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컬렉터, 필립 들로네와의 대화
리빙에 대한 관심이 확장되어감에 따라 ‘아트’에 대한 관심도 빠르게 높아지고 있다. 박물관에 전시회를 보러 다니며 우리 영혼을 ‘아름다움’이란 가치에 눈뜨게 하는 것이야말로 예술과 가까워지는 삶의 첫걸음이다. 그러다 걸음마가 걷기로 익숙해지면 마음에 꼭 드는 작품을 하나둘 나의 공간에 초대하고픈 욕망이 생기기 시작한다.
‘아트 컬렉터’ 예술 수집가란?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과는 상관없는 구름 위 세상일처럼 여긴다. 실제로 갤러리에 전시되는 그림은 비싼 가격 때문에 엄두도 못 낸다.
지난겨울 전직 치과 의사이자 오랜 세월 문화 예술계에서 컬렉터이자 비평가로 이바지한 필립 들로네(Philippe Delaunay)가 연 판화 전시는 이런 고정관념을 버리기에 아주 좋은 기회였다.
33년을 예술에 푹 빠져 살아온 그가 현재 파리에서 활동 중인 예술가들을 모아 판화전을 열었다. 스무 장의 에디션 작업은 장당 150유로였다. 개중에는 현재 박물관에서 소장할 정도로 유명한 아티스트의 작품도 있어 전시 오프닝 날 ‘꾼’들이 모여 작품 감상과 더불어 아트 쇼핑에 여념이 없었다.
1987년부터 컨템퍼러리 아티스트를 지원하는 협회를 설립해 젊고 유망한 아티스트를 지원하고 수천 점의 컬렉팅을 해온 필립을 이정민 씨가 만났다. 같은 미술 열정가이자 아트 컨설턴트로 파리에서 활동 중인 이정민 씨가 ‘아트 컬렉터가 되는 길’이란 제목으로 그의 개인 갤러리에서 인터뷰를 한 것이다. 치과 치료비를 못 내는 화가를 치료해주고 돈 대신 그림을 받다 컬렉팅을 시작했다는 그의 일화를 통해 수집의 기술을 훔쳐보자.
JMDL 소장하신 작품이 수천 점에 이르는데 혹시 모두 기억하십니까?
Ph. Delaunay 물론이죠. 내가 소장한 작품 한 점 한 점은 지난 수십 년 동안 나의 삶을 함께 만들어온 동반자와 같은 존재입니다. 각각의 작품은 내 인생에 특별한 의미를 심어주었어요. 그래서 어느 작가의 작품을 갖고 있는지, 그들과 어떠한 스토리가 있었는지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어요.
JMDL 처음 구입하신 작품은 어떤 건가요?
Ph. Delaunay 1965년에 첫 작품을 샀어요. 가브리엘 푸르니에(Gabriel Fournier)라는 에콜 드 바르비종(École de Barbizon) 작가입니다. 우연히 갤러리에 전시를 보러 갔다가 끌려서 그의 작품을 샀어요.
JMDL 평생을 치과 의사로 사셨는데, 미술 작품을 수집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나요? 혹시 집안에서 대대로 컬렉션하는 전통이 있으시거나, 부모님이나 친지분 중에 컬렉션하신 분이 계셔서 그 영향을 받으신 건가요 ?
Ph. Delaunay 부모님께서 종종 미술품을 구입하시기는 했지만, 흔히 말하는 컬렉터는 아니었어요. 부모님께서 가지셨던 작품은 주로 아카데믹한 고전 작품이었고, 그 작품에 대해 나는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았고요. 나 역시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시간 날 때 박물관이나 갤러리, 아트 살롱 등에 다니면서 새롭게 전시되는 작품을 구경하고 작가들과 만나 대화하는 것을 즐기는 정도였어요. 미술 작품을 수집하기 시작한 것은 진료실에 오는 환자들 때문이었어요. 환자들 중에 화가나 조각가가 여럿 있었는데, 형편이 어려워서 치료비를 내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어요. 그때 진료비를 대신해서 작품을 주었습니다. 그 작가 환자들이 친구 작가들을 소개해주고 그들과 교류하면서 그들의 작품을 구입하기도 하고, 때로는 치료비 대신 작품을 받기도 하면서 서서히 컬렉션이 시작된 것 같아요. 이 시기에 만난 작가들 에티엔 하이두(Étienne Hajdú), 클로드 가라슈(Claude Garache), 알랭 드 라 부르도네(Alain De la Bourdonnaye) 등과는 수십 년 동안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왔고, 이들이 소개해준 다른 여러 작가들과 예술 비평가 도라 발리에(Dora Vallier)와도 가까이 지냈죠. 그러면서 보다 진지하게 작품을 대하게 되었고, 작품을 보는 눈과 이해하는 소양을 키웠던 거 같아요. 이후 40여 년 동안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작가들을 만나 인연을 맺으면서 지금까지 작품을 수집하고 있습니다.
