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반대편의 여자들
포토저널리스트 정은진은 해외 단신으로나 접하는 분쟁의 현장에 직접 간다. 그리고 전쟁이 아니라 전쟁보다 더한 여성들의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뷰파인더에 담는다. 우간다와 남수단에서 만난 여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 하는 까닭.
사상 최대의 추석 연휴 인파를 뒤로하고 2년 만에 다시 아프리카, 우간다로 간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주의 저항군(Lord’s Resistance Army: LRA)’이라는 우간다 반군에 납치되었던 아촐리족(族) 전직 소녀병들, 다른 하나는 남수단 난민 여성들 중 성폭행 피해자들에 대한 사진 취재를 하기 위해서였다. 현재 남수단은 기자들에 대한 탄압과 취재 방해가 심각한 수준이라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그래서 나는 남수단 난민이 가장 많이 존재하는 우간다 북부로 가기로 결심했다.
해외 뉴스로나 접하는 것이 전부였던 우간다 내전은 지난 2006년에 끝났다. 그리고 당시 소녀병이었던 많은 이들이 이젠 성인이 되었다. 다양한 비정부 단체들이 그들의 재활을 돕기 위해 활동하고 있다. 우리 일행도 수도 캄팔라를 떠나 북부 도시 굴루에 도착한 후 맨 먼저 전직 소녀병들을 소개해줄 단체들을 접촉했다. 그중 ‘웬드 아프리카’라는 단체 대표인 졸리 여사와 그녀의 사무실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유창한 언어를 구사하는 졸리 여사는 자신도 전직 소녀병 출신이라고 말했다. “소녀병들은 낮에는 최전방에서 우간다 정부군과 싸우고, 밤에는 성 노예 생활을 했어요. 네, 모든 것은 강제적으로 이루어졌어요.” 졸리 여사가 내게 소개해준 서른네 살의 비키는 웬드 아프리카에서 재활 및 직업 교육의 일환으로 가방과 동물 인형 만드는 일을 하고 있는 약 스무 명의 여자 중 한 명이었다. 그녀는 열두 살이던 1995년, 집에서 사촌과 잠을 자다가 느닷없이 마을로 들이닥친 LRA 반군들에게 납치되었다. 그녀가 LRA 막사에 도착한 다음 날 아침 10시쯤, LRA 장교들은 납치한 아이들, 특히 소녀들을 여러 그룹으로 나눠 각기 다른 장교들에게 배치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성 노예 삼은 소녀들을 ‘부인(Wife)’이라 불렀고, 열두 살 비키도 예외 없이 ‘남편’인 한 장군에게 ‘배정’되었다. 예의 그 장군은 비키가 LRA 캠프에 갇혀 있던 9년 동안 열네 명의 ‘부인’을 두었으며, 그중에는 장군이 직접 마을에 가서 납치해온 11~13세가량의 어린 소녀들도 있었다. 비키를 비롯한 소녀들은 ‘남편’들에게 배정되자마자 여지없이 강제로 성관계를 갖게 된다. 캡틴은 LMG라는 기관총을 매트리스 옆 방바닥에 놓고 비키를 범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피를 흘렸고, 울었다.
그로부터 4년 후, 열여섯 살이 된 비키는 LRA 부대 안에서 장군의 첫아이를 낳게 된다. 그동안 비키는 소녀병으로 최전방에서 전투를 벌였다. 그러다 19세 되던 해, 비키는 교전 중의 경황이 없는 틈을 타 장군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 둘을 데리고 LRA를 탈출하게 된다. 비키와 아이들은 도주 중 개미가 만들어놓은 언덕이나 풀, 흙을 먹어가면서 일주일을 무작정 걸어가 우간다 정부군에게 투항했다. 비키의 지옥 같은 9년은 그렇게 끝났다.
현재 비키는 장군의 두 딸과 사회에서 새로 만난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두 딸, 그렇게 네 명의 딸과 함께 굴루에 있는 초가에서 살고 있다. 남편이라 해도 법적인 남편은 아닌 데다, 함께 가족과 지내는 게 아니라 거의 싱글맘의 상태로 지낸다고 한다.
우간다에 전직 LRA 소녀병들이 몇 명인지, 정확한 통계를 찾아보기는 힘든 상황이다. 다만 반기문 전(前) 유엔 사무총장은 지난 2013년, LRA가 극성을 부리던 1987년부터 25년간 10만 명 이상을 죽이고 6만 명 이상을 납치했으며, 250만 명 이상이 난민으로 전락했다고 공식 발표한 바 있다.
LRA는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하고 병사를 충원하기 위해 주민들을 닥치는 대로 납치했다. 이들은 현재 남수단 국경 지역의 마을에 막사를 차리고 소녀들을 성 노예와 소녀병으로, 소년들을 소년병으로 키워 LRA의 수장인 ‘조셉 코니’의 꼭두각시로 철저히 이용했다. 비록 우간다 내전이 끝났다 해도 끝난 게 아니다. 밀림에서 길게는 10년 이상 교육을 받지 못한 채 소녀병과 성 노예로 산 여성들은 여전히 사회 적응에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대부분 극빈곤 상태에 머물러 있다.
