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석구의 첫 등장, 그는 대체 누구인가?
드라마 〈마더〉에서 설악이 죽던 날, 손석구 와 만났다. 무서울 만큼 견고한 연기 내공을 보여준 이 배우는 대체 누군가.
“오래전 옛날에 한 남자가 살았는데, 그는 키가 3미터에 몸은 핑크색 베개들로 만들어져 있었다. 머리, 팔, 다리, 몸통, 심지어 손가락도 작은 베개들로 만들어졌고, 그의 얼굴에는 두 개의 단추로 되어 있는 눈이 있고 입은 언제나 웃는 모양이어서 항상 이빨이 보였는데 그 이빨마저도 조그만 하얀 베개로 되어 있었다.” 아일랜드의 천재 극작가 마틴 맥도나의 연극 <필로우맨>에 나오는 베개 요정 이야기다. 푸근한 외형에 웃는 얼굴로 사람들을 안심시키기만 그의 임무는 사실 무시무시하다. 불행한 어른들을 어린 시절로 안내해 그들의 인생에 끔찍한 어둠이 찾아오기 전 스스로 생을 마감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tvN 드라마 <마더>의 설악은 잔혹 동화 속 베개 요정처럼 아이러니한 운명을 지녔다. 어린아이들을 괴롭히고 살해하는 이 무섭고 불쌍한 남자는 좀처럼 속을알 수 없다. 덩치는 산만 한데 그의 캄캄한 마음속 동굴에 사는 상처투성이 꼬마는 자신을 학대하던 엄마가 죽던 날로부터 조금도 자라지 않았다.
드라마에서 마침내 설악의 과거가 밝혀지던 날, 손석구와 만났다. 무서울 만큼 조용하면서도 단단한 내공을 보여준 이 놀라운 배우는 대체 누구인가. 손석구는 화면에서 보던 설악의 모습과 꽤 다르다. 생각보다 체구는 다소 마른 편이며, 맑은 눈빛과 하얀 피부의 주근깨는 덜 자란 소년 같은 인상을 풍기기도 한다. 그의 키는 178cm다. 그럼에도 드라마 속 설악이 그토록 크고 단단해 보인 건 순전히 연기 때문이다. 드라마는 이번이 두 번째다. 워쇼스키 자매의 미국 드라마 <센스 8> 시즌 2에서 손석구는 배두나를 쫓는 ‘문형사’로 전 세계를 누볐다. “독일에서 촬영하고 있을 때 매니저에게 <마더> 이야기를 들었어요. 아동 학대범 역할이라고 해서 처음엔 반신반의했는데 대본이 너무 좋았어요. 이미 대본이 거의 다 나온 상태였거든요. ‘나만의 기승전결이 이렇게 있다면 정말 해볼 만한 가치가 있겠구나….’ 밤샘 촬영 중에 간신히 오디션 영상을 찍어 보냈죠.”
원작인 동명의 일본 드라마와 가장 큰 차이점은 설악의 존재감이다. 일본판 <마더>에서 혜나(허율) 친모의 동거남은 초반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한국판 <마더>는 설악을 사건의 중심에 두면서 극의 긴장감과 개연성을 높였다. 보통 사람들은 상상하기 힘든 설악의 캐릭터를 이해하기 위해 그는 극악무도한 살인마를 연구하는 대신 자신을 되돌아봤다. “무섭게 하겠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누구나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로 갖게 되는 나쁜 습관 같은 게 있잖아요. 습관처럼 욕한다든가 술을 자주 마신다든가. 반복되는 게 본인도 괴로운데 오늘도 또 하고마는 그런 거요.” 극 중 설악은 인상을 쓰며 위악을 부리는 법이 없다. 무뚝뚝하나 자신의 여자에겐 친절하며 트럭 운전사로서 성실히 일상을 살아간다. 손석구는 설악을 통해 악의 평범성을 무섭도록 명확히 재현해냈다.
