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인물
문학과 그 등장인물은 시대의 마음을 대변한다. 2018년 한국의 인간상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소설 속 인물은 누굴까.
그녀, 염소를 몰고 집을 나가다 전경린의 <염소를 모는 여자>는 23년 전에 발표한 소설이다. 작가가 내 나이 때에 썼던 소설. 소설에서 서른셋의 대학 동창생들은 결혼과 출산을 거치면서 직장을 잃고, 바람을 피우는 남편을 ‘참아주며’ 홀로 육아를 한다. 주인공 윤미소는 어떤가. 그녀는 독단적이고 폭력적인 행동을 일삼는 남편에게서 벗어나지 못한다. 왜 이렇게 사는 거지? 스물의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조용한 한낮에 아파트에서, 칸칸이 벽만 나누어진 닭장 같은 다른 집들을 바라보면, 그 어떤 기이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보다도 더 어처구니없는 기분에 사로잡히게 돼. 칸칸마다 한 명씩 성숙한 여자들이 들어 있고, 남자를 위해 밥을 하고, 청소를 하고, 밤에 남자가 들어오면 섹스에 응해주고, 남자의 집에 제사를 지내러 가고…… 그리고 하나씩 둘씩 아이를 낳고 남자는 처자식 때문에 죽지도 못해 하면서 툴툴거리고, 그 닭장 안에서 멀쩡한 여자 하나가 혼자 아이를 키우느라 오 년씩 십 년씩 매달리고…… 그리고 어느 날 새벽에 깨어나보면 발이 뻣뻣하게 굳어 영영 걸어 나갈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거야.”
윤미소의 친구 정연의 말은 이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 인물들의 상황을 잘 보여준다. 이 소설이 발표된 후로 23년이 흘렀건만 “멀쩡한 여자 하나가 혼자 아이를 키우느라 오 년씩 십 년씩 매달리고”라는 대사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다. 스물의 나는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이런 식으로 살지 않기를 ‘선택’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그러나 서른다섯이 된 나는 이제 안다. 한국 사회의 ‘정상 가족’의 기본값이 변하지 않는 이상, 국가가 보육과 돌봄 노동의 의무를 다하지 않고 그것을 여성 개인의 몫으로 떠넘기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고치지 않는 이상 다른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 소설은 겉으로는 완벽해 보이는 ‘정상 가족’ 내부에서 어떤 억압과 갈등이 존재하는지, 그 속에서 여성 개인의 내면이 어떻게 억눌리고 뒤틀리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 소설의 아름다움은 ‘정상 가족’의 억압 앞에 ‘무릎 꿇은 개인’을 보여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억압에 맞서 탈출하려는 여성의 욕망을 보여주는 지점에 있다. “나의 손가락들, 나의 무릎, 나의 등, 나의 귀, 나의 가슴, 나의 겨드랑이…… 그것이 왜 남편을 통하지 않고서는 내게 아무 의미도 없었다는 말인가. 어떻게 그토록 오랫동안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는 말인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나의 것이 아니던가.” 누구의 아내이기 전에, 누구의 엄마이기 전에, 누구의 며느리이기 전에, 누구의 딸이기 전에 그 모든 명명 전에 자기 자신으로서의 내가 있다. 머리로는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삶 속에서 알아내 가는 일의 어려움을 안다. 타인의 감정, 타인과의 관계에 예민할 것을 요구받으며 자신의 욕구를 말하는 것만으로도 이기적이고 욕심 많은 여자라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는 것을 체감하며 자라왔기 때문에. 남의 목소리는 작은 것까지도 잘 잡아서 들을 수 있으면서도 가슴속에서 울며 소리치는 자신의 목소리는 애써 외면하다 들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는지도 모른다. 남편의 바람을 알면서도 윤미소는 그저 모른 척하고 넘어갔지만, 이런 인식 후로 그녀는 그가 자신의 내면에 남긴 상처를 처음으로 응시하게 된다. “방 안엔 여전히 미등이 켜진 채였다. 남편은 입술을 꼭 다문 채 시치미를 떼며 누워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남편을 일으켜 침대 머리에 기대앉혔다. 그리고 세 번 잇달아 따귀를 후려쳤다.”
