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빈에 대하여
어른들의 격정 멜로 드라마 〈미스티〉에서 고준은 대한민국의 모든 여성들을 매혹하는 마성의 남자 케빈 리였다. 드라마 밖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매력적인 배우는 대체 누군가.
‘누가 케빈 리를 죽였나?’ 세계 최정상의 프로 골퍼 케빈 리의 미스터리한 죽음에서 시작되는 드라마 <미스티>는 예측이 불가능한 이야기의 힘으로 시청자들을 <미스티>의 안갯속으로 끌어당겼다. 사건의 전모를 밝히는 과정에서 하나둘 드러나는 욕망의 민낯과 배우들의 뜨거운 연기, 베일에 싸인 진범의 정체만큼 시청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한 건 케빈 리, 이재영 역을 맡은 배우 고준이었다. 햇빛에 그을린 구릿빛 피부와 운동으로 다져진 탄탄한 몸, 강한 턱선을 지닌 동양적 마스크는 아시아계 미국인 특유의 건강한 매력을 풍겼다. 어른들의 격정 멜로를 표방하는 <미스티>에서 그가 연기한 케빈 리는 대한민국의 모든 여성들을 매혹하는 마성의 남자였다. 그건 드라마 밖에서도 마찬가지다. 느닷없이 나타난 이 매력적인 배우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추리를 시작해보자. 2001년 <와니와 준하>로 상업영화계에 데뷔한 고준은 독립영화와 연극계에서 실력을 쌓아온 연기 경력 21년 차의 베테랑이다. 고향은 서울이며 교포 출신은커녕 여행을 제외하고는 해외에서 살아본 적도 없다. 경기도 안양 옆 군포 산본 신도시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본명은 김준호. 개그맨과 동명이인이다. 어쩔 수 없이 이름을 바꿨다. 어머니의 고씨 성과 자신의 원래 이름에서 ‘준’ 자를 딴 것이다. 영화 <타짜-신의 손>까지는 김준호로 활동했다. 기억이 안 난다고? 도박장을 어슬렁거리던 악당 유령이 고준이다. 물론 아귀의 조카로 악행을 일삼던 이 촌스러운 곱슬머리의 건달에게서 <미스티>의 케빈 리를 유추해내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영화 <청년경찰>에서 강렬한 액션 신을 선보였던 조선족 두목 영춘의 수염 난 거친 얼굴은 또 어떤가. 드라마 <굿와이프>의 의뭉스러운 사업가 조국현, 그리고 드라마 <구해줘>의 바리캉 깡패 차준구. 이 모두가 같은 인물이라고는 도무지 상상하기 힘들다.
“잘못 알아보세요.(웃음) 출연한 작품의 90%를 노 메이크업 상태로 찍었거든요. 심한 스트레스를 받거나 매일 술을 먹거나, 혹은 사랑을 하거나 하면 실제로 얼굴이 변한다고 하잖아요. 인간은 환경의 동물이니까. 그걸 이용한 거죠. 배역을 맡으면 준비 기간 동안은 그렇게 사는 편이에요.” 작품 속 캐릭터뿐 아니라 카메라의 각도에 따라서도 그는 전혀 다른 얼굴이 된다. 인상을 찌푸릴 때, 웃을 때, 무표정할 때, 조금씩 표정이 변할 때마다 아우라 자체가 달라진다. “방금 제가 출연한 영화를 보고 와서도 옆자리에 앉은 절 몰라보더라고요. 그런 적도 있어요. 독립영화는 제작비 때문에 전에 썼던 테이프를 덮어서 리코딩하는 경우가 있거든요. 촬영 감독이 뷰파인더로 찍은 걸 보여줬는데, 플레이백을 하니까 예전 제 모습이 나오더라고요. 계속 촬영하면서도 같은 사람인 줄 몰랐대요.” 다채로운 이미지를 가졌다는 건 천의 얼굴을 연기하는 배우에겐 큰 장점이기도 하다. “예전엔 그래서 애매하다는 얘길 듣기도 했죠.” 이제는 모두가 고준의 얼굴을 확실히 기억한다.
