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류산방 정신
고유한 장인 정신으로 책을 만드는 출판사 수류산방. 중심이 자그마치 20명에 이르는 무형문화재의 삶을 20권의 구술 책으로 기록했다.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을, 아무도 하지 못하는 일로 바꾼, 지난 1년 동고의 시간.
김인_제4호 갓일, 가장 고운 쉰 줄짜리 모자
김인은 갓일 중에서도 총모자를 만들던 장인이다. 총모자는 갓에서 위로 튀어나온 부분이다. 테두리인 양태를 만드는 장인이 따로 있고, 그 둘을 서로 엮는 장인이 따로 있다. 남자들이 이마에 붙이던 망건을 만드는 장인이 따로 있고, 그 위에 덧쓰던 탕건을 만드는 장인이 따로 있다. 제주도 북쪽 바닷가를 따라, 마을마다 일이 세세하게 나뉘어 내려왔다. 어떤 여자들은 물질을 나가고, 그렇지 않은 소녀들은 마을 어느 집 상방(마루(사랑??))에 모여 같이 웃고 자고 떠들며 말총을 엮는다. 김인은 특별하게 총모자를 고집한 장인이 아니라, 그 소녀들 중 조금 더 솜씨 좋고 다른 마을로 시집가지 않은 채 제주 도두리(지금의 제주시 도두동)에 산 할머니다. 그의 생애는 도두리 마을의 이야기다. 도두리 마을 신과 집집이 귀양풀이 내력과 그 기름진 밭이 활주로 밑으로 사라진 역사와 여자들이 나서서 풍물 치는 이야기다. 처음 제목을 ‘도두리 마을 대장 할망’이라고 지었는데, 그때도 지금도 그 제목이 옳다.
“이제 배우지 않아, 돈을 얼마를 준다고 해도 안 배워. 장사꾼이 있길 하나, 팔 수 있길 하나. 팔고 사지도 못하는 물건 뭐, 이제야 그걸 배워서 뭣 할 거야? 눈 아프고, 머리 아프고, 다리 오그리고 앉아놓으면 아프고. 아이고, 이거 잘못 배워졌다, 그거 안 해도 살아지는 것을. 절대 안 하려고 해. 오죽해야, 서울서 대학교 하는 것들, 열둘이 왔어. 모제 하는 할머니가 어떤 할머니인가 보러 왔다더니, 할머니 머리가 나쁘다고 해. 왜 이렇게 쫌쫌한 일을 배웠느냐고. 눈도 어둡고 머리도 섞어질 일을 왜 했느냐고. 눈이 어둑어둑해서 못하겠다고 그러면서 가더라. ‘에이, 그까짓 거 하지 마세요. 돈 100만원 받으면서 머릿골 어지럽게 하지 말고 오래 사세요.’ 그렇게 못하게 해.”
이영수_제42호 악기장, 당장 탁할지언정, 오래 퉁겨보면
그는 대대로 악기를 만들던 장인 가문의 후손이 아니다. 소리에 심취한 광인도 아니다. 고향 논밭을 판 돈으로 뛰어들었던 사업이 망해서 시작한 일이었다. 나는 이영수라는 악기장의 이름보다 그가 만드는 벽오금작사(碧梧琴作社)라는 레이블을 먼저 알았다. 푸른 오동으로 금(琴)을 만드는 집. 음을 만드는 일은 우주의 조화를 드러내는 일이다. 음양오행과 육십갑자가 모두 음에서 나왔다. 악기를 만드는 일은 나라의 일이었다. 산조 가야금과 정악 가야금과 25현 가야금, 거문고, 아쟁, 금과 슬, 수공후와 당비파와 월금… 그런 이름을 더듬다 보면 유라시아 대륙의 넓이와 깊이가 포개어진다. 책을 한창 만들던 지난해 11월에 이영수 선생이 작고하셨다. 그러고 얼마지 않아 대를 이어 악기를 만드는 아들 이동윤 전수교육조교가 아버지의 구술을 하나하나 검토해주었으니 감사하고 송구한 일이다.
“일을 하면 모든 잡념이 없어져요. 아주 몰두해가지고 말이지. 재미있다고 할까요? 움직이면 괜찮은데 가만히 있으면 가슴이 따끔거리고, 아파서 다리를 쓸 수가 없어요. 그래서 자꾸 움직여요. 지금도 악기를 계속 만들고 있거든요. 아침에 나와서 2시간 하고 쉬었다가 가서 또 일하고. 그런데 맨들어서 뭐합니까? 팔리지 않는데요. 그래도 생명이 있는 이상 내 몸을 위해서 일을 허고 있어요. 팔자에 타고나는 모양이에요. 나는 죽을 때까지 일을 하고 죽을 사람이에요.”