작은 습관이 운명을 결정짓는다면 배우로서 손석구의 성공은 예견된 결과다. 시카고에서 미술과 영화를 전공하고 캐나다에서 뒤늦게 연기 공부를 시작한 그는 차가운 밤의 설악과 달리 한낮의 세계에 속한 사람이다. 중학교 때 조기 유학을 떠난 후 자이툰 부대 3진 2차 병력으로 이라크에서 군대 생활을 하기 전까지 그의 삶은 늘 태양이 앞길을 비추는 탄탄대로였다. “이라크는 지원해서 간 거예요. 기왕 군대에가는 김에 많은 걸 경험하고 싶었거든요. 보병은 단 한 명을 뽑았어요. 연기하면서도 그렇게 높은 경쟁률을 뚫어본 적이 없어요.(웃음)” 이라크에서의 경험은 다큐멘터리 감독을 꿈꾸던 그를 180도 바꿔놓았다. “다큐멘터리가 삶과 맞닿아 있고 사회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일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실상은 다르더라고요. 전혀 다른 세계에서 살다가 육체노동을 하고 사상 교육을 받으면서 생각이 많이 바뀌었어요. 미술보다 좀더 현실적인 걸 해야겠다 싶었죠. 뭘 해야 될지도 몰랐어요.
마침 캐나다에 동생이 있어서 도피하다시피 일단 밴쿠버로 간 거예요. 농구를 좋아하니까 선수 하겠다고.” 그야말로 드라마 같은 황당한 전개다. 마이클 조던도 한 번쯤 은퇴를 고민할 법한 스물다섯의 나이에 농구 선수라니! 손석구의 농구계 데뷔는 금세 현실의 벽에 부딪혔다. 어쩌면 모두에게 다행한 일이었다. “하여튼 그땐 정신이 좀 그랬어요.(웃음) 가장 의미 있는 직업이 뭘까? 운동 같은 거 하면 좋겠다 하고, 이라크에서 벌어온 돈으로 비행기 표 사서 간 건데, 그게 되지가 않죠. 뒤늦게 혼자 운동을 한다는 게 힘들기도 하고요.” 손석구의 모험은 캐나다의 아름다운 풍광을 배경으로 기막히게 흘러간다. 용감하고 또 한편으로는 철없는 도전은 계속되었다. “우연히 구글에서 액팅 스쿨을 검색해서 제일 먼저 나오는 곳에 찾아갔어요. 한 3개월 연습을 했는데 너무 재밌더라고요. 연기하면 재밌거든요. 공연 첫날 바닷가를 걸으면서 생각했어요. ‘이거 되게 좋다.’ 그렇게 2년을 더 하고 한국에 온 거예요.”
캐나다에서도 기회는 있었다. 몇 편의 독립영화와 연극 그리고 미국의 파일럿 드라마에 캐스팅되기도 했다. 하지만 비자가 만기되면서 한국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고향인 대전에서 연극을 시도했다. “연극을 보고 무작정 연출가를 찾아갔어요. 연기하고 싶다고. 지금 생각해보면 당혹스러우셨을 거예요.” 10여 년 만에 찾은 한국은 낯선 땅이었다. “주말에 대학로를 처음 가보고 깜짝 놀랐어요. 저한텐 컬처 쇼크였죠. 뉴욕에 1년 정도 산 적이 있긴 해도 브로드웨이엔 가본 적이 없었거든요. 밴쿠버와 달리 극장이 한곳에 다 모여 있어서 신기했어요.” 90kg 정도 나가던 몸무게를 줄이고, 서서히 한국 생활에 적응해나갔다. 대학로에서의 첫 연극은 2011년 연우소극장 무대에 오른 <오이디푸스>다. “코러스 중 한명이었어요. 그때 같이 코러스를 하던 형들이 오디션 사이트를 알려줘서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찾아다녔죠. 제대로 된 프로필 사진도 찍고요. 당시엔 휴대폰으로 찍은 사진이 전부였거든요. 그만큼 뭘 몰랐어요.”
