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아의 빛나는 순간
물고기 비늘에 바다가 스미듯, 우리의 몸과 얼굴에는 살아온 시간이 새겨진다. 지금의 이지아는 유형의 것보다 무형의 지성, 미식, 새로운 경험을 탐닉해 빚어졌다. 초여름 햇살처럼 반짝이던 사람.
이지아는 블로퍼를 벗어 맨발을 보여주었다. 베이스 기타를 치다가 놓쳐 엄지발가락이 으스러졌고, 지금도 움직이지 않는다고 했다. 나머지 네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면서 “엄지는 가만있고 나머지 발가락을 움직이기가 쉽지 않은데, 전 할 수 있어요. 굉장한 기술이라고요!”라고 자랑했다. ‘기술’은 여러 차례 시연됐다. 다들 이지아는 직접 만나면, 의외로 엉뚱하고 재미있고, 털털하다고 했다.
우리가 이지아에게 갖는 이미지는 이 화보 촬영을 진행한 도자기 공방 같다. 깨트릴까 봐 조심조심 걷게 되는. 실제의 그녀는 도자기보다 도자기를 돌리는 물레처럼 능동적이다. 이지아의 고민 중 하나가 아닐까. 그녀가 좋아하는 현대미술 작가 우르스 피셔의 작품이 있다. 할리우드 배우의 초상에 담배, 바나나, 사과 등을 그려 넣은 작품이다. 한 작품은 엘리자베스 테일러 같지만 얼굴에 커다란 나사가 있어 분명하지 않다. “엉뚱한 물건으로 얼굴을 가려놓았죠. 작가의 의도는 모르겠지만 저는 ‘소통의 장벽’이 떠올랐어요. 그림 속 인물은 나를 보지만 나는 그를 온전히 볼 수 없죠.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우린 엉뚱한 물건을 보고 상대를 안다고 착각하고 마음대로 평가하진 않을까. 저뿐 아니라 많은 분이 공감하실 거 같아요.”
이지아의 얼굴을 가린 엉뚱한 물건은 무엇일까. “차갑고, 치밀하고, 계획적일 거라고 생각하세요. 사실은 엉뚱하고 ‘허당’인데 말이죠.” 그녀는 우르스 피셔의 작품 이야기를 계속했다. “굉장히 좋아해요. 그분 작품 중에 완전히 폐허인 바닥에 멀끔한 구조물을 세운 시리즈가 있어요. 작품명은 ‘You’예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내면의 폐허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거 같아요. 미술 작품을 보면 순간 경이로울 때가 있어요. 그게 몹시 즐거워서 작품을 찾아보고, 외국에 가면 뮤지엄에 꼭 들르려고 해요. 얼마 전에 한국에서 열린 올라퍼 엘리아슨 전시가 무척 좋았어요.”
그녀는 이야기를 나누다가 와인을 부탁했다. “이렇게 화창한 날에는 햇빛을 받으며 화이트 와인을 마시고 싶어요.” 아마 그녀의 집이었다면 와인에 어울리는 안주를 직접 만들어줬을지 모른다. 이지아는 요리 수업을 받을 만큼 음식을 먹기도, 만들기도 좋아한다. “크림 파스타가 묽어서 밀가루를 넣곤 했어요. 요리 선생님도 그렇게 하시더라고요. 제가 요리에 약간 감각이 있는 거 같아요. 집착이 낳은 감각이랄까요. 저는 음식을 양손에 쥐고 먹을 정도로 좋아하거든요. 아, 저 양손잡이예요. 운전도 양발로 하고요.(웃음)”
그녀는 무엇이든 “연구하는 스타일”이라고 했다. 요리도 먹지만 않고 배워야 하고, 책도 이해 갈 때까지 몇 번이고 정독하고, 외우고 싶은 내용은 메모한다. 요즘 좋아하는 책은 채사장의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이고, 이제 읽기 시작한 책은 유발 하라리의 <호모 데우스>와 <사피엔스>다. “몇 년 전에는 역사 공부를 했어요. 세계사는 종교와, 미술사는 신화와 연결되어 있어서 다 공부할 수밖에 없더라고요.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 지금 기억이 잘 안 나요.(웃음) 필라테스를 꾸준히 하다가도 잠시라도 멈추면 몸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처럼, 책도 공부도 멈추면 이전으로 되돌아가는 것 같아요. 그래서 더 열심히 하나 봐요. 자신에게 좀 혹독한 스타일이에요.”