그간 그의 폭력적인 행동 앞에서도 맞서 싸워보지 못했던 그녀의 변화다. 그녀는 자기 발로 그 집을 걸어 나간다. 검은 우산을 들고, 염소를 끌고서. 그녀에게 집이란 “슬픈 꿈이 넘쳐 어린 소녀의 잠든 눈가에 눈물이 배어 나오고 있을 집, 아침에 눈 뜨면 한 여자가 사라져버린 것을 조용히 알아채게 될, 이미 오래전에 훼손된 집이었다.” —최은영(소설가)
그녀가 말하기 시작했다 김동인의 데뷔작 <약한 자의 슬픔>을 지금 다시 읽는 일은 곤혹스럽다. 부모를 여의고 의지할 곳 없는 열아홉 살의 주인공 ‘강 엘리자베트’는 K 남작의 집에서 가정교사로 머물며 학교에 다닌다. 그는 방에 몰래 숨어든 K 남작의 요구로 반강제적 성관계를 맺는다. 이후 임신 사실을 알리자 병으로 인한 근무 태만을 빌미로 쫓겨난다. ‘엘리자베트’라는 서구적 이름이 무색하게도, 그는 너무나 익숙한 서사를 따라 성폭력 피해자의 자리에 서 있다. 아마 대부분의 독자들은 그가 K 남작의 겁탈 앞에서 자포자기적인 합의에 도달하게 되는 장면이나 의사가 청진기를 댈 때 이성의 손이 살에 닿는 쾌락을 느낀다는 식의 서술에서, 작가의 여성 혐오적 시선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1919년에 나온 텍스트를 지금의 잣대를 기준 삼아 여성 혐오로 비판하는 것은 너무 손쉬운 일이 아닌가. 사실 이 소설이 지닌 의외성은 쫓겨난 엘리자베트가 울고 자학하는 피해자의 자리를 넘어, 반격의 행위를 시도하는 데 있다.
그는 교육받은 신여성답게 재판이라는 묘책을 떠올리고, 법에 기대 자신의 정의를 바로 세우고자 한다. 그러나 엘리자베트를 책망하면서도 연민을 감추지 못하던 시골의 오촌모조차 재판이라는 말 앞에서는 단호하다. “그래도 재판은 못한다. 우리는 상것이고 저편은 양반이 아니냐?” 오촌모는 근대법의 객관성보다 주먹 천지인 세파의 힘을 이미 간파하고 있었지만, 엘리자베트는 이를 무지의 소산으로 치부하며 이성과 합리에 기대고자 한다. 그리고 결국 법정에서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청구를 기각당한다. 아마 근대법과 관련해서는 한국문학 최초일 성폭력 재판에서 소송은 ‘약한 자’ 엘리자베트의 철저한 패배로 귀결된다. 이때 남작 측 변호사를 통해 흘러나오는 말은 너무 익숙해 고통스럽다. 그는 엘리자베트의 말을 ‘허황한 것’으로 몰아붙이며 ‘구체적 증거’를 요구하고, 당시 가정교사의 의무에 충실하지 않았다며 ‘피해자로서의 자격’을 박탈하고, ‘정신 이상’이 있음을 강조한다. 지금이라면 2차 가해라 불릴 이 말은 100년 전의 법정에서부터 반복된다. 남성과 여성, 귀족과 상민, 고용자이자 피고용자인 이들의 위계는 흔들리지 않는다. 법은 여성의 편이 아니다. 엘리자베트는 그가 객관적이라 믿었던 공적 제도로서의 법 앞에서, 자신이 법 바깥에 자리한 그저 ‘상것’임을 확인한다.
이로부터 거의 100년이 흐른 지금, 법 앞에서 여성들은 ‘상것’의 지위를 탈피했을까. 2018년 1월 29일 서지현 검사는 JTBC <뉴스룸>에 출연하여 자신을 성추행한 안태근 검사의 행태에 대해, 당시에 검찰 조직이 그 성추행을 어떻게 묵인하고 공모했는지를 밝혔다. 지난 100년 사이에 여성들은 마지막 동아줄처럼 법을 붙드는 피해자가 아니라 법을 수호하는 자리에까지 올랐지만, 여전히 법으로부터 배제당한다. 수많은 성폭력 고발 운동이 법정에서 무혐의 처분을 받는 것은 전혀 놀랍지 않다. 이 결과물의 근본적 원인은 무고한 가해자를 고발하는 정신이 불안정한 피해자가 아니라, 철저히 남성의 경험과 정신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반쪽짜리 법적 정당성에 있기 때문이다. <약한 자의 슬픔>은 참혹한 패배 속에 놓인 엘리자베트가 강한 자가 되기 위해서는 “사랑 안에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채 기쁨의 웃음을 지으며 끝난다. 김동인이 말하는 인류 보편을 향한 이 사랑에는 그늘 한 점없고, 여성의 자리 또한 없다. 하지만 엘리자베트는 작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그 사랑이라는 안온한 봉합을 찢고 나오는 캐릭터다. 그는 모욕을 견디며 반격의 자리에 서고, 계속 살아나가기 위해 존재의 이유를 찾아내 히스테리컬한 웃음을 짓는다. 자신의 고통을 더 이상 방관하지 않겠다는 결심, 세상의 편견을 무릅쓰고 가장 먼저 법정 앞으로 나서는 엘리자베트 위에 #MeToo 운동이 겹쳐지지 않는가. 여자들이 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상은 이제 변하고 있다. —강지희(문학평론가)
우리 안에는 의인이 하나씩 살고 있다 불길에 뛰어들어 어린아이를 둘러업고 나오는 소방관, 차가운 강물에 빠진 차에 뛰어들어 운전자를 구하는 사람들, 늦은 밤 성폭행 직전의 여성을 구하다 흉기에 찔린 청년, 드물지 않게 접하는 얘기이다. 우리는 이들을 ‘의인(義人)’이라 부르고, 이런 의인들과 특별히 신년 산행을한 대통령처럼 그들의 의로움을 기린다. 문학에는 의외로 이런 의인들이 드물다.