먼저 고준의 진가를 알아본 건 <미스티>의 모완일 감독이었다. “<구해줘> 촬영을 하고 있는데, 감독님으로부터 연락이 왔어요. 그냥 절 알고 싶어서 불렀대요. 30분 정도 이런저런 얘길 나눴죠.” 대본을 건네받은 건 그로부터 얼마가 지난 후였다. “무슨 역할인지도 모르고 대본부터 읽었어요. 나중에야 케빈 리 역할이라는 걸 알았죠. 저랑은 안 맞는다고 생각했어요. 저보다 잘생긴 분이 해야 될 것 같았거든요.” 감독은 고준에게서 케빈 리의 과거와 현재를 보았다. 인고의 시간을 거쳐 오직 의지 하나로 뒤늦게 최고의 스포츠 스타로 떠오른 집념의 사나이. 모든 것을 거머쥐었지만 한때는 미래가 없다는 이유로 사랑하던 여자에게 버림받았던 상처입은 수컷. 전형적인 미남에서 벗어난 남자다운 외모와 근사한 체격 조건. 동물적 본능에 충실한 그는 고혜란(김남주)에게 범속의 에로스를 상징한다. 여러 작품을 통해 고준을 눈여겨보았던 감독은 그에게 케빈 리라는 제대로 된 맞춤옷을 선물했다. “저의 가능성을 봐주셨다는 점에서 감사하죠. 단비 같았어요. <타짜-신의 손> 이후 줄곧 비슷한 캐릭터들을 연기해오며 고갈되어가던 상태였거든요. 다른 컬러의 연기를 하고 싶은 찰나였어요.”
만인의 연인이 되는 일에 비하면 프로 골퍼라는 캐릭터의 전문성을 소화해내는 작업은 오히려 쉬웠다. PGA 챔피언십 우승자인 케빈 리의 이력은 타이거 우즈를 꺾고 PGA 역사상 동양인 최초로 메이저 대회 우승을 차지한 양용은 선수를 연상시킨다. 우연의 일치지만 처음부터 고준을 위해 준비된 것처럼 모든 것이 맞아떨어졌다. 유도, 복싱, 무에타이는 물론 종합격투기까지 섭렵한 그는 스파링으로 스트레스를 푸는 운동 마니아다. 골프 실력도 수준급이다. “5~6년 정도 골프를 쳤는데, 80타 중 · 후반 정도는 돼요. 다만 독학으로 배운 거라 스윙이 잡혀 있진 않았죠. 이번에 일 핑계 삼아 신나게 골프를 쳤어요. 진짜 좋았죠.”
케빈 리처럼 고준에게도 오랜 무명의 세월이 있었다. “서울예술대학교 영화과에서 연기를 전공하며 시작했어요. 학교는 도중에 그만뒀지만. 이유요? 모르겠어요. 등록금도 비쌌고.(웃음)” 고등학교 3학년 때 우연히 대학생들의 뮤지컬을 보고 비로소 자신의 꿈을 찾았다는 그는 그야말로 질풍노도의 사춘기와 방황의 시기를 보냈다. “그전까진 꿈이 없었거든요. 그보다 더 어릴 땐 신부님이 되고 싶었죠. 신부 옆에서 시중 드는 꼬마들을 복사라고 하는데, 초등학교 들어갈 무렵부터 6년 동안 복사를 했어요. 복사 대장까지 하면서 정말 신부가 되겠다고 그 길을 걸었던 거죠.” 성스러운 파이프오르간 소리가 울려 퍼지는 큰 성당의 중앙에 우뚝 서 청중을 압도하는 하얀 옷의 신부는 어린 고준에겐 세상에서 가장 멋진 존재였다. 이성에 눈을 뜬 소년이 수도원 대신 속세를 택한 건 어쩌면 우리에겐 다행한 일이다. “막연했지만 무대에서 관객을 향해 연기하는 배우의 모습도 그런 느낌이었어요.”
고준이 말하는 건 쇼맨의 모습이 아니다. “좀더 나이 들고 난 후 왜 제가 거기에 매료되었는지 생각해봤죠. 딱 하나였어요. 힐링. 많은 사람들을 위로해주는 주체자가 된다는 것. 저 자신의 치유를 말하는 게 아니에요. 타인의 정서적인 치유죠. 모든 사람들이 트라우마를 갖고 있잖아요. 제가 맡은 캐릭터 역시 세상 사람들 중 하나라 생각하고 그가 갖고 있는 상처를 대변하고자 노력해요. 그게 아니면 전 배우를 할 이유가 없어요. 제 자신을 가시화하는 데 집중하지 않아요. 부끄럽기도 하고요.” 실제로 고준은 사진 촬영을 하는 내내 쑥스러워했다. 옷이나 자동차, 멋진 시계처럼 자신을 치장하는 것에도 별로 관심이 없다. 평소엔 로션도 안 바른다는 그는 촬영장에 올 때도 동네 슈퍼에 들르듯 편안한 추리닝 차림이었다. “그래도 이건 좀 근사한 추리닝이에요. 다 누가 주는 것만 얻어 입어서…(웃음)”
물욕은 없지만 건강만큼은 부지런히 챙긴다. 잠시 가방을 뒤적이던 그는 파우치 음료 하나를 꺼내 쭉쭉 빨아 마셨다. 홍삼즙이다. 몸을 만드느라 제대로 된 식사를 못했다. 고준은 여전히 20대의 청춘스타 같은 신선함과 남성적 매력을 지녔다. 뒤늦게 주목받는 배우들은 많지만 고준은 소위 말하는 ‘연기파 배우’의 전형과는 거리가 있다. 악역 전문 배우도 감초 같은 조연도 아니다. 여성 팬들의 환호와 함께 떠오르는 신데렐라 맨. 고준은 1978년생이다. 지금껏 그와 같은 성공 사례는 없었다. “사실 실감이 안 나요.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기다니… 걱정도 되긴 하지만 잘해내야죠. 조금씩 승진하는 느낌이에요.”