서한규_제53호 채상장, 귀한 것을 담은 것이 채상이지
서한규가 채상을 만드는 장인이 된 것은 할머니가 시집올 때 가져온 100년 넘은 채상을 보고 그 만드는 기법을 재현해내면서부터다. 끊어진 길을 더듬어 다시 살려내는 것도 전통을 잇는 일이다. 서한규는 대나무의 고장 담양에서 태어나서 잠시 서울과 부산에 드나들기는 했지만 평생 고향에서 살았다. 그의 구술은 담양 토박이말, 담양의 대나무 일, 그것이다. 그래서 구술문을 다듬는 일도 그 근처에서 오래 농사짓고 책 만드는 이에게 부탁했다. 더러 요즘 말로 바꾸면서 못내 죄송했는데, 대를 잇는 딸 서신정 보유자가 편지를 보내어왔다. “얼마 전에 돌아가신 아버님을 다시 살아 뵙는 것 같아 많이 웃고 또 울며 읽었습니다.” 서한규 선생은 책을 만들기 시작하던 지난해 3월에 돌아가셨다.
“지금은 안 사가요. 우리나라 사람들 채상은 알도 못합니다. 채상이 여자 쓰는 물건인디, 반짇고리입니다. 바느질할 때 가위나 뭐, 실패, 바늘 놓고 쓰는 것 아닙니까? 요새 옷집에서 옷을 맞춥니까? 백화점 가면 옷 다 있는데. 그러니까 지금은 간혹 사람들이 오히려 물어봐요. 어떤 분들은, 여기 관광객들도 많이 오지만은, 채상이 제 이름인 줄 압니다. ‘채’ 자가 성이고 ‘상’ 자가 이름인 줄 알고. ‘이름이요, 아니요?’ 물어보고 그러면 ‘이름은 서한규입니다’ 이러고.”
박용기_제60호 장도장, 장도의 전통을 구현하다
박용기는 어려서 이름난 장도 공방에 도제로 들어가 기술을 배웠다. 하지만 해방 후에나 전쟁 다음에 장도를 팔 일은 생기지 않았다. 그는 새장을 만들어 팔고 전지용 칼을 만들어 팔고 난로를 만들어 팔고 학교에서 주사로 일하면서, 숙직실 안에 장도 공방을 차려놓고 팔리지 않는 장도를 계속 만들었다고 한다. 은장도 한 자루를 만들려면 금속을 녹여 칼을 만들 줄 알아야 하고, 옥이나 은을 세공해 칼자루와 집을 만들 줄도 알아야 하고, 새기고 붙이고 두드리고 일이 많다. 남자건 여자건, 몸에 지니는 패물로 장도를 넘어설 것이 없다고 늘 생각해왔다. 그것은 보석이면서 기술이고, 또한 무기이기도 하지 않은가. 그 날이 스위스 칼처럼 기능적으로 진화하기만 하면 더할 나위가 없을 텐데 말이다.
“나는 이걸 해서 돈을 많이 벌어야 되겠다는 그런 욕심이 없었어요. 돈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고. 요 일은 저축이 안 돼요. 그렇게 팔렸어도 대량생산이 안 되니까 나는 일생을 빚으로 살았죠. 그래도 저는 빚을 겁내지 않았어요. 제가 한 자루 만들면 돈이 얼마다 이것만 생각했지. 어떻게 해야 빠른 시간에 좋은 작품이 나오느냐 고것만 생각했어요.”
황영보_제65호 백동연죽장, 기술은 다음, 연장 간수가 첫째라
물부리, 대꼬바리, 초오리, 토리, 또개미, 메뚜기… 이 생소한 이름들은 담뱃대의 부분을 일컫는 용어다. 정걸이, 다듬독, 모루독, 보래, 통백이… 이것은 담뱃대를 만드는 연장의 이름이다. 황영보는 남원 왕정동의 담뱃대 만드는 마을에서 태어나서 학교도 못 가고 담뱃대를 만들었다. 북한 의용군에도 끌려갔다가 도망쳤고, 남한 국군에도 입대했다가 휴가에서 복귀하지 않고 탈영한 채로 산속에 숨어서 담뱃대를 만들었다. 그는 말이 길지 않다. 그것까지 말을 해야 혀? 보면 그냥 다 보여. 쩌그 산속에 있어… 현대를 살다 내려간 학자와 연구자들은 그와 소통하지 못한다. 정연하게 이어지지 않고 뭉쳐 맴도는 남원 토박이말을 더듬는 것은 암호를 해독하는 일과 비슷하다. 하기는 이 아름다운 백동연죽(백동과 대나무로 만든 담뱃대)이라는 것이, 이제 우리에게는 우아한 암호 아닌가.
