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바라는 시대, 이미숙
이미숙은 배우라는 직업에 자존감과 모험심이 매우 강하다. 40년 걸쳐 그 세계의 최고가 된 인물이 지닐 수 있는 특권이다. 옳지 않은 것은 강하게 거부하고, 다른 것은 ‘으하하’ 웃으며 포용한다. 그런 여성이 앞으로도 최고의 자리에 있어주리란 믿음만으로도 우리는 위로받는다.
이미숙은 인터뷰 전, 스태프들과 담소를 나눌 때 스마트폰 속 사진을 보여줬다. “이걸 누가 찾아서 보내주더라고.” 어린 이미숙이 롤러블레이드를 타며 웃고 있다. 손을 잡은 남자는 어린 전영록이다. “데뷔작 <모모는 철부지>의 사진이야. 진짜 어리지 않아? 초등학생 같아. 이 눈 좀 봐. 어쩜 저렇게 초롱초롱하니.” <모모는 철부지>는 대학가요제를 배경으로 한 1979년 작 청춘 영화다. 당시 이미숙은 스무 살이었다. “이거 가발이야. 쓰라니까 썼지. 그땐 포스터도 감독이 쳐다보라면 쳐다보고, 그렇게 찍었어. 이건 미국에서 입국하는 장면인데, 당시엔 미국에서 왔다 하면 왜 그렇게 모자를 썼나 몰라. 으하하”
이미숙이 출연한 37편의 영화와 47개의 방송을 다 보지 못했다.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열람 가능한 작품도 있지만, 구하기조차 쉽지 않다. 이미숙이란 배우를 <고래 사냥>에서 처음 봤다. 내가 태어나고 2년 뒤에 나온 작품이다. 초등학생 때 TV에서 재방영했는데, 뭔가 미성년 금지의 세계 같아서 숨어서 봤다. 겁 없이 뛰어다니는 두 남자 사이에서 벙어리 춘자가 안쓰러웠던 기억이 난다. 이미숙이란 배우를 강렬하게 인식한 영화는 <정사>다. 1998년 작으로, 이미숙이 <고래 사냥> <겨울 나그네>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같은 작품으로 20대를 꽉 채운 뒤 10여 년의 공백 후에 복귀한 작품이다. 이미숙이 두 번째 연기 인생을 시작한 뒤에야 나는 그녀의 작품을 제대로 본 셈이다. <정사>의 여주인공 서현의 나이는 서른일곱. 당시 이미숙의 나이는 서른아홉. 본인과 비슷한 연배의 여자 역이었다. 동생의 남자에게 끌려 오락실에서 정사를 나누는, 당시로선 파격적인 소재에 감정 묘사가 치밀한 수작을 통해 이미숙은 복귀했다. 그녀는 10여 년의 공백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 있다. “그 기간은 휴식이 아니라, 편견, 고정관념과의 싸움이었어요.” 그녀는 <정사>로 싸움에서 이겼다.
이미숙은 서현 같은 역이 예순 이후에도 오리라 생각한다. “사실 말이 그렇죠. 얼마나 힘든 일이에요. 하지만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니까 앞으로도 그런 배역을 꿈꿀 거예요. 독립적이고 아름다운 여성을 연기할 때 희열을 느끼니까요. 60, 70, 80세 언제 만날지 모르니 배우로서 늘 준비해야죠.” 10여 년을 함께한 스태프들에게는 편하게 말을 놓던 이미숙이 딸뻘인 내게 정중한 존댓말로 바꾼다. 이미숙에게 할머니란 ‘여성’은 유기농 채소를 키우고 손주를 위해 밥상을 차리며 생을 보내지 않는다. “<빅토리아 앤 압둘>을 봤어요. 영국 여왕과 인도 시종이 30~40년의 나이 차와 계급을 넘어서 교감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죠. 어린 시절부터 여왕이라는 무게를 견디고, 왕실 안에서 고립된 삶을 살아온 빅토리아 여왕은 곁에서 자신을 진심으로 대하는 남자에게 어떤 감정이 생겼을까요? 함께 산책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 풍요로움을 느꼈겠죠. 여왕은 늘 예쁘게 입어요. 죽을 때도 예쁘게. 압둘이라는 남자가 늘 옆에 있으니까요. 그 영화를 보면서 내 미래도 저렇겠지 싶었어요. 사람의 외형은 변하지만 뜨거운 감정은 여전하잖아요. 이전 세대의 여성은 자기 검열로 본능을 억제하고, 사회에 부딪히기 전에 체념하셨죠. 하지만 할머니도 여자잖아요. 우리는 조금 다른 시대를 살고 있으니까 그런 작품이 내게 찾아오지 않을까 싶어요.” 외출을 앞두고 스카프를 이리저리 매보던 나의 할머니가 떠올라 눈물이 흘렀다. 이미숙은 “왜 그래요, 무슨 생각이 든 거예요”라고 물었지만 서로 빠르게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났다. 내가 잘못 보지 않았다면 그녀의 큰 눈도 젖어 있었다. 우리는 인터뷰를 멈추고 촬영을 먼저 하기로 했다. 그녀는 화통한 언니가 되어 촬영을 주도했다. “난 억지로 꾸미고, 어색하게 포즈 잡는 거 너무 싫어!” 그녀는 자연스러운 사진을 좋아한다. “내 사진은 리터칭 많이 하지 마요. 자연스러운 게 좋아요. 난 주름도 좋아.” 그녀는 턱에 보톡스를 한 번도 맞아본 적 없다. 그녀가 메이크업 아티스트에게 물었다. “그런데 턱에 보톡스 맞으면 작아지긴 작아져? 으하하.”
