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AIA
아제딘 알라이아의 ‘메종’은 패션 브랜드를 가리키는 ‘하우스’와 사람이 사는 공간인 ‘홈’의 뜻을 모두 지니고 있다. 파리 마레 지구 무시 거리(Rue de Moussy)에 자리한 19세기에 지어진 저택 은그가머물던집,일하던아틀리에와쇼룸,그리고예술에대한열정을나 누던 갤러리를 모두 겸한다. 그리고 바로 이곳 메종 알라이아에서 지난 60년 간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패션 세계를 완성한 거장이 지난 해11월17일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그리고 이제 그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티레니아해 의 푸른 바다가 보이는 시디부 사이드의 한 묘지에 묻혔다.
소식이 전해지자 인스타그램과 트위터 등 소셜 미디어에서는 곧 알라이아를 향한 추모가 이어졌다. 디자이너와 친밀하던 이들은 그가 직접 국자를 저어 완성해준 볼로네제 파스타, 동이 터올 때까지 함께 기울이던 보드카에 대한 추억을 이야기했다. 한편 그를 먼 곳에서만 바라보던 고객과 패션 팬들은 디자이너로서 업적을 기리고, 그를 대표할 만한 드레스 이미지를 공유하며 ‘#RIP’ 해시태그를 더했다. 각자 다른 방식으로 그를 추억했지만, 모두가 그를 현대패션의 커다란 횃불로 기억하고 있었다.
1935년 튀니지에서 태어난 알라이아는 어린시절 주위 여성들을 통해 처음 패션을 접했다. 예술 학교에서 조각을 공부했지만, 파리로 건너온 건 패션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서였다. 크리스찬 디올 하우스에서 5일만에해고된 후 (당시 발발한 알제리 전쟁 때문), 기라 로쉬 하우스에서 재단사로 2년을 일했다. 1968년 알라이아는 파리 좌안 벨샤스 거리(Rue de Bellechasse) 아파트 로 옮겨갔다. 그리고 발렌시아가 하우스가 문을 닫은 후 갈 곳을 잃은 로스 차일드 가문을 비롯한 사교계 숙녀들과 그레타 가르보, 클로데트 콜베르 등의 은막스타들이 이자그만 체구의 청년을 찾았다.
변화가 찾아온 건 1979년. 그는 찰스 주르당의 주문으로 구두와 어울릴만한 컬렉션을 완성했다. 하지만 정작주르당은 알라이아의 옷 때문에 구두가 돋보이지 않을 것이라 겁을 먹고 프로젝트를 접어버렸다. 덕분에 스터드 장식과 금속지퍼를 더한 옷이 알라이아의 첫번째 ‘레디투웨어’ 컬렉션이 되었다. 소문은 금방 퍼졌다. 지난해 초 스타일리스트 조 맥케나가 완성한 알라이아의 다큐멘터리 속에서 당시 영국 <보그> 패션 에디터였던 소피 힉스는 그 풍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저희가 이전에 전혀 보지 못한 아름다운 의상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한때 알라이아의 스타일링을 맡았던 그녀 (모델 에디 캠벨의 엄마인 그녀는 현재 건축가로 변신했다)가 추억했다. “놀라운 순간이었습니다. 파워 드레싱과 저속한 패션이 유행하던 시절 일본 디자이너들을 제외하곤 흥미로운 옷은 없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완벽하게 새로운 유럽 출신의 옷이 등장한 거죠.”
몸을 감싸는 듯한 니트 드레스와 여성의 몸을 분할하는 밴드 드레스, 자유로운 커팅의 셔츠, 날카로운 가죽 코트 등 당시 알라이아 스타일은 80 년대를 정의하고, 90년대를 예고했다. 하지만 그는 유행 따윈 개의치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건 자신의 스타일에 집중하고, 연구와 실험을 통해 디자인 을 완성해나가는 것이었다. 옷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모두 혼자 완성할 수 있는 마지막 디자이너는 시간과 타협하지 않았다. 1992년부터 그는 자신이 준비가 되었을 때만 쇼를 열고,모든 것이 완벽하게 마무리 되었을 때만 옷을 매장에 전달했다. 패션 평론가 캐시 호린은 그가 아틀리에에서 악어가죽을 가리키던 순간을 기억한다. “그가 말하더군요. ‘저 가죽으로 코트를 만들 생 각이야.’ 그리고 전 3년 뒤에야 완성된 코트를 볼 수 있었어요.”