“아버지가 허다 만 것을 내가 만들었지. 담뱃대를 만드니까 옆에서 선생님들이 나보고 잘헌다고 하더만. 니 아버지보다 더 잘한다, 너는 좋은 담뱃대 만들겄다. 아버지한테 담뱃대를 배울 때 뚜드려 맞으면서 배웠어요. 그러면 남원서 달아나버리곤 했어요. 아버지는 술만 좋아하셔서 내가 쎄[혀]가 빠지게 일하곤 했지만 (나중에) 내가 만든 것은 없어서 못 팔았는데 값도 비싸게 받았지.”
이봉주_제77호 유기장, 방짜 원대장이 가는 길
이봉주의 삶의 역정은 장인들 중 단연 화려했다. 평북 정주에서 태어나 소년 시절 압록강 군수 공장과 만주국의 수도 신징을 가 보았다. 목숨을 걸고 홀로 남하한 서울에서 이름조차 모르던 친지의 유기 공장을 찾아냈다. 전쟁 중에 대구에서 과자를 팔거나, 바다 건너 제주까지 내려가 신문사 지사장을 하기도 했다. 그의 유기 공장은 연탄 화덕에 양은 냄비를 쓰던 시절에 폭삭 망하기도 했고, 미국의 공장과 기술을 교류하기도 했다. 오늘날 백화점에서 망치 자국이 멋스러운 방짜 반상기를 구입할 수 있는 것은 이봉주의 덕이다. 그런데 이봉주는 그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엄청난 온도와 힘으로 만드는 방짜는 반드시 열한 명이 한 팀으로 분업을 해야 한다. 이봉주는 진정 방짜를 살리려면 그 열한 명을 모두 문화재로 지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전통은 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의 체계라고 말이다.
“옛날 선배 대장장이들이 유형이 여러 가지 있었거든요. 어드런 사람은 빨리하는 데 도사고, 어드런 사람은 아주 예쁘게 하는 데 이름난 사람이고. 난 그 사람들처럼 일류, 가장 빨리하지도 못해요. 또 붓으로 그리는 것처럼 아주 곱게 이쁘게도 난 못해요. 다만 내가 그런 사람들보다 나은 점은, 징 같은 거 있잖아요. 큰 거. 딴 사람은 계획을 못 세워요. 나같이 미련한 사람. 무조건 목표를 딱 세우면 중국에서 사람 몇십 명씩 데려와서 훈련을 시키고. 그게 공짜로 되는 게 아니잖아요? 내가 잘나서 된 게 아니고. 나는 마음을 먹었다 하면 꼭 성사되곤 했어요.”
이수여_제66호 망건장, 천천히 구멍구멍 엮엉 와수다
이수여는 망건청 집의 딸로 태어났다. 망건청은 망건 만드는 일청이다. 일청은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일하는 집이다. 망건청은 마을 여성들의 망건 공방인 셈이다. 이수여는 생전에 한결같이 얌전하게 망건 잣는 모잣골을 앞에 안고 찍은 사진만 남겼지만, 이수여의 이야기는 옛날 여자들이 함께 일하던 시스템, 거기 한쪽에서 노래를 부르고 놀이를 하던 소녀들, 그 사라진 라이프스타일의 재현이다. 말수 적고 얌전한 이수여는 4∙3 사건 때 남편을 잃었다. 하나뿐인 딸과 그저 집 안에서 망건만 짜며 살았다. 대를 이어 보유자가 된 강전향이 구술을 도왔다. 그 딸 전영인이 편집부와 연락을 주고받았다. 이수여의 원고를 정리하면서, 국가라는 것에 대해서 자꾸 생각했다.
“배우는 데 시간이랑 노력이 많이 들엉. 물질은 바다에 그날 갔다 오면 그날 돈 되는 것처럼 돈이 빨리 되잖아. 이건 그렇게 되는 게 아니지. 정성을 들여서 하고 있으면, 제주도 말로 그저 노력하고 있으면 되는 거지. 오래 걸려서 명상처럼 마음도 차분하게 먹게 돼. 주변에 무슨 일이 생기거나, 아이들이 불안하거나 그러면 이 일이 안 돼. 절대로 안 돼. 천천히 해야 돼. 현대 사람들은, 이런 자상한 일을 허쟁을 않여. 요즘엔 글도 연필로 쓰지 않고 타자로 닥닥닥 찍을 시대인데, 구멍구멍 엮는 그런 일 허젠하쿠과(하려 하겠어)?”
