고 있을 수도 있겠다. 이연희는 로맨스를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로 두는 여자였으니까.
이런 이미지가 생긴 건 드라마 <미스코리아>의 한 장면 때문인 것 같다. “떴다! 오지영이 떴다!” 한 남학생의 외침에 반 전체 남학생들은 우르르 창가로 모인다. 운동장을 가로지르던 이연희는 남학생들의 환호가 쏟아지자 수줍어하기는커녕 화답하듯 스텝을 밟으며 여유 있게 손을 흔들었다. 저 여유, 저 자태. 나는 솜털의 각도까지 완벽하게 예쁜 아이가 남을 의식해 자신의 예쁨을 낮추는 척하거나 모르는 척하지 않아서 좋았다. 이연희가 맡은 캐릭터는 학교라는 안전망을 벗어나 사회라는 냉정한 시공간에 놓여도 그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고유의 분위기를 지켜내곤 했다. 청초하고 한없이 예쁘지만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고 세상을 향해 씩씩하게 걸어가는 이미지. 그 이미지는 작품에 따라 잘 맞아떨어질 때도 있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이연희는 맹목적인 순수함이 느껴지는 연기를 했다. 혹여 그 기운이 전해지지 않았다면 그 가치 자체에 순진한 구석이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한다.
이런 나의 상상의 연장에서 봤을 때, 드라마 <더 패키지>는 모두가 사랑했던 그 시절 그 소녀가 함께 유학 간 남자 친구로부터 이별을 통보 받았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 상상하게 만드는 드라마다. 이연희는 유학 자금을 벌기 위해 여행 가이드를 하는 윤소소 역할을 맡았다. 드라마는 8박 10일 패키지 여행을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려낸다. 끌려왔든, 억지로 왔든, 괜히 왔든’ 8박 10일 동안 꼼짝없이 얼굴을 봐야 하는 사람들. 패키지 여행은 우연히 여행지와 시점이 일치한 사람들이 모여 ‘관계’가 만들어지는 흥미로운 임시 사회다. 놀랍게도 이연희에게는 패키지 여행 경험이 있다.
“스물여섯 살에 처음 파리에 혼자 여행을 갔는데 아는 언니가 ‘할 거 없으면 패키지 여행 가볼래?’ 해서 당일치기로 벨기에에 다녀왔어요. 그때 너무 좋은 추억이 생겨서 이후에 패키지 여행을 한 번 더 다녀왔어요. 저 말고 3~4팀 정도 있었는데 각자 친구랑 오고 엄마랑 오고 커플끼리 오니까 저에 대해 크게 신경 안 쓰셨어요. 여행이란 게 사실 다 귀한 시간 내서 오는 거잖아요. 일부러 배려도 해주신 것 같고요.” 패키지 여행을 하면서 이연희는 여행 가이드가 매력적인 직업이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여행 가이드와 배우는 비슷한 면이 많아요. 자기가 하는 이야기에 주목할 수 있게 사람들을 끄는 매력도 있어야 하고, 많은 정보를 이야기보따리 풀어내듯 재미있게 전달해야 하죠. 사람들이 많이 좋아해주는 존재라는 점도 배우와 비슷해요. 하루 종일 지치지 않고 일하는 모습을 보면서 큰 매력을 느꼈어요.” 이연희는 윤소소를 연기하기에 앞서 실제 여행 가이드를 만나 많은 질문을 던졌다. “삶의 고통이라든지 어려움에 대해 많이 물어봤어요. 정말 힘들었던 손님, 재미있었던 일도요. 즐거워 보이지만 먼 미래를 생각할 때 고민도 많으시더라고요. 소소와 비슷한 점을 접목해서 캐릭터를 구상했어요. 연기할 때 혹시라도 실제 여행 가이드분들에게 폐가 되지 않도록 잘 표현하고 싶었어요.”
촬영 기간 내내 이연희는 실제 여행 가이드가 갖는 책임감에 시달렸다. “제가 너무 좋아하고 사랑하는 파리에 대해 배우들에게 너무 알려주고 싶은 거예요. 쉬는 날이 많지는 않았지만, ‘오르세 미술관에 꼭 가보세요’, ‘여자분들은 꼭 마레 지구에 가셔야 해요!’ 추천하고 그랬죠. 질문을 받았을 때 모르면 찾아서라도 알려주게 되고요. 사실 제가 좋아하는 게 있으면 갑자기 올인하는 스타일이에요. 그리고 친구들에게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내죠. 일단 여행을 너무 좋아하니까 새롭게 알게 된 도시라든가 그런 얘기들. 저는 와인도 정말 좋아해요. 20대 중반에 그 맛을 알게 됐는데 지금까지 너무 좋아서 와인 얘기가 나오면 엄청 신나요.”