굴루에서 만난 인연을 뒤로하고 우린 남수단 국경과 가까운 ‘윰베’라는 지역으로 갔다. 윰베에는 전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는 ‘비디비디’ 난민캠프가 있는데, 대략 28만여 명의 남수단 난민이 피란 생활을 하고 있다. 지난 2011년 수단으로부터 독립한 남수단은 어쩌면 세계에서 가장 젊은 나라일지도 모르겠다. 남수단이 독립한 지 2년이 지난 2013년 12월 15일, 대통령과 부통령의 호위병들로부터 시작된 무장 분쟁은 딩카족인 살바 키이르 대통령이 누에르족인 리에크 마차르 부통령을 정치적으로 숙청함으로써 부족간 내전의 소용돌이로 빠져들었고, 그 내전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지금도 우간다 국경에는 수많은 남수단 난민들이 속속 도착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비디비디 캠프에서 누에르족 성폭행 피해자이면서 생존자인 열세명의 여성들을 만나 생생한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모든 여성들이 딩카족 군인들로부터 윤간을 당했으며, 전쟁 중 남편을 잃거나 소식이 끊긴 상태로 아이들만 데리고 우간다로 피신한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유엔이 보낸 식량과 작은 텃밭에서 재배한 음식 등으로 근근이 버티고 있는 상황이다. 인터뷰한 여성 중 가장 기구한 운명의 소유자는 바로 니야볼 툿이었다.
올해 열일곱 살인 그녀는 임신 중이었다. 남수단에서 두 번 강간을 당했고, 두 번 모두 임신했다. 첫 번째 강간으로 낳은 아이는 손목과 발목이 90도로 휘어진 장애를 갖고 있었다. 니야볼은 캠프 내 유엔 학교도 나가지 못한 채 아이만 돌보면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임신한 채로 학교에 가서 다른 난민 학생들로부터 조롱거리가 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지난 2015년 12월 주바에서 15세의 나이로 초등학교를 다니고 있던 그녀는(아프리카에서는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인해 학년이 지연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시장에 갔다가 네 명의 딩카족 무장 군인들에게 강간을 당했다. 그녀는 소리를 질렀지만 지나가는 사람들은 아무도 그녀를 돕지 못했다. 잘못하면 자기도 죽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듬해 아기가 태어났고, 니야볼은 우간다로 피란을 갔다. 그러던 중 2017년 2월 부모님을 찾으러 다시 주바로 돌아갔는데, 그때 비극이 다시 그녀를 덮쳤다. 주바에서 먹을 것을 찾고 있던 니야볼은 길거리에서 일곱 명의 딩카족 남성과 마주쳤다. 이들은 군복을 입고 있지는 않았지만 AK-47 총을 들고 있었다. 그들에게 다시 강간당한 후에야 그녀는 부모님이 결국 딩카족 군인들의 총에 맞아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완전히 고아가 된 니야볼은 다시 임신한 채로 전에 낳은 딸을 데리고 다시 국경을 넘어 우간다의 난민 캠프로 왔다.
현재 비디비디에서 그녀가 살고 있는 집은 NGO에서 기증한 하얀 비닐천으로 만든 텐트다. 비가 오는 날에는 물이 샌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니야 볼은 집 옆에 있는 다른 과부이자 피해자와 아이들이 머무는 진흙 초가에 자주 가 있었다. 니야볼은 이렇게 말했다. “내겐 꿈도, 희망도, 가족도 없어요. 어디서부터 인생을 시작해야 하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녀는 다른 난민과 마찬가지로 캠프에서 유엔으로부터 식량 배급을 받고 있다. 배급은 2017년 10월 현재 한 달에 옥수수 6kg과 1인당 현금 7,000 우간다 실링(한화로 약 2,000원) 정도다. 그녀는 아기 몫까지, 한 달에 옥수수 12kg와 현금 4,000원을 받고 있는 셈이다.
나는 지난 2002년부터 10년 이상 중동과 아프리카 등 분쟁 지역 여성들의 삶을 취재해오면서, 수많은 여성들이 전쟁이라는 특수 상황에서 성폭행에 쉽게 노출된다는 사실을 매번 새삼 깨닫고 있다. 이들의 사연은 같은 듯 모두 다르고 저마다 기구하다. 지구 반대편에 사는 우리는 차마 같은 시대를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도, 상상하지도 못할 이야기. 그러나 생각해보라. 전쟁의 주체가 아닌 여성들이 입는 신체적, 정신적 피해에 대한 보도는 과연 활발하고 정당하게 이루어졌을까? 우리는 그녀들의 절단된 팔보다 더 절망적인 삶에 대해 한번이라도 생각해본 적이 있었나? 아프리카의 현재는 곧 우리의 과거라는 사실을 까마득히 잊은 건 아닐까?
창밖으로 ‘송구영신’의 흥겨운 불빛과 노랫소리가 울려 퍼질 때마다, 그 작은 집의 창문을 통해 존재하지 않을 것만 같은 바깥세상을 바라보던 그 여인들의 눈빛이 여지없이 떠오른다.
- 에디터
- 윤혜정
- 포토그래퍼
- JEAN CH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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