박기하_제11-4호 강릉농악, 사방 농악을 이끄는 상쇠
스무 편 중에 누구 이야기가 가장 재미있냐는 질문을 곧잘 받을 때마다 항상 끝까지 고심했던 몇몇 중 한 편이다. 박기하는 강릉농악의 상쇠다. 강릉농악은 강릉단오제의 핵심이 된다. 해방 후에 전국 곳곳을 돌며 농악을 가르쳐 끊어진 전통을 살렸으니, 우리가 아는 그 농악의 전형을 세운 이다. 그는 학교에 한 번도 다니지 못했다. 한문을 혼자 깨쳤다. 그는 산신령에게 내려 받은 침으로 오랫동안 사람을 고쳤다. 또 집터와 묏자리를 봐주는 지관 노릇도 했다. 그는 평생 너무 많은 일을 했고, 그냥 농사꾼으로서, 변변한 직업 없이 지냈다. 그러나 삶의 모든 장면을 총명하게 기억하고 또렷하게 전한다. 만약 살아 계셔서 만날 수 있었다면 정말 뵙고 싶었던 그 한 분이다.
“형님이 봄에 쇠를 끌고 나가요. 노름해서 돈 다 잃고, 빚 갚아야 하니까. 내가 ‘아, 노름했다고 소를 팔아먹고 어떻게 사오?’ 하니까 ‘겨우내 또 돈 따면 쇠를 사지 뭐’ 그래요. 이 사람뿐만 아니라 젊은이들 노는 데 가봐도 노름하거든요. 난 아주 그게 싫거든요. 그래서 동네 영좌 어른한테 찾아가서 우리 동네 노름을 막자고 말했어요. 어른께서는 나는 남 노름하는 데 막을 재주가 없다고 해요. 그래서 말했죠. ‘농락을 채려봅시다.’ 당시엔 농악이 아니라 농락입니다. 그러니 뭔 사람이 있냐고 하셔요. 다시 내가 ‘우리 친구들 봐가지고 꾸려보면 농락이 되겠죠’ 하니까 ‘대답 못하겠다만 내가 동네 어른들 모아가지고 한번 회의를 해보마’ 하셨어요. 사흘 후인데, 나를 오라고 그래요. 가니까 해보자고 하대요. 해방되고 그 이듬해, 내가 괭쇠(꽹과리)를 들었어요.”
김실자_제34호 강령탈춤, 한바탕 잘 뛰었네!
강령이 황해도 어디 지명인지도 처음 알았다. 하물며 강령탈춤이다. 이남에 피란 와 강령탈춤의 맥을 되살려낸 것은 강령 사람들만이 아니다. 김실자도 강령 사람이 아니다. 그이는 고향 황해도에서 해방을 맞았다. 피란 내려오는 길 위에서 아이를 낳았다. 빈집에서 혼자, 옆집에서 가위를 빌려 직접 탯줄을 잘랐다. 그 아기를 업은 채 끊어진 철교를 안고 기어서 강을 건넜단다. 인천에 정착해 시장에서 좌판을 깔아놓고 장사를 해 아이를 키웠다. 그이가 국가무형문화재 강령탈춤의 무보를 정리해 교과서를 만들어낸 김실자다.
“송현동 100번지에서 장사하는데, 그 옆에 소문난 무용학원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구경 가자길래 따라갔죠. 그곳에 할아버지가 계시더라고요. 민천식 선생님이셨어요. 그때 우리 선생님 별명이 양복쟁이, 멋쟁이였죠. 춤을 춰 보래서 따라 하는데 남들은 며칠 배웠다는 걸 제가 하루 만에 다 췄어요. 거기 사람들이 막 놀라는 거예요. 우리는 며칠을 해도 못하는데, 저 색시는 그렇게 잘한다고.”
김정순_제34호 강령탈춤, 탈춤만 춘다고 난리였지
김정순은 김실자와 단짝이었다. 같이 인천의 시장에서 장사를 했고 같이 무용학원을 했고, 나란히 무형문화재로 인정되었다. 김정순도 강령 사람이 아니다. 재인 집안의 자식도 아니다. 일제강점기에 역병에 걸려 학교에 제대로 다니지 못한 채 전쟁을 맞았던 그이는 당차게 여군에 자원했고,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도 담배를 팔아 돈을 모았으니 말 다 했다. 시집온 형수가 탈춤에 빠져 미친년 되었으니 이혼하라는 말도 들었고, 남편의 한없는 외조를 받기도 했다. 그 시대를 거치며, 김정순은 탈춤 하나로 무형문화재가 되고 선생님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이가 탈을 쓴 것은 차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김정순의 삶은 한 자신만만한 여장부의 쟁투기다.
“다짜고짜 학원에 들어가서 물었어요. ’최승희 선생님 계세요?’ 아래위로 훑어보면서 무용을 얼마나 배웠냐고 묻더라고요. 건방지다며 아무한테나 배우라고 그래요. ‘나는 최승희! 김최승희가 될 거예요!’ 그랬죠.”
