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독서법
나와 책은 은밀한 관계였다. 하지만 이젠 둘만의 방에서 나오려 하며, 읽기보단 경험을 추구한다.
요즘 독서 모임이 활발하다. 부모님도 독서 모임을 가졌다. 그때나 지금이나 문학의 밤은 열린다. 하지만 형태는 변했다. 화제의 스타트업 트레바리가 한 예다. 이곳의 원칙은 크게 세 가지다. 4개월 동안 한 달에 한 번 정기적으로 모인다. 한 시즌에 19만원, 유명 인사나 전문가가 모임을 이끌 경우 29만원이다. 돈을 냈어도 독후감을 제출하지 않으면 참석할 수 없다. “대체 누가 돈을 낸대?” 2015년 9월 처음 트레바리를 창업할 당시 윤수영 대표가 지겹게 듣던 질문이다. 당시엔 80여 명이었던 유료 회원이 지금은 1,300명에 이른다. 윤수영 대표는 2014년 입사한 다음 해 퇴사하고 트레바리를 세웠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싶어서요.”
유료의 이유를 찾으려고 트레바리에 접속했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서울시립과학관의 이정모 관장이 이끄는 ‘자연사 북클럽’이 개설되어 있다. “자연사를 배웠는데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어요”라는 후기가 있다. 트레바리의 ‘안국동 아지트’에서 좋아하는 이정모 관장님과 함께 독서 토론을 할 수 있다니, 너무나 끌린다. 게다가 트레바리의 페이스북에 올라온 아지트 사진에는 창 너머로 한옥 지붕이 고즈넉이 펼쳐진다. ‘압구정동 아지트’는 바처럼 꾸몄다. 술이 있어야 할 장에는 책이 놓여 있다. 이곳에서 고전 철학, 영화, 희곡, 심리, 미식, 젠더, 브랜드, 부동산, 마케팅, 스타트업 등 다양한 독서 모임이 열릴 것이다.
윤수영 대표에게 요즘 사람들이 독서나 독서 모임에 관심을 갖는 이유가 무엇인지 묻자 이렇게 답한다. “혼자서라면 읽지 않을 책을 읽게 하는 긍정적인 형태의 불편함, 그리고 ‘지금의 나’를 나눌 수 있는 사람들과의 만남을 원하죠.” 후자가 요즘의 독서 모임을 더 정확히 설명한다.
취향을 공유하는 플랫폼인 문토에는 ‘드렁큰 리더스 클럽’이 있다. 본격 음주 독서 모임이다. 이번 시즌 함께 생각할 주제는 ‘나에게 특별했던 처음은 언제였나요? 우리는 마지막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다. 술이 거들 수 있는 주제들이다. 이쯤 되면 사교가 먼저인지, 책이 먼저인지 모르겠다. 일본의 유명 마케터인 간다 마사노리에게 <닛케이>의 신문기자가 물었다.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등 SNS의 전성기인데요. 다음으로 올 미디어는 무엇인가요?” 그는 ‘커뮤니티 미디어’라고 즉답했다. “커뮤니티 미디어란 하나의 공간 혹은 시간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전형적인 예가 독서 모임이죠. 인터넷보다는 현실의 세계가 사람들에게 점점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 겁니다.”
그가 2011년 9월에 시작한 리드포액션(RFA)은 1만3,000명이 참여하는 일본 최대 규모의 독서 모임이다. 기원은 일본의 지진 피해 현장을 찾은 젊은이들이다. 지진 피해자들과 책을 나눠 읽고, 완독하지 않더라도 책을 재료 삼아 이야기를 나눴다. 책에 영감을 받아 주민들은 다른 일을 시작하기도 했고, 활력이 붙었다. 이것이 리드포액션의 핵심이다. 함께 한 독서가 ‘액션’을 일으키는 것. 리드포액션의 모임 주최자는 퍼실리테이터라고 불리며 관련 자격증을 취득해야 한다. 한국에도 서승범 퍼실리테이터가 활동하고 있다. “모임 시작 전에 두 가지를 명확히 해요. 이 책에서 무엇을 얻고자 하는가? 책에서 얻은 것을 어떤 액션으로 연결할 것인가? 물론 이런 질문을 받으면 다들 당황합니다.”