고준은 그간의 긴 시간을 배우로서 속을 성형하는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20대엔 의욕만 앞섰다. 자신을 몰라봐주는 세상에 화가 나기도 했다. 열심히 머리를 꾸미고 멋진 옷도 입어봤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배우가 되는 건 아니었다. “제대로 된 데 집중을 못한 거죠. 기회만 노렸어요. 자꾸 오디션만 보러 다니고, 겉모습이나 신경 쓰고. 그러고는 말도 안 되는 자격지심에 혼자 힘들어했죠.” 모든 결과엔 과정이 필요하다는 걸 깨닫는 데 약 10년의 시간이 걸렸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자 모든 게 명료해졌다. “배우의 아우라라는 건 눈에 보이는 게 아니었던 거예요. 사고와 태도였죠. 20대 후반에야 그걸 알게 됐어요. 그때부터는 힘들지 않았어요. 제가 고쳐야 할 것과 만들어갈 것에만 집중하면 되니까. 오히려 좋았죠.” 고준은 묵묵히 내공을 쌓아나갔다. 그렇게 60여 편의 필모그래피가 쌓였다. <미스티>에 들어가기 전에 찍어둔 영화 두 편도 곧 개봉을 앞두고 있다. 이준익 감독의 <변산>과 이병헌 감독의 <바람 바람 바람>이다.
<변산>에서 그는 변산에 내려온 무명 래퍼 학수(박정민)와 그의 초등학교 동창 선미(김고은)와 엮이며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동네 건달 용대 역을 맡았다. 먼저 캐스팅된 배우들의 적극 추천으로 영화에 합류하게 되어 더 의미가 있다. “영광스럽죠. 그래도 내가 배우로서 그리 잘못 살지는 않았구나 싶고.(웃음) 이번에도 건달이지만 단편적인 캐릭터는 아니에요. 나름의 성장을 겪으며 변해가죠.” <바람 바람 바람>에서는 이탈리아 유학파 셰프 역할로 우정 출연한다. 잔뜩 허세를 부리지만 뭔가 엉성하고 코믹한 캐릭터다. “2018년이 운이 좋은 해인 것 같아요. 자연스럽게 흐름이 이어지고 있어요. 다음 작품도 계속 보고 있는 중이에요.” 미련할 만큼 천천히, 그리고 우직하게 먼 길을 걸어온 덕분이다.
그는 마침내 찾아온 기회에 들뜨지 않는다. 축배를 드는 대신 침묵 속에 다시 한번 자신을 돌아본다. “요즘 처음으로 제가 가진 포지션에 대한 압박을 느끼고 있어요. 단순하게 살아왔는데 생각할 게 많아졌어요. 배고프고 힘들던 시절이 행복했다고는 하지만 다시 돌아가고 싶진 않거든요. 무의식중에 그런 두려움이 연동되니까 예민해지고, 삶이 좀 불편해진 것 같은 느낌도 있어요.” 상황이 달라지면 사람은 변하게 마련이다. 고준 역시 변할 것이다. 그 변화가 그에게 어떤 결과로 나타날지는 아직 모른다. 다만 오랜 시간을 기다린 만큼 머지않아 찾아올 고준의 시대가 꽤 오래갈 것이란 사실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오래 해야죠. 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하고 상처를 잘 치유해주고. 그렇게 한 인생 살면 정말 잘 살았다는 생각이 들 것 같아요.” 뿌연 안개가 걷히고 한 남자가 마침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이건 케빈 리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어느새 우리 곁으로 다가온 배우 고준에 대한 짧은 서막일 뿐. 그의 드라마는 지금부터다.
- 에디터
- 조소현
- 포토그래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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