이은관_제29호 서도소리, 왔구나, 배뱅이가 왔구나
이은관은 배뱅이굿의 명인이다. 그 이름과 얼굴도 알았고, “왔구나 배뱅이가 왔구나”도 알았지만, 솔직히 배뱅이굿을 이번에 처음 들어보았다. 그것이 서도소리인 것도 이번에 처음 알았다. 편집을 담당한 이가 내내 이어폰을 꽂고 틈만 나면 배뱅이굿을 듣고 또 들었다. “뭐가 잘 안 풀려?” 하고 물어보니 빠져들었단다. 어쩌면 그것은 내내 지루한 옛 소리였을지 모른다. 구술을 읽어나가는 동안, 1930년대 이후 서울의 흥행 산업과 연예계가 펼쳐진다. 배뱅이굿 사설을 풀듯, 후라이보이의 만담처럼, 잘도 술술 풀어진다. 어쩌면 50년쯤 지난 후에는 지금의 아이돌이 문화재가 되지 않을까? 그러기야 어렵겠지만, 그럴 수 있었던 마지막 시대를 우리는 장인이자 예인 이은관의 구성진 이야기에서 만난다.
“나는 이유 없이 좋습니다. 왜 그런고 허니, 나뿐 아니라 소리하는 사람들이 이런 데 내 사진과 이야기가 올라간다는 것에 상당히 영광을 느낍니다. 이 늙은이를 찾아주는 것만으로도 고맙지요. 옛 얘기에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뭐 이런 얘기하잖아요. 늙으니까 그런 생각이 나요. 죽은 다음에 남는 거 아닙니까? 젊어선 그런 생각 못했는데요. 늙고 보니까 지금 한 가지라도 더 내놓고 가야 되지 않느냐? 얼마 안 남았거든요? 이젠 다리도 아프고 그런데 여러분이 이렇게 찾아주셔서 영구히 남는 거니까 더 이상 바랄 것 없이 고맙습니다.”
조홍복_제43호 수영야류, 니캉 내캉 함 춰보자
야류(野遊)는 야유의 옛 발음이다. 야유회 할 때 그 야유 말이다. 들놀음이라고도 한다. 옛사람들이 야유회를 어떻게 놀았는가, 마을마다 동래야류니, 수영야류니 해서 남아 있다. 1960년대 수영야류 기록 영상을 보니, 그때 칠십도 넘은 할아버지 다섯 분이 까딱까딱 어찌나 각 잡고 춤추시는지. 이거, 아이돌이잖아. 그러나 조홍복 보유자 구술의 참맛은 야류가 아니라 수영에 있다. 부산 수영. 그 말, 그 맛. 지금 센텀시티가 모두 모래밭이었을 적. 그 모래밭이 비행장이었을 적. 말도 못하게 반짝이던 그 모래가 지금 부산의 그 모든 초고층 주상복합과 집을 세웠다. 우리가 한 번도 보지 못한, 해운대의 그 빛나는 모래알들이 부산의 집집마다 전설처럼 알알이 박혀 있다는 것이다.
“수영서는 메르치[멸치] 하나 안 나니까 전부 다 외지에서 가져옵니다. 남천, 광안, 민락 같은 곳에서, 우동, 해운대, 청사포, 미포, 송정, 심지어는 기장서도 다 찾아옵니다. 그러니 수영 시장은 사람이 몰아치는 데라. 아침부터 수영 사람 다 모이지. 새끼줄로 물줄기를 이어서 그 시장통에 갖다놓는 겁니다. 거기서부터 야류가 시작되거든요. 우리 옛날 수영 조상님들이 먼물샘 물줄기를 새끼로 엮어 가지고와서 수영 새벽 시장 장터에다가 딱 못을 박는 깁니다. 거기서부터 야류 놀고, 좋은 물줄기를 수영까지 갖다주는 거지. 생각해보면 진짜 역사로다 남겨야 돼. 참 좋았구먼. 수영 사람들은 참 행복한 사람들이고.”
김표영_제102호 배첩장, 마음속이 옳아야 그림 속을 고치지
흔히 표구라 부르던 것은 일본말이다. 그것을 일컫는 옛말이 배첩이다. ‘안에 들어가는 작품도 아니고 무슨 액자로 문화재까지’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화선지나 비단에 그리는 동양화는 배첩을 거쳐야 비로소 하나의 작품이 되고, 배첩의 갱신을 통해 생명을 이어간다. 그래서 조선 왕실에서도 배첩장을 궁에 두었으니, 왕의 교지를 두루마리로 만들고, 서적의 표지를 장정하고, 오래된 병풍을 수선하고, 빛바랜 그림을 보수 복원하느라 몹시 분주했다고 한다. 김표영은 인사동에서 표구사를 운영하던 사장님이다. 그 사장님은 15년 동안 매일같이 아침마다 물을 갈며 녹말풀 하나를 삭혔다. 종부가 씨간장을 묵히듯, 그것이 장인의 사명이라고 여겼다. 이제 어쩌면 20년이 되었을 것이다. 사재를 털어 배첩에 필요한 국산 종이를 개발해냈다. 그의 예술은, 어쩌면 잘 만든 흰 종이 한 장에서 시작한다.