또 하나 리드포액션의 특징은 책을 읽지 않고 간다는 것. 때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이렇게 진행된다. 모임에서 1분 동안 책을 훑어본 후 느낌을 얘기한다. 참석자들과 챕터를 나눈 후, 자기 챕터를 8분간 읽고 토론한다. 마지막 침묵 속에서 혼자 정리한다. 이렇듯 ‘대리 리딩’ ‘소셜 리딩’이라는 형태까지 등장한다. 요즘 독서 모임은 책을 넘어서(혹은 차치하고) 소셜 네트워크의 수단이자, ‘액션’으로 이어지는 디딤돌로 활용한다.
이는 요즘을 관통하는 거대한 트렌드인 ‘경험’ 중 하나다. 사람들은 경험을 사고자 한다. 여행도 다른 경험을 하기 위해서며, 미식에 대한 집착도 경험해보고 싶어서, 취미가 취미 수집이 될 만큼 취미의 범람도 모두 경험을 원하기 때문이다. 정보가 많은 자가 아니라 경험이 풍부한 자가 되길 바란다. <와이어드>의 창간자이자 사상가 케빈 켈리도 경험의 인터넷을 얘기한다. “정보의 홍수에 사는 밀레니얼 세대는 인터넷에서 더 이상 정보가 아닌 경험을 원합니다.” 증강현실, 가상현실이 늘어나는 것만 봐도 그렇다.
윤수영 대표도 다양한 형태의 독서 모임이 나타나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답한다. “잘 모르겠지만, 독서와 독서 모임은 전혀 다른 활동이라고 생각해요. 독서 모임은 ‘책 고르기’와 ‘책 소화하기(독후감)’, ‘다른 사람들과 의견 나누기’ 등 혼자서 하는 독서가 줄 수 없는 경험을 제공하죠.” 회원들은 19만~29만원을 지불하고 독서와 더불어 독서 모임, 교류, 이어지는 활동과 같은 경험을 산다.
혼자 하는 독서도 마찬가지다. 세련된 독서 공간이 늘어나고 있다. 내실 있는 책 구성과 강연 주최 등으로 자리 잡은 최인아책방에서 같은 건물에 ‘혼자의서재’를 열었다. 최인아책방이 책을 구매하는 곳이라면 혼자의서재는 책을 보는 곳이다. 들어서면 타오르는 벽난로와 크림색의 책장, 카펫이 명사의 집에 온 것 같다. 리클라이너 소파에 눕다시피 앉아서 커피와 다과를 즐기며 책을 읽을 수 있다. 2시간에 3만원이고, 4시간을 결제하면 오디오가 있는 독방을 사용할 수 있다. 내가 꿈꾸던 서재를 가진 기분이다. 다소 비싸지만 마음에 드는 공간에서 책을 펼치는 경험에 대한 가격이다.
성수동에 있는 안전가옥도 좋아한다. 이곳은 카페가 아니라고 강조한다. “안전가옥은 이야기를 읽고 쓰기를 좋아하는 이들의 커뮤니티 공간입니다.” 장르 문학 작가들의 작업실과 방문자들도 이용할 수 있는 도서관으로 구성된다. 음료를 구입하면 2시간 동안 도서관에서 책을 읽을 수 있다. 커다란 목재 책상, 주인장을 인터뷰하고 싶을 정도로 좋은 취향의 스탠드가 ‘지성의 산실’ 같은 분위기를 낸다. 가벼운 라운지 음악이 흘러나온다. 한쪽에는 이달의 주제인 ‘달’ 관련 책이 있고, 글쓰기 강좌 포스터가 붙어 있다. 나는 이곳에서도 독서라는 경험을 샀다.
2015년 교보문고 광화문점에 100인용 책상을 들여 화제가 된 적 있다. 이제 우리는 책 읽을 자리를 넘어, 취향 있는 이상적인 공간에서 책을 펼치는 경험을 하고자 한다. 최근 자양동에 땡스북스의 이기섭 대표, 계간 <그래픽>의 김광철 편집장, 글자연구소의 김태헌 디자이너가 함께 서점 인덱스를 열었다. 카페처럼 바리스타가 커피를 내리고 앉는 공간을 마련했다. 요즘 문을 여는 서점은 특정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려 한다. 독서가 읽기가 아닌 경험의 수단이 된 것이 잘된 일일까, 아닐까?
- 에디터
- 김나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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