그녀의 최근작인 드라마 <돈꽃>을 엄마와 함께 본 적 있다. “와, 근데 지금 이미숙이 몇 살이지?” 모녀가 몇 살인지 추리했다. 그만큼 <돈꽃>은 이미숙의 미모와 스타일만 완벽히 보여준 드라마다. “정말란은 정말 예뻐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 역할은 그런 여자여야 해요.” 잔머리 하나도 계산한 돈업스타일(??)을 하고, 1cm의 틈도 없이 몸에 딱 맞게 재단된 옷을 입는 여자. 단순히 재벌가의 사모님이 아니라, 그렇게 치밀하게 인생을 살아온 정말란이란 여자를 보여주는 스타일이었다. 청아라는 그룹을 갖기 위해, 유아 살인도 서슴지 않는 여자. 그렇게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이미 돈으로 못하는 건 없음에도 더 올라갈 곳을 미친 듯이 욕망하는 여자. 모든 것이 드러난 상황에서도 “글쎄, 걔가 왜 그랬을까”라고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하는 여자. 나는 가장 악한 인물인 정말란을 가장 응원했다. 드라마기 때문에 결국 그녀가 권선징악의 파멸로 가리란 걸 알지만, 그녀가 온갖 계략과 뻔뻔함으로 원하는 바를 채워나갈 때 희열마저 느꼈다. 악행을 저지른 인물들이 판사 앞에서 죄수복을 입고 선고받을 때 정말란은 끝까지 우아한 드레스를 입고 시계를 들었다. 죄수복이란 ‘의상’을 입을 수 없다는 그녀는 결국 미쳐버리는 것을 택한 거다. 끝까지 정말란으로 남는다는 그 결말이 나는 꽤 마음에 들었다. “내게 정말란은 정말 특별해요. 누구나 선악이 있잖아요. 악은 지탄받고, 선은 칭송받지만 누가 그 둘로 완벽히 나뉘겠어요. 정말란은 여자로서의 삶이 어땠을까 생각했어요. 남편은 혼외 자식을 낳았고, 아들까지 죽이는 시아버지 밑에서 자신의 아들을 지켜내야 했던 세월… 그녀는 어떻게 버텼을까. 그녀의 악행을 정당할 수 없지만 그리 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대해 설명이 필요해요. 감독에게도 정말란의 내면을 더 표현하고 싶다고 했죠.”
이미숙은 역할을 해석할 때 현재가 아니라 과거를 본다. “역할의 타이틀이 아니라 본능을 생각하죠. <우리가 결혼할 수 있을까>의 들자도 겉으로 보면 우악스러운 엄마잖아요. 제게 들자는 ‘엄마’가 아니라 ‘여자’로 보였어요. 들자는 엄마가 되기 전에 어떻게 살았을까? 어떤 여자일까? 궁금증을 갖고 시작했죠. 그래야 역할이 입체적으로 나올 수 있어요. 엄마가 되기까지의 이야기 굴곡, 그걸 내 인생, 다른 여성의 인생과 비교해요. 아직 우리나라 영화나 드라마는 나이 든 여자가, 엄마가 주가 되어 인생을 펼쳐나가는 경우가 많지 않아요. 항상 누구의 엄마, 시어머니죠. 내가 아닌 누구의 여자인 거죠. 그런 제한이 때론 답답하지만, 그 안에서 내 연기를 넓혀나가려고 해요.”
그런 점에서 정말란이란 독보적인 캐릭터를 연기할 수 있던 <돈꽃>은 그녀에게 특별하다. 지금도 그 잔상에 몸을 떨기도 한다. “저는 되게 미래지향적인 여자예요. 작품이 끝나면 바로 잊어버리거든요. 과거에 집착하고 싶지 않아서 의도적으로 많이 떨쳐내요. 사람들이 이미숙 하면 <고래 사냥> <겨울 나그네>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를 대표작으로 꼽아요. 대중에게 잔상처럼 남아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죠. 저는 다시 찾아본 적 없어요. 희한하게 <돈꽃>은 달라요. 계속 남아요. 더 이상 열정적인 역할은 오지 않는 걸까, 생각하는 시점에 <돈꽃>이 왔죠. 배우로서 이렇게 합이 딱 맞는 드라마, 역할을 갖기가 힘들어요. 지난 40여 년의 연기 인생을 돌아보면, 젊을 때는 유명해져야 한다는 목적의식을 갖고 연기했다면, 그다음에는 내 연기에 색깔이 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나는 느끼지 못했어요. 그런데 이번 정말란이란 역할은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인생의 맛을 아는 연기를 한 거 같았어요.”