“옛날에 중국의 <장황지> 같은 데 보면, 배첩이 되지 않은 작품은 그림이나 글씨를 막론하고 작품이라 보지를 않았어요. 배첩을 해놓아야 비로소 한 작품으로 평가를 받지요. 그러니까 쉽게 얘기해서 작품을 사람이라 비하면, 이 사람에게 어떤 옷을 입혀야 걸맞고 참 색조가 좋을까 두서너 가지 색을 해가지고, 화심(畵心), 그러니까 그림이나 글씨를 최대한 잘 보이게, 좋게 보이게 하는 것이 배첩장의 중요한 관건이라 할 수 있죠. 작품을 살리고 죽이고 하는 것도 배첩사가 어떤 의복을 입혀서 어떻게 하느냐. 그래서 <장황지>를 보면 그렇게 썼어. 주가주라고 하는 사람이 족자 잘하는 명인을 구할려면 하늘의 별 따기보다도 더 어렵다고 했어요. 좋은 기술자를 구하면 후하게 대접하라고 그랬어.”
이양교_제41호 가사, 12가사를 완성하다
가사와 시조의 차이를 잘 몰랐다. 가곡은 또 어떻게 다른 거지? 이양교는 어린 시절 집안과 동네 어른들의 시조창을 들으며 자랐다. 젊은 시절에 당시 야당 총수이던 유진산의 시조 선생 노릇을 한 적도 있다. 무릇 사회적으로 기품과 위신이 있다면 꼿꼿이 앉아 시조 몇 편을 읊어야 쳐주던 시대라니. 어쩌다가 우리는 지금 국회의원이고 지방 유지고 밤마다 어느 술집에서 트로트를 부르며 브루스를 추는 줄로 아는 시대가 되어버렸는지 말이다. 이양교의 꼿꼿한 구술을 읽어가자면, 시조창을 하던 선비의 모습이 그저 겹쳐진다. 20권의 책을 마감하느라 맞는 새벽마다, 라디오에서 이양교의 가사가 많이도 나오는지를 그때야 알았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하니.
“내 이런 정성이 아니었으면 12가사가 전승이 안 될 뻔했어요. 이렇게 하고, 또 내 제자들이 받아 하니께 12가사가 전승되고 있는 것이지요. 제자들한테는 늘 ‘이렇게 열심히 배웠으면은 잊지 말고, 나한테 안 오더라도 누굴 가르쳐줘라’ 합니다. ‘그냥 있지 말아라. 이렇게 어렵게 배운 걸 가지고 왜 그냥 있느냐?’ 이런 얘기를 하지요. ‘앞으로는 너희들이 끊어지지 않도록 잘해야 혀. 민족음악인데 끊어지면 되겄어? 그거 안 되제.’”
임석정_제118호 불화장, 신심이 있어야 불모가 되는 게지
불화장 석정 스님의 구술은 모든 장인들 가운데 단연 그 분량으로 압도적이었다. 금강산에서 미혼인 신여성 어머니와 당대의 선승 석두보택 스님 사이에서 태어나 금강산 속에서 자란 석정 스님의 삶은 기나긴 여행이다. 아버지를 찾아 홀로 집을 나서 금강산에서 구례까지 내려가던 열네 살 때부터 그랬다. 어린 사미승이 지났던 모든 절과 만났던 고승들과 절집의 법도를 낱낱이 풀어내는 구술은 그 자체로 20세기 한국 불교사와 겹쳐진다. (모든 장인들의 구술에 통찰과 기품이 녹아 있기는 하지만, 석정 스님 편은 단지 장인의 구술문이라고 하기 어렵다.) 놀라운 기억력과 엄정한 묘사력과 기품 있는 문장에 빠져들다 보면 추상과 비현실을 상징하는 도상으로 가득 찬 거대한 불화의 만다라 화엄장을 볼 때처럼 황홀함이 몰아친다. 그리고 그 황홀이 마침내는 놀랍게도, 정연하고 고요함 속에, 조금도 흔들림 없었음을 마주하게 된다.