계절에 따라 바람의 방향이 달라지는 것처럼 그의 삶에도 서서히 변화가 찾아왔다. 연극 <사랑이 불탄다>는 배우로서 손석구의 인생에 변곡점이 된 작품이다. 이 연극을 본 미드 <센스 8>의 캐스팅 담당자가 오디션을 제안했고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사랑이 불탄다>는 출연 배우들이 자비를 털어 직접 제작한 연극이다. 손석구와 최희서가 주축이 되었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 <동주>와 <박열>로 지난해 신인상과 여우주연상을 휩쓴 최희서는 손석구와 꽤 인연이 깊다. “희서가 15분짜리 단편영화를 연출한 적이 있는데 제가 그 영화의 오디션에 지원했어요. 제작비가 없으니까 희서가 연출 겸 여주인공, 제가 남자 주인공 겸 미술 감독을 맡았고요. 그때 친해졌죠. 저한테는 귀인 같은 느낌이에요. 진짜 신기한 게 희서가 추천하는 오디션은 다 붙었거든요. <센스 8>도 그렇고요.”
최희서는 <박열>의 후미코처럼 열정적이고 배짱도 두둑하다. 이 영리한 배우는 단박에 손석구의 가능성을 알아보았다. “희서는 사업을 해도 성공할 거예요. 목표가 분명한 친구죠. <사랑이 불탄다>를 제안한 것도 희서였어요. 아무도 우릴 선택하지 않으니 우리가 먼저 관계자들을 부르자고. 우리의 연기를 제대로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을 직접 만들어 우리끼리 일종의 쇼케이스를 연 거죠.” 최희서의 연세대 연극반 선배인 명계남이 흔쾌히 출연을 승낙하면서 신인 배우들의 열정에 힘을 보탰다. <사랑이 불탄다>는 단 5일간 무대에 올랐다. 그리고 누구도 예상치 못한 꿈같은 일이 벌어졌다. 한성대 입구 시장 골목의 60석짜리 소극장에서 별이 떠올랐다. 영화 <라라랜드>가 현실이 된 것이다. 이미 여러 인터뷰에서 얘기한 것처럼 최희서는 지하철에서 이 연극의 대본을 연습하던 중 <동주>의 시나리오를 쓴 신연식 감독의 명함을 받고 충무로에 화려하게 데뷔했다. 손석구는 할리우드로 날아갔다.
어떻게 보면 손석구는 여자 복을 타고났는지도 모른다. <센스 8>에서 그는 워쇼스키 자매와 배두나를 만났다. “콘래드 호텔에서 최종 오디션을 봤는데 제가 마지막 대기자였어요. 긴장하면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데, 두나 선배의 웃음소리가 들렸어요. 복도 끝에서부터 웃으며 걸어오는데 어찌나 웃음소리가 크던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갈 때까지 들리는 거예요. 와, 진짜 호탕하다 싶었죠. 실제 성격도 그렇고요. 왠지 주눅 들게 하는 톱스타 같은 포스가 없었어요. 그보단 라나 워쇼스키 감독의 포스가 워낙 강하기도 했고요. 헤어스타일도 막 더 화려하잖아요(웃음).” 배두나는 같이 연기 호흡을 맞춘 손석구에게 지금의 소속사를 소개했다. 드라마 <마더>의 출연을 앞두고 그가 고민할 때 선배로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워쇼스키 자매는 손석구를 보다 단단한 배우로서 혹독하게 트레이닝시켰다. 연기를 위해 복싱과 마셜 아트도 배웠다. “감독님은 배우가 어려워하는 게 보이면 일부러라도 더 시키는 스타일이에요. 모니터 앞에 앉아서 지시하는 게 아니라 카메라 뒤에서 같이 움직이죠. 대본도 현장에서 바꿔가면서 즉흥적으로 만들어가는걸 좋아하고요. 그런 부분은 연극할 때와 비슷하죠. 되게 재미있었어요.”