JMDL 컨템퍼러리 아트 작품을 수집하고 오래전부터 수많은 젊은 작가들을 지원하고 계신데, 이유가 있으신가요 ?
Ph. Delaunay 제가 소장한 작품 중에 아카데미풍 고전 작품이나 오늘날 모던 아트라 분류되는 작품도 있습니다. 지난날 널리 명성을 얻은 작가들의 작품이 보여주는 미적 완성도나 그들의 문화 예술적 가치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공감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갖고 있어요. 하지만 과거 작가들의 작품은 박물관에 가면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굳이 내가 그들의 작품에 관심을 갖고 수집할 필요는 없지요. 작품 구입을 리스크가 없는 투자나 재산 증식의 한 방법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클래식 작품이나 유명 모던 아트 작가들의 작품을 사는 것이 유의미한 선택일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내가 작품을 사고 수집하는 이유는 나와 동시대를 살고 있는 작가들이 시각매체를 통해 제시하는 철학적, 사회적, 문화적 비전을 공유하고 그들이 변화해가는 과정에 참여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들의 작품을 사면서 다양한 형태와 도구로 표현되는 현시대의 보편적인 가치 ‘진실(Vérité)’과 ‘미(Beauté)’를 얻는다고 믿어요.
그래서 오늘날 작가의 작품을 구입한다는 것은 몇 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 이미 그려진 과거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살고 있는 현시대를 충실하게 살며 영위하는 것이고,
- 작가들이 창작 활동을 꾸준히 지속할 수 있게 경제적으로 지원해주는 것이며,
- 작가들이 세상 밖으로 나와 보다 많은 이들에게 알려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며,
- 예술이라고 하는 모험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오늘이 내일의 과거가 되듯이, 현재 활동하는 젊고 유망한 작가들이 바로 미래에 박물관에 소장되고 역사에 한 획을 긋게 될 작가들입니다.
JMDL 소장한 작품 중에 작품을 구입할 당시에는 무명 작가였는데 나중에 크게 명성을 얻은 작가들이 있나요 ?
Ph. Delaunay 물론이죠. 예를 들면 1980년에 시몬 헌타이(Simon Hantaï)란 작가를 처음 만났고 그의 전시에 갔다가 작품을 한 점 샀습니다. 이후 그의 작품에 깊이 매료되어 여러 점을 구입했죠. 헌타이의 작품을 사려고 할 때 주변에서 사람들이 “너 미쳤니? 뭐, 이런 이상한 작품을 사는 거야?”라며 말렸습니다. 그런데 그의 작품을 보자마자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일어나는 강한 끌림이 있었어요. 그래서 망설이지 않고 샀습니다. 당시 18,000프랑(현 시세 약 2,760유로)을 지불하고 작품을 샀는데, 현재 거래 금액이 140,000~150,000유로라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헌타이는 전 세계 수많은 박물관에 작품이 소장된 유명한 모던 아트 작가가 되었고요. 이와 비슷한 경우의 모던 & 컨템퍼러리 아트 작가 중에 샤이삭(Chaissac), 비알라(Viallat), 비에글리오(Buraglio), 아펠(Appel), 오베르탱(Aubertin), 느무르(Nemours) 등 꽤 많은 이들이 있습니다.
JMDL 그러면 작품을 사려고 하는 사람들, 작품 컬렉션을 시작하려는 사람들이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하는 일에 대해 조언해주시겠습니까 ?