“댕기다 보면 다른 절에서 해가지고 그 절은 이미 없어져버리고, 어디 있었는지 알 수도 없는 절 이름이 나오는 불화가 많이 있어요. 시방은 별로 모양새나 역사도 없는 절에다 모시지만, 그 탱화가 언제 어디로 모셔져 갈지 그건 우린 모르니까, 장소나 보수에 차별을 두지 말고 작품은 집중해서 할 때마다 최고로 잘하려고 해요. 오늘 이 탱화를 하면 이걸 최고로 잘하고, 그다음에 또 무슨 탱화를 하면 그걸 최고로 잘하고.”
노재영_제2호 양주별산대놀이, 나는 신이 나서 죽겠다
노재영은 양주에서 나고 자라 양주별산대놀이의 옴중과 취발이를 맡았던 재인이다. 어려서 요즘 아이돌 그룹을 흉내 내듯 산대춤을 흉내 내며 놀았고, 매일 만나는 마을 어른들이 모두 무당이고 재인이었다. 어쩌면 그에게 산대놀이는 당연한 것이었다. 정작 노재영의 구술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내용은 산대놀이가 아니라 6∙25 전쟁이다. 북에 의용군으로 끌려 원산까지 올라갔고,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갇혔다가, 다시 돌아갔을 때 불타 폐허가 된 고향을 마주했다. 그리고 휴전 나흘 전에 해병대로 징집되어 보고 갔던 길을, 눈앞에 그리듯 생생하게 묘사한다. 우리는 아예 그가 간 길을 더듬어 지도로 그렸다. 그때 전쟁은 교과서 속 낱말이 아니라 선연한 현실로 다가온다. 양주별산대놀이는 조선 시대 재인의 입담이며, 이 재인은 그 입담으로 20세기 한국사를 엮어낸다.
“양주별산대놀이는 상놈과 양반 사이에 격이 진 것을 욕을 해서 해소할 수 있게 맨든 연극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양주별산대놀이를 알아야 하지요. 양주별산대놀이가 뭐예요? 춤이나 추고 그런 게 아니죠. 대사 한 끄트머리, 한 끄트머리가 전부 양반들에 대한 상놈의 가면에서 나온 욕이다 이거예요. 그런 걸 대한민국 사람이 알아야 해요. 상놈하고 양반하고 대결 지는 것을 많이 재현해냈구나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하고, 또 그것을 배워야 된다 이 말입니다. 그렇잖아요?”
이윤란_제57호 경기민요, 12잡가, 참 쉽고도 어렵지
이윤란 하면 잘 모르겠지만 이은주라면 아실 겁니다, 하는 말을 들었다. 이윤란은 명창이 되면서 선생에게 은주라는 이름을 받았다. 은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는 목소리 같다고. 유튜브에서 어렵지 않게 ‘한오백년’이나 ‘아리랑’ 같은 이은주의 민요 클립을 들어볼 수 있다. 옛사람들이 말하던 은쟁반에 옥구슬이… 이런 거구나! 이윤란에게 무형문화재의 호칭를 달아준 경기민요는 우리가 아는 그 민요가 아니다. 12잡가라는 아주 길고 지루한 노래다. 그 노래를 예전에는 움사랑이라는 데서 공연했다. 겨울이면 빈 땅을 파서 땅속에 작은 방을 만들고, 병풍을 둘러치고 방석을 깔고, 거기 밤새 몇 사람만 앉아 술도 없이 소리 하나만 듣는다. 그런 이들을 귀명창이라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소리를 뭘 하나 잘한다고 하면 그걸 뺏으려고 상당히 애쓰는 사람이 있어야 해. 근데 그저 배우면 배우는가 보다, 선생님이 하면 하는가 보다. 그렇게 생각하지 파고들어서 ‘내가 선생님 소리를 뺏어서 해야 되겠다!’ 하는 사람이 별로 없더라구요. 한 3년 배우고 나면 학원이나 차릴 생각하지. 별루 노력을 안 해. 나는 노력을 엄청 했으니까 이렇게 나와서 하게 되는 거야. 노력 안 했으면 이렇게 되지두 않았어. 그랬으면 지지한 데나 다니면서 소리하고 말았을 거예요.”
박창규_제9호 은산별신제, 깨깟이 맘먹고 정성껏 모시유
별신제는 마을 제사다. 이름은 제각각 다르지만 양주의 소놀이굿도, 강릉의 농악도, 수영의 야류도, 강령의 탈춤도 모두 마을 잘되게 하라는 뜻으로 하는 굿이고 놀이고 축제라는 것을 전에 몰랐다. 은산별신제는 충청도 부여군 은산에서 내려오는 마을 제사다. 전설에 따르면 백제 부흥 운동을 하던 장군들의 영혼이 마을을 지킨다고 한다. 물론 역사적으로 따지자면 믿거나 말거나다. 하지만 별신제의 날이 잡히면 이들은 몸을 정갈히 하고 멀고 가까운 마을로 꽃을 바치러 행렬을 꾸리고, 장승 세울 나무를 구하러 길을 떠난다. 은산별신제의 화주를 맡는 박창규는, 내내 집 안에 있는 것이 그의 일이다. 하지만 그는 그럼으로써 마을을 지킨다고 믿는다. 예전에는 마을 사람들이 다 같이 하던 일인데 이제 어느 문화재 한 사람의 이름에 마을을 지키고 기원하는 일이 걸린 시대가 되었다. 그 마을이 어디인지 모르겠지만.