드라마 <마더>에서도 그의 주변은 온통 여자들이다. 그의 1번 파트너는 혜나 역을 맡은 아홉 살 소녀 허율이다. 어두운 극 중 분위기와 달리 허율은 현장에서 손석구를 삼촌이라 부르며 따른다. “너무 귀엽죠? 율이는 밝음 이상으로 밝은 아이예요. 같이 난로를 쐬자고 먼저 챙겨줄 만큼 어른스럽고요. 촬영 때마다 그렇게 핫 팩을 나눠줘요.(웃음) 저뿐 아니라 누구와도 잘 지내죠.” 혜나를 납치해 위협하던 설악이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처음으로 감정을 드러내는 장면은 이 드라마 전체의 하이라이트 신이다. ‘설악(雪岳)’이라는 이름 그대로 얼어붙은 바위산 같던 설악은 혜나의 위로를 받으며 눈시울을 붉힌다. 그리고 결국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자신에 대한 분노로 폭주한다. “율이가 먼저 그 장면을 찍었어요. 그날의 첫 신이었는데, 처음엔 눈물을 못 흘리더라고요. 전 대사는 없었지만 최대한 열심히 혜나의 얘길 들어줬어요. 그런데 그걸 보고 눈물을 흘리더라고요. 티어스틱도 안 썼거든요. 보통은 그런 상황에선 부담감에 감정을 잡기 힘든데, 상대 배우의 감정에 반응해서 눈물을 흘린 거예요. 그 신이 끝난 후 절 부르더니 ‘삼촌, 같이 감정 잡아줘서 고마워요’라고 하는데, 정말 감동적이었어요. 진짜 대단한 아이예요.”
<마더>에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타입의 엄마들이 등장한다. 혜나(허율)의 철없는 친모 자영(고성희), 학대받는 혜나를 위해 용감한 엄마가 되기로 결심하는 수진(이보영), 어린 수진을 버린 가엾은 엄마 홍희(남기애), 그런 수진을 입양해 사랑으로 돌본 씩씩한 영신(이혜영). 그리고 어린 설악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떠난 모질고 외로운 엄마가 있다. 저마다의 엄마를 그려내는 이 쟁쟁한 여배우들 틈에서 손석구는 자기만의 드라마를 만들어갔다. “여배우들이 극을 이끄는 작품이라 요즘 시대에 더 의미가 있다고 봐요. 현장 분위기도 좋고, 배우와 스태프 모두 우리 드라마에 대한 자부심이 있어요.” 실제 어머니에 대해 묻자 손석구는 휴대폰에 저장된 사진을 보여줬다. “저희 어머니예요.” 세련된 스타일의 동양적인 미인이다. 손석구는 사진첩에서 어머니의 옛날 사진을 한 장 더 찾았다. “젊을 땐 이혜영 선배님 닮았단 얘길 많이 들으셨대요. 제가 태어나면서 일을 그만두기 전까진 승무원이셨어요.” 일찍 가족의 품을 떠나 먼 타지에서 생활한 그는 어머니에겐 늘 그립고 살가운 큰아들이다. 한국 드라마에 출연한 아들 덕분에 요즘 어머니는 한껏 신이 났다. “되게 좋아하세요. 드라마가 끝나면 실시간 검색까지 찾아보느라 잠을 안 주무세요.(웃음)”
차기작은 이미 정해진 상태다. 뺑소니 단속반의 이야기를 담은 카 체이싱 액션 영화<뺑반>에서 손석구는 공효진, 류준열, 조정석 등과 호흡을 맞출 예정이다. 이번엔 검사 역할이다. “쉬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1년에 한 번도 일이 없었던 적도 있었는걸요. 아직은 일하는 느낌이 안 들어요. 기쁘고 즐겁죠.” 자신의 꿈을 찾아 방랑하는 동안 그는 독특한 이력을 새겼다. 그렇다고 지나온 시간이 어둡고 우울하기만 했던 것도 아니다. “전 오히려 잘된 것 같아요. 뭐든 첫 등장이 중요하잖아요. 옛날부터 그런 욕심이 있었어요.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리자. 차분히 내공을 쌓아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고 싶었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마더>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작품이죠.” 그의 목표는 롱텀 배우가 되는 것이다. 마침내 손석구의 계절이 찾아왔다. 지나가는 바람이 아니라 완연한 봄이다. 오랜 시간 동안 묵묵히 때를 기다리며 하나씩 심어온 씨앗이 일제히 싹을 터트린다. 어떤 꽃과 나무가 자랄지는 아직 누구도 모른다. 손석구의 다음이 궁금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드라마 <마더>는 끝났지만 손석구의 이야기는 지금부터다. 설악은 지금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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