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시착 바이브
평범함과 비범함 모두 가치 있게 수렴하는 배우 정경호, 박성웅, 고아성. 수사물 〈라이프 온 마스〉에서 맞닥뜨린 이들의 인간미 넘치는 팀워크가 심상치 않다.
존재감으로 뭉친 사나이, 박성웅
촬영장에 아들과 함께 왔다. 종종 함께 다니나?
촬영이 많으면 얼굴을 못 보니 쉬는날이나 부담 없는 촬영에는 데리고 다닌다. 막 시끄러운 놈이 아니라 데리고 다닐만하다.
OCN <라이프 온 마스> 촬영 대부분이 부산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부산에서 촬영하는 기쁨에 대해 말해달라.
드라마 역할 때문에 10kg 넘게 증량하느라 부산에 있는 맛집을 죄다 돌아다니고 있다. 맛집 앱을 다운받아 별점 매기며 도장 깨기! 22년 가까이 연기하는 동안 살 빼는 건 많이 했는데 찌우는 건 처음이다. 넋 놓고 먹으면 되게 좋을 줄 알았는데 약간 우울증이 온다. ‘내가 이걸 왜 먹고 있지?‘ 하는 순간이 있다. 그만 먹고 싶은데 하루 저녁만 방심하면 1kg이 빠진다. 그러면 감독이 ‘선배님, 살 빠졌잖아’ 하며 뭐라 하고. 사실 내가 찌우겠다고 했다. 1988년도 형사 계장이라면, 게다가 방콕 아시안게임 은메달리스트 특채라면 분명 몸이 불어있을 거다. 운동하던 사람이 그만두면 살이 찌거든. 입사는 늦었고 후배들은 추월해 승진하고, 그런 사람이라면 매일 퇴근하고 소주 마시겠지 싶었고. 그리고 상대역인 정경호 배우가 무척 말랐다. 상반되게 하면 재미있겠다 싶어 시작했는데, 아저씨처럼 보여야 하는데 주변에서는 자꾸 아줌마 같다고 한다. 그리고 이상하게 말이 많아졌다.
하하. 몸무게가 늘었는데 말이 왜 많아졌나?
그러게 잘 모르겠다. 우직하지만 말이없는 캐릭터는 아니니까. 지금 우리 촬영 현장 분위기가 너무 좋다. 자기 것만 주장 하는 게 아니라 상대방을 먼저 배려하고 생각해주는 사람들이 모였다. 경호랑 이정효 감독은 <무정도시> 이후 두 번째 호흡이다. 아성이랑 나는 세 번째 작품이고, 오대환과도 네 작품 넘게 같이했다. 참, 우리 카메라 감독님이 61세다. 시청률 잘 나와서 외국 가서 환갑잔치 하자고 그런다. 정경호는 첫날 딱 90도로 인사하더니 내 가슴에 ‘훅’ 들어왔다. 지금은 정경호 같은 동생 한 명만 더 현장에 있으면 연기만 하다가 퇴근해도 되겠다 싶을 정도다. 데이트도 자주 한다. 부산 내려갈 때 시간 맞으면 맥주랑 저녁거리 같이 사서 기차에 오른다. 우리끼린 ‘SRT 데이트’라고 부른다. 자리에서 조용히 주거니 받거니 하며 부산까지 간다.
유머 코드도 잘 맞나?
경호가 리액션이 좋다. 사실 나는 가만히 있어도 사람들이 항상 무섭다고 하니까 먼저 웃거나 썰렁한 아재 농담을 많이 하는데, 요즘 경호가 리액션을 해주니까 할 맛이 난다. ‘공이 진짜 많은 나라는?’ ‘남아공’ 이런 농담을하면 막 웃으며 “얼마나 많으면 공이 남아요!” 이렇게 받아준다.
그런 아재 개그는 출처가 도대체 어딘가?
아들이 다 알려준다. ‘산타할아버지가 제일 싫어하는 음식은?’ ‘울면’ 이런 식이다.
감각하는 여자, 고아성
<라이프 온 마스>를 선택한 이유가 궁금하다.