또 하나, 이 드라마에서 압도적인 구성은 ‘내 아들의 친구이자 개’로 키워온 강필주(장혁)와 정말란의 묘한 관계다. 이들 감정에 대해 한 번도 대사로 언급하거나, 직접적으로 설명하는 장면이 없음에도 두 배우의 교차하는 시선만으로 긴장감을 끌어낸다. “아들 친구를 어릴 적부터 키우면서 한 번도 남자로 느끼지 않았을까요? 그런 감정이 없기에는 그녀가 여자로서 가진 게 아직 많잖아요. 아까도 말했지만 저는 악행을 저지르고 복수를 당하는 정말란이 아니라 그 역할이 가진 감정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장혁 씨와는 이번에 처음 연기해보는데, 둘이 정말 최고의 호흡이었기에 가능했죠.”
<돈꽃>은 이순재, 장혁, 박세영 등 모든 배우가 이미숙과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며, 누구 하나 삐걱거리거나 넘치지 않은 완벽한 합을 보여준 드라마다. 그들의 합은 웰메이드를 넘어 윔블던의 결승전처럼 강력한 서브가 오가는 스포츠를 보는 것 같았다. “드라마를 보면서 희열을 느꼈다는 분들이 많아요. 배우인 우리도 그랬어요. 연기는 마음을 흔들지 않으면 공감을 얻을 수 없거든요. 배우, 감독, 작가, 모두 열정적이었어요. 이런 사람들 만나기가 쉽지 않아요. 연기 열정뿐 아니라 작품을 읽어내는 태도, 작업하는 순간마다 열정적이었어요.” 이미숙은 <돈꽃>에서 연기 인생 최초의 경험도 했다. “섬뜩하기까지 했죠.” 정말란은 서로 연정을 품고 있는 강필주(장혁)와 며느리인 나모현(박세영)이 함께 있는 모습을 목격한다. 시어머니이자 친구 엄마로서가 아니라, 여자로서 질투심에 휩싸이는 장면. “내가 진심으로 질투가 나더라니까요. 걔네 둘이 같이 있는 게 너무 싫은 거예요. 이게 뭐지? 정말란에게 빙의된 건가? 그건 연기가 아니었어요. 진짜 그런 감정이 들었죠. 나중에 물어보니, 장혁도, 세영이도 진짜 잘못한 것처럼 제 눈치를 봤대요. 그 신에서 우리 셋이 ‘진짜’가 된 거예요. 연기자로서 또 만날 수 있을까 싶을 정도의 경험이었죠.”
이미숙은 스태프와 배우를 위해 준비한 음식 중에서 빵 한 조각을 집어 들었다. “평생 배부르게 먹어본 적 없어요. 내가 제일 부러운 게 칠첩반상 차려놓고 막 먹는 거예요. 그러고 싶어도 버릇이 안 들어 있어서 힘들어요. 그렇게 배우란 직업을 위해 늘 관리해왔죠.” 촬영이 끝나고 삼겹살집을 예약한 것은 오늘 수고해준 친구이자 스태프들을 위한 것이다. 한 스태프가 이렇게 말한 적 있다. “누나는 러닝 머신 위에서 뛰다가 죽을 거 같아요.” 이미숙은 다시 ‘으하하’ 웃는다. “요즘은 운동도 나태하게 해요. 조금씩 슬슬 놓고 싶어져. 평생을 죽을 것처럼 관리해왔으니 일종의 반항이랄까. 사춘기 맞은 애처럼 그러죠. 아무래도 세월이 의지를 약하게 만드나 봐요. 하지만 이제부터가 시작이니 마음을 잡아야죠. 젊을 때 이미숙이란 배우의 평가는 50, 60 넘어서 나올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때 내가 어떻게 연기해왔고, 살아왔는지 보일 거라고. 내년이면 60이잖아요. 이제까지 해온 것처럼 그렇게 또 갈 거예요. 앞으로 계속, 평생 멋진 배우로 살 거예요.”
이렇게 높은 자긍심과 자존심으로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여성을 보면 나까지 의지가 솟는다. 특히 요즘 같은 시절에 이런 여성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위안을 얻는다. “저는 다른 거 잘 못해요. 오늘 사진 포즈도 하라 하면 잘 못하겠고,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도 영 아니죠. 하지만 제 일에 있어서는 자신 있어요. 그렇기에 일에 있어선 도전과 모험도 자주 하죠. 뭐든 내가 직접 해보고 판단하거든요. 내 인생은 내가 결정하고, 내가 만들어가는 거니까. 해보고 안 되면 안 되는 거고, 되면 이전과 다른 내가 되죠.”
- 에디터
- 김나랑
- 포토그래퍼
- 주용균
- 스타일리스트
- 김성일
- 헤어
- 남현(아티스트태양), 태양(아티스트태양)
- 메이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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