Ph. Delaunay 우선 ‘예술 작품은 장식품이 아니다’라는 것을 인지해야 합니다. 흔히 사람들은 자기 집 커튼 색이나 벽 색깔 혹은 거실의 어느 가구와 어울릴 것 같아서 작품을 사는데, 이는 절대로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예술 작품은 그 자체로서 생명체와 같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작품 안에는 작가 개개인의 삶이 진솔하게 배어 있기 때문입니다. 작품은 그를 만든 이와 그를 대면하는 이 사이의 정신적, 감성적 교류를 가능케 함으로써, 진정한 의미의 아름다움을 만끽함과 더불어 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작품을 많이 접한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특히 ‘신뢰할 수 있는 전문가의 조언에 따라’ 작품을 사는 것이 좋습니다. 시대적 진실에 민감하고 미학적 경험이 풍부하며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은 미술계 관계자들, 컬렉터, 큐레이터, 비평가, 작가, 갤러리스트 등이 여기에 해당하는 전문가들이 되겠지요. 처음에는 이들의 도움을 받아 작품을 사고 수집해나가면서 서서히 스스로 작품을 보는 눈을 키우고 미술에 대해 공부하면서 자기 나름의 취향과 추구하는 미술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끝으로 작품은 ‘머리로 생각하는 바에 따라서가 아니라, 마음속 깊숙한 곳에 내재된 감성이 말하는 것을 듣고’ 선택해야 합니다. 어느 작가가 얼마나 인지도가 있는지, 어느 유명한 갤러리에서 밀어주는 작가인지, 이 작품이 얼마 후에 얼마나 가치가 오를 것인지… 머리로만 생각하고 계산해서 작품을 사면 실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작가와 작품의 가치는 단지 현재 평가된 수치적인 지표에 의해서만 좌우되는 것이 아니에요. 그리고 거물급 갤러리에서 전시되고 유명 아트페어에 자주 소개되는 작가의 작품이 반드시 좋은 작품이라고 할 수도 없고요. 그 경제적 가치가 앞으로도 계속 올라갈 거라고 단언할 수 있는 것도 물론 아닙니다. 현재 저평가되는 작품이나 아직 유명세를 얻지 못한 작가의 작품 중에는 진정한 삶과 미에 대한 심오한 사색이 담겨 있으며 예술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새로운 길을 열고 그 방향을 제시하는 작품이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이러한 메시지를 말해주는 작품, 나의 잠재된 본능적 감각을 깨우고 건드려주는 작품, 그래서 매일매일 생활하는 공간에서 나에게 충만한 행복감을 줄 수 있는 작품을 찾으려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JMDL 당신에게 예술이란 어떤 존재인가요?
Ph. Delaunay 예술은 나에게 또 다른 가족을 만들어준 내 인생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아주 소중한 존재입니다. 나에게는 부모와 형제, 아내와 자녀 그리고 손자로 구성된 ‘육체적인 가족’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예술과 작품에 대한 열정을 매개로 서로 교감하고 공감대를 형성하며 예술의 변화와 발전을 위해 함께 행동하는 ‘정신적, 감성적 가족’이 있습니다. 내가 소장하고 지원하는 작가들, 나와 공통의 관심사를 갖고 교류하는 미술 애호가, 컬렉터 친구들, 나의 열정을 직간접적으로 지원해주는 공·사 미술 기관 관계자들이 바로 두 번째 가족이고, 이들과의 관계를 통해 나의 존재는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해요.
JMDL 지금까지 미술계에서 많은 일을 해오셨는데, 앞으로 계획 중인 프로젝트가 있으신가요 ?
Ph. Delaunay 단기적으로는 내가 소장한 작품의 일부를 토대로 컨템퍼러리 아트 컬렉션에 관한 책을 발간할 계획이에요. 40여 년 동안 작품을 수집해온 나의 경험과 생각이 다른 많은 이들에게 예술과 작품 컬렉션에 접근하는 방향을 보여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중장기적인 프로젝트가 될 것 같은데, 나의 컬렉션 작품 모두를 기증할 박물관을 찾고 있습니다. 나의 소장품은 내 인생의 상당 기간에 걸쳐 다른 이의 작품을 빌려 내가 추구하는 가치와 비전을 바탕으로 창작한 작품입니다. 또한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 여정의 모습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이를 토대로 작품 컬렉션을 보다 발전적으로 키워나가고, 정기적인 전시 프로그램을 통해 대중에게 널리 보여줌으로써 사람들이 예술을 그들의 삶 가까이에서 접하도록 전문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곳을 만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 글/사진
- 박지원(디자이너)
- 현지 인터뷰
- Jeong-Min Domissy-Lee
- 에디터
- 우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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