인터뷰 자리에서도 이연희는 촬영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았다. “가이드 투어를 가면 무궁무진한 역사 얘기를 들려줘요. 저는 그때마다 노트에 적어가면서 프랑스 문화, 음식, 종교 등에 대해 많이 배웠어요. 우디 앨런 영화, <마리 앙투아네트> <노틀담의 꼽추> 같은 프랑스와 관련된 영화도 많이 찾아봤어요. 정용화 씨와 처음으로 호흡을 맞췄는데 또래라서 정말 좋았어요. 친구처럼 믿고 의지했어요. 촬영이 끝나면 배우들과 모여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곤 했어요. 함께한 시간이 쌓일수록 그 배우에 대해 더 잘 알게 되니까 나중에는 그 배우가 어떤 연기를 해도 재미있는 거예요. 한국과 달리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촬영에 들어가는 등 즉흥적인 상황도 많이 벌어졌어요.”
솔직히 나는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는 이연희만은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1년에 한두 편씩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해오고 있지만 그에 대해 부가 설명을 덧붙이는 배우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적인 부분은 굳이 보여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SNS도 하지 않고, 새로움보다는 익숙함을 좋아하는 타입이라고 했다. 익숙한 것에서 편안함을 찾다 보면 새로운 것도 발견하게 된다고, 그것부터 시작되는 게 더 좋다고 말이다. 파도보다는 물결에 가깝고 롤러코스터보다는 회전목마의 규칙적인 리듬에 가까운 이 잔잔함은 그녀의 성격과 말투, 커리어와 삶을 대하는 태도에도 묻어났다.
열세 살 때 ‘SM 청소년 베스트 선발대회’에서 입상하면서 연예계에 발을 내딛고, 드라마 <해신>에서 수애 아역으로 연기를 시작했던 이연희는 촬영장에서 늘 막내였다. 촬영장에 또래가 많아질 무렵부터 이연희의 자리도 점차 더 선명해졌다. “예전에는 사람들을 어려워했다면 지금은 먼저 다가가려고 해요. 성격이 변했어요. ‘내 것만큼은 열심히 해서 폐 끼치지 말자’라고 생각했다면 지금은 순간순간 즐겁게 일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임해요. 어떻게 하면 한마음 한뜻으로 으샤으샤 하면서 작품을 이끌어갈 수 있을지 고민도 많아졌고요. ‘연기란 이런 거구나’ 느낀 작품은 <미스코리아>와 <구가의서>예요. 그전에도 고민을 많이 하고 연기했지만, 3개월 동안 그 인물이 되어서 살아본 적은 없는 것 같아요. 슛이 안 들어가도 계속 그 인물로 살아 있으려고 노력을 많이 했는데, 그게 좋더라고요. <미스코리아>부터 그 인물로 살아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그리고 저는 직업이 있는 역할이 재미있는 것 같아요. 탐구할 수 있고 새롭게 알게 되는 면이 있어서예요.” 세상의 어떤 면을 재단해서 보여주는 배우가 세상에 무심할 리 없다. 우리가 드라마와 영화로 다른 이의 삶을 경험하듯 이연희 역시 작품으로 세상을 배워나간다. 그리고 대중의 관심을 받는 위치를 묵묵히 받아들일 뿐이다. “어릴 때는 억압받는 것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어요. 요즘은 스트레스 많이 받지 않으려고 해요. 불과 1~2년밖에 안 된 것 같은데 요즘은 그냥 즐거워요. 믿음을 갖게 되었고 봉사 활동도 하면서 나에게 주어진 환경이 정말 축복받은 거라는 걸 느끼기 시작했어요.”
노벨 문학상 수상자도 감히 예상 못할 정교한 음모나 피 칠갑 범죄 없이는 대중의 관심을 얻기 힘든 요즘에도 이연희가 가장 좋아하는 장르는 로맨스가 있는 드라마다. 누군가를 향한 그녀의 핑크빛 마음은 늘 그녀를 더욱 반짝이게 했다. 이연희는 어릴 때 영화를 좋아했던 엄마 심부름으로 늘 비디오테이프 심부름을 했다고 했다. 영화에는 항상 남자 주인공이 목숨을 걸고 사랑하는 어여쁜 여배우가 나왔다. 이연희는 그런 여자 주인공을 꿈꿨다. “사랑할 수 있는 상대 배우가 있을 때 연기하기가 좋아요. 생각해보면 원 없이 사랑했을 때 그만큼 성숙할 수 있는 뭔가가 생겼던 것 같아요. 삶에 로맨스가 없다면요? 우울하죠, 뭐.(웃음)” 핑크빛 기류로부터 삶의 연료를 충전하는 여자, 배우란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내는 존재라는 명쾌한 정의를 내리는 배우, 그리고 매 순간 지금의 자리를 지키며 길을 찾기로 결심한 사람. 우리가 그토록 궁금해했던 말간 얼굴을 한 팔다리가 가느다란 소녀의 13년 뒤 현재 모습이다.
- 에디터
- 조소현
- 포토그래퍼
- KIM OI MIL
- 스타일리스트
- 이윤미
- 헤어 스타일리스트
- 선오
- 메이크업 아티스트
- 전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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