알라이아의 삶은 여성이 지배했다. 어린 시절 그를 보살피던 할머니와 처음 패션을 알려준 마을 산파 마담 피노(Madame Pineau)부터 예술 학교 를 다니던 시절 그에게 바느질을 가르쳤던 마담 리샤르(Madame Richard), 무작정 파리로 건너온 그를 거두었던 니콜 드 블레지에 백작 부인(Comtesse Nicole de Blégiers) 등. 그 이후에도 그의 컨설턴트를 자처한 베스트 프렌드 카를라 소짜니, 85년 전성기를 함께한 그레이스 존스, 그를 ‘파파’라고 부르는 나오미 캠벨 등 그를 보완하고 완성하는 여성들이 그의 곁에 함께했다. 그녀들은 그를 익살스럽고, 놀라울 정도로 충직하며, 왕성하게 일에 몰두하는 친구로 기억한다. “전 제 일보다 친구들이 더 좋습니다. 아직 전 디자이너로서 만족하지 못하지만, 제 여성들이야말로 확신할 수 있는 한 가지입니다.”
그래서일까. 아제딘 알라이아는 여 성에 대한 헛된 환상을 가지지 않았다. “기본은 언제나 여성입니다. 옷을 입힐 바로 그 몸 말입니다.”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궁정 속 공주도, 먼 미래의 여전사도 상상하지 않았다. 단지 자신이 사랑하는 여성을 가장 우아하게 혹은 가장 농염하게, 가장 정중하게 꾸미는 것에만 집중한다. “전 패셔너블하거나 혁명적인 건 관심 없습니다. ‘알라이아’적인 것을 만들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결코 유명한 디자이너나 꾸뛰리에가 되겠노라고 꿈꾸지 않았습니다. 전 여성들을 존경합니다. 그들 덕분에 제가 이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성들은 그의 옷에서 또 다른 행복감을 느꼈다. <보그 코리아>가 알라이아를 추모하기 위해 파리에서 공수한 꾸뛰르 의상을 입은 댄서 한미니는이렇게말했다. “10년 전 서울의 10 꼬르소 꼬모에서 처음 알라이아 드레스 를 구입했어요. 검정 니트 드레스를 입는 순간 느꼈어요. 이 옷이라는 걸.” 그 이후 그녀는 파리까지 가서 알라이아 의 드레스를 구입하곤 했다. “알라이아만이 주는 특별함이 있어요. 저를 완전하게 감싸는데도 편안하죠. 그리고 노출이 있지만 우아해요. 또 몸을 드러내지 않지만, 섹시하게 보이게 합니다. 그 속에 숨은 아이러니를 아는 디자이너는 알라이아 밖에 없을 거예요.”
지난해 7월 꾸뛰르 기간 동안 알라이아는 6년 만에 오뜨 꾸뛰르 컬렉션을 발표했다. 캣워크로 변신한 메종 갤러리 공간에는 알라이아의 친구들 이 모두 모여 있었다. 카를라 브루니, 이자벨 위페르는 관객석에 앉았고, 나오미 캠벨은 무대를 거닐었다. 누구와도 타협하지 않고 60년 동안 꾸준히 스스로의 미학을 추구해온 거장은 그렇게 마지막 인사를 건넴 셈이 되었다. 쇼가 끝나자마자 그가 사랑하는 여성들은 모두 이 작은 거장에게 사랑을 전하기 위해 백스테이지 커튼을 젖히고 그를 향해 달려갔다. 그 순간 그 공간을 채운 따스함과 열정, 기쁨이야말로 알라이아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 던 가치가 아닐까.
- 패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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