이지아는 <나의 아저씨>의 강윤희와 닮았다. 아이를 낳고 변호사가 될 만큼 지독하게 공부하고, 삼칠일이 되기 전에 시댁에 김장을 하러 갈 만큼 남편의 가족에게 헌신한다. 주체적으로 커리어를 쌓으면서도 가정에 최선을 다하는 여성이, 아내보다 형제가 우선인, 정확히 말하면 성인으로서 완전한 독립을 이루지 못한 남편을 얼마나 견딜 수 있었을까. 불륜은 비난받아야 하지만, 그녀의 선택은 어느 정도 수긍이 간다. 강윤희는 후에 잘못을 인정하고, 망가진 관계를 수습하고 남편을 제자리로 돌려놓기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인다. 불륜 때문에 ‘국민 나쁜 년’이 될 수 있는 강윤희는 이지아가 이성적이고 독립적인 여성으로 연기해냈고, 그녀를 비롯한 배우들의 열연으로 드라마 초반의 여성 폄하 논란도 어느 정도 잦아들었다. “저는 논란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제가 초록색이라고 얘기하면 듣는 이는 저마다 다른 초록색을 떠올리죠. 논란이 아니라 다름이에요. 처음에 우려한 부분도 있었죠. 감독님께선 회가 거듭될수록 입체적 캐릭터가 될 테니 믿어달라셨고,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저는 윤희가 참 쓸쓸하고 외롭게 느껴져요. 그렇기에 옳지 못한 선택이지만 바람을 피운 거겠죠. 윤희의 상황과 아픔이 전해지도록 표현하려고 노력했어요. 그걸 알아주는 분이 있다면 다행이에요.”
이지아는 2007년 <태왕사신기>로 데뷔한 이후 2부작 드라마 <설련화>를 제외하면 드라마는 7편, 영화는 2편을 했다. 다작을 원하지만 그렇지 못한 이유는 인연 때문이다. “좋은 작품, 하고 싶은 작품은 많지만, 인연이 닿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나의 아저씨>도 본래 얘기하던 작품이 아니에요. 하지만 자연스레 연이 닿았죠.” 언젠가는 그녀가 좋아하는 다르덴 형제 감독의 <자전거 탄 소년>이나 자크 오디아르 감독의 <러스트 앤 본> 같은 영화를 만나게 되길. 아니면 <어벤져스> 같은 히어로물에 등장할지 모른다. “미국에서 <어벤져스> 시리즈를 보고 운 적 있는걸요. 히어로가 죽는 장면이 너무 슬펐어요. 굉장히 몰입하고 보는 스타일이라 그랬나 봐요. 저는 물을 먹으러 가다가도 책을 보면 그 자리에 멈춰서 읽어요. 목마른 건 까맣게 잊어버리죠.”
그녀는 무엇을 하든 열정적이다. 본인은 “제대로 하는 것 없이 얕고 넓은 취미”라고 했지만, 스키를 슬로프가 아닌 “나무 사이로 내려오는” 것을 즐길 만큼, 스키를 비롯해 스노보드, 승마, 스쿠버다이빙 등이 수준급이다. “제가 스피드를 좋아해요. 그래서 드라이브도 즐기죠. 이선균 선배가 저 운전하는 거 보더니 의외라고 깜짝 놀랐어요. 바람이 많이 부는 날에는 영종대교로 드라이브를 가요. 차가 살짝살짝 흔들리는 스릴이 좋거든요.” 무엇이든 배우고, 습득하는 그녀지만, 즐기지 않는 한 가지는 쇼핑. 해외에 가면 쇼핑몰보다는 뮤지엄이나 서점, 공연장에 간다. 그녀의 욕망은 유형보다는 무형에 집중된다. 예를 들어 패션 아이템을 사기보다는, 패션 신에서 벌어지는 흥미로운 일에 관심이 있다. 생로랑의 상징이던 에디 슬리먼이 휴식 끝에 셀린에 입성한다는 뉴스가 지금 그녀의 최대 관심사. “피비 파일로의 셀린도 좋았지만 에디의 셀린은 어떨까요? 에디의 아이덴티티가 어떻게 빛날까요? 또 셀린은 그에게 어느 정도의 영역을 허락할까요? 이런저런 상상을 하면서 기대하고 있어요.”
<아픔이 길이 되려면>의 저자 김승섭의 표현대로 “물고기 비늘에 바다가 스미는 것처럼” 우리의 모습엔 살아온 시간의 역사가 새겨진다. 다친 발가락은 그녀가 홍대 클럽에서 머리를 질끈 묶고 베이스 기타를 치던 시간을 이야기한다. 그녀의 겸손하지만 지적인 대화는 호기심과 집중력으로 어떤 공부를 해왔는지 보여준다. <보그>와 마주한 테이블에서 햇살을 머금고 반짝반짝 빛날 수 있게 자신을 빚어왔다.
- 에디터
- 김나랑
- 포토그래퍼
- 목정욱
- 패션 에디터
- 김미진
- 헤어
- 이순철(순수 설레임점)
- 메이크업
- 서옥 (위위)
- 장소
- 온도(On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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