우리 안에 꽁꽁 감춰둔 비겁하거나 졸렬한 모습이야말로 인간의 진실을 드러내기에 더 적당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이 나약한 존재들이 마지막에 발견하는 가느다란 희망 안에서 오히려 삶의 깊은 의미를 찾아낸다. 인간성의 최대주의보다는 최소주의에 설 때 나머지도 긍정할 수 있으니까.
김탁환의 소설 <거짓말이다>는 세월호 희생자 인양에 뛰어들었던 민간 잠수사들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실존 모델인 고 김관홍 잠수사가 ‘나경수’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바다 밑에서는 전문가일 테지만 일상에서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 어떻게 ‘의인’으로 거듭나는가를 촘촘하게 추적한다. 주인공이 무작정 팽목항으로 향하는 장면은 소설보다 김 잠수사 부인 인터뷰를 읽는 게 좋다. 세월호 현장에 어떻게 갔느냐는 질문에 부인은 말한다. “물론 못 가게 하고 싶었죠. 그런데 며칠 동안 마음을 못 잡고 뭘 해도 건성인 게 보이더라고요. 화원 일이 바빴지만 여기 있으나 없으나 똑같아서 ‘그렇게 원하면 가도 좋다’고 했죠.” 그말에 좋아하더냐고 묻자 부인은 말한다. “말이 떨어지자마자 신이 나서 당일로 내려가던데요? 부모 마음은 애가 셋인 우리도 똑같았으니까요.” <거짓말이다>에서도 이런 정황은 곳곳에 등장한다. 일이 터졌으니 내가 필요하다. 아무런 보상이 없더라도 옳은 일이니까 내가 한다. 이런 사람은 주변에 드물지 않다. 정부나 사회 시스템이 역할을 못할 때 앉아서 비난하기보다 먼저 움직이는 사람들. 우리가 아는것과 달리 ‘의인’은 정의감과 열정에 불타는 투사가 아니다. 평범한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상황’이다. 도쿄 지하철 선로에 떨어진 취객을 보자마자 뛰어든 이수현 씨는 무슨 계산과 의도가 있었을까. 상황이 시키는 대로 그는 응했을 뿐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인간의 탁월함을 ‘아레테(Arete)’라는 말로 불렀는데, 그 필수요소가 겸손이고 그 반대가 교만을 뜻하는 ‘히브리스(Hybris)’였다. 트로이 전쟁 후 각기 고향으로 향하던 오디세우스와 아이아스의 경우를 보자. 난파를 당해 암초에 겨우 올라선 아이아스는 몰아치는 파도를 향해 큰소리를 치다 휘말려 죽는다. 오디세우스는 신의 뜻에 몸을 맡기자 물결이 그를 해안에 실어다준다. 인간은 불굴의 의지로 삶을 개척하는 존재가 아니다. 김관홍 잠수사가 그랬듯이 바깥 상황의 요구에 조응함으로써 삶의 의미를 획득한다. 그러므로 “돈 바라고 갔다가 죽었을 뿐”이라고 말하는 소설 속 택시 기사나, 세월호 가족에 대해 “보상을 노린 시신 팔이”라 하는 이들은 우리가 가진 의로움의 잠재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의인’은 무슨 순결한 영웅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간직한 초상인 것이다. 지난겨울 추운 날씨에 촛불 하나씩들고 광화문에 모였던 수많은 사람들은 무슨 이익을 바란 것일까. 우리 모두에게 잠들어 있던 의인의 증거 아닌가. —안희곤(사월의책 대표)
- 에디터
- 김나랑
- 일러스트레이터
- 백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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