“화주라고 하면은 첫째 몸이 단정해야 하고 깨깟이(깨끗이) 맘을 먹고 몸 관리를 잘해야 하는데. 이 화주가 돼가지고서 몸 관리를 잘 못하고 거치럽게 놀면은 딴 사람들이 욕할 거 아닙니까. 저는 항상 우리 신령님을 믿고 별신제 장군님들을 정성껏 모시기 때문에 그분들이 우리를 도와주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내가 믿는 디에서 도와주는 것이지, 더 정성껏 믿는 디에서 도와줄 거 아닙니까?”
김병옥_제70호 양주소놀이굿, 나하고 소놀이 구경 가세
소놀이굿은 짚으로 소를 만들어서 마부가 사고파는 흥정을 하는 연극 놀이인데, 재밌게 잘 놀면 자손이 번창하고 부자가 된단다. 일석이조. 김병옥이 소놀이굿에서 주로 맡은 것은 소도 아니고 마부도 소장수도 무당도 아니고 악사다. 그는 소놀이굿으로 문화재까지 올랐지만, 그냥 피리 부는 사내다. 피리를 너무나 잘 불어서, 양주 일대에 굿판이 있다 하면 모조리 불려 다녔다. 그렇게 다니다 소놀이굿 명인들에게 띈 셈이다. 김병옥은 자신이 잘해서 된 것은 없다고 말하지만, 또 한편 자기보다 피리를 잘 부는 사람은 없다고 자신했다. 그럴 것이다. 그만큼 모든 자리에서, 누군가의 행복을 위해서, 쉬지 않고 피리를 분 사내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소놀이굿에 댕기지 안 했으면 어떻게 됐을까? ‘내가 괜히 들어갔나 봐’ 이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어. 내가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해놓은 건 없지만, 이 소놀이에 다니는 게 보람이야. 양주소놀이굿에 안 들어갔다면 사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지. 그야말로 농사꾼에 지나지 못하는 건데. 소놀이굿 보유자였던 고희정 선생님하고 김인기 선생님이나 나나 비슷했어요. 정신이 좋아. 정신이 좋다는 건 뭘 보든지, 듣든지 그걸 잊어버리지 않는 거, 그게 정신이거든.”
김금화_제82-2호 서해안배연신굿 및 대동굿, 에라 만세 놀구나요
김금화 만신은 스무 명의 문화재 중에 가장 대중적으로 이름난 인물일 것이다. 그의 구술 또한 무당의 사설답게 끊임없고 총명했다. 아흔이 다 된 나이에도, 편집하는 동안에 직접 원고를 검수해주기도 했다. 아들 못 낳은 집의 딸로 넘새라는 이름을 받았던 어린 날부터 신을 받고 처음 굿을 할 때, 그리고 서해안 어촌 마을에서 배연신굿과 대동굿이 어떤 의미인지, 그의 사설은 머리를 사로잡는다. 저승에 다녀온 바리의 이야기처럼, 만신 김금화도 까무러쳤다 깨어나는 삶을 살았고, 그 모든 장면이 풀어진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굿의 용어와 거리의 뜻을 김금화는 일일이 설명한다. 그 분량이 너무 길고, 예민한 내용이 많아 축약된 것이 못내 아쉬운데, 언젠가 이 책이 다시 출판의 모습으로 세상에 모습을 보인다면, 꼭 다시 편집하고 싶은 본이다.
“지금 이런 생각을 할 수 있고 이런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건, 모두 남들에게 손가락질을 받더라도 무당으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에요. 남들이 흉을 봐도 공연에 나가서 열심히 춤추면서 뛰고. 다른 무당들은 돈 벌어서 먹는다고 허우적거리고 몰래 숨어서 굿할 때, 금반지 팔아서 민속경연대회에 나가고. 저기 유럽에 가서 우리 굿을 알리고, 불쌍한 안드레아를 도와서 조금이지만 돈도 벌어주게 도와주고. 이 김금화가 열심히 해서 두각을 나타내고, 무형문화재로 인정을 받아서 우리 무속을 반석에 올려놓은 것. 그것은 정말 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에디터
- 조소현
- 글쓴이
- 윤혜정 (국제갤러리 에디토리얼 디렉터, 칼럼니스트), 심세중 (수류산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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