먼저 캐스팅된 배우들이 너무 좋았다. 그리고 배경이 1980년대이지 않나. 평소 해보고 싶었던 말투가 있었다. 1980년대 서울말이다. 그 말투를 써볼 수 있겠다 싶어 선택했다. 물론 나는 그 세대도 아니고 그때 산 적도 없다. 하지만 어릴 때를 생각해보면 1990년대 초반까지 그 말투가 이어지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1980년대 마니아다. 노래나 패션, 문화를 너무 좋아해서 오타쿠가 코스프레하는 느낌으로 재미있게 촬영하고 있다. 그리고 어른들, 특히 이모한테 많이 들었는데, 1980년대는 되게 모순이 심했다더라. 궁핍함과 풍족함이 공존하는 시대였고, 문화도 폭발적으로 팽창한, 극과 극을 달리는 시대였다고 들었다. 그 시대를 살아본 적 없는 나로서는 닿을 수 없는 그 시대가 늘 궁금했다.
1980년대 서울말은 도대체 어떤 말투인가?
첫 대사가 ‘반장님 커피 한 잔 드릴까요?’다. 그걸 딱 읽는 순간 바로 알겠더라. 약간 악센트라면 악센트인 것 같다. 마냥 꿈꿔온 걸 구현하는 입장에서 무척 행복했다.
드라마 촬영하면서 더 깊게 좋아하게 된 1980년대 무드가 있다면?
세트 퀄리티가 정말 높다. 나는 미술적인 부분에 관심이 많다. 이번 작품은 세트장에 들어서면 타임머신 타고 와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리고 조명이 진짜 예술이다. 1980년대 무드를 표현해주는 조명에서 의외의 감동을 받았다. 환풍기가 천장에서 돌아가는데 가로등 빛이 떨어지면 돌아가는 환풍기로 빛이 깜빡거리고… 이런 게 너무 멋있다. 정말 이번 작품은 ‘덕업 일치’다. 개인적으로 너무 행복하다.
덕후 기질은 어느 정도까지 발현되나?
뭔가 하나를 열성적으로 좋아하긴 하지만, 오래가진 않는다. 끈기가 없어서 덕후는 못 된다. 좋아하는 것은 항상 테마처럼 내 안에 자리하는 것 같다. 영화 <무뢰한>을 보면 새벽의 파란 공기와 아스팔트가 많이 나온다, 건조한 질감으로. 그런 걸 진짜 좋아했는데 표현이 잘된 영화를 보니 정말 행복했다.
어떤 사진가를 좋아하는지 궁금하다.
가장 좋아하는 작가는 예나 지금이나 조엘 마이어로위츠다. 요즘에는 건축 사진에 관심이 많아졌다. 건물 사진도 아주 광범위한 분야구나 싶더라.
최근 좋아하게 된 영화가 있다면.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을 재미있게 봤다. 두 달 동안 거기에만 빠져 있었다. 엘리오의 불안한 첫사랑의 감정, 호기심에 푹 빠질 수 없었던 올리버의 입장이 평소에도 계속 떠오른다. 매일매일 새로운 점이 보여서 재미있다. 생각해보면 좋아했던 영화들 사이에 공통점은 없다.
<라이프 온 마스> 원작 봤나?
안 봤다. <설국열차>도 <우아한 거짓말>도 안 봤다. 일부러 안 보는 것 같기도 하다. 리메이크라고 해도 창작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 부분에서 예민해질까 봐 일부러 안 본다. 대신 원작을 본 사람들에게 재미있었던 점을 물어보곤 한다.
이번에 맡은 ‘윤나영’ 캐릭터를 비롯해 <오피스> <자체발광 오피스> <풍문으로 들었소>까지 사회적 약자라고 부를 수 있는 청춘을 대변하는 역할을 주로 맡았다. 완성되지 않은 존재에 연민을 느끼는 건 아닌가 싶다.
복잡한 캐릭터일수록 연기하기에 재미있다. 연구할 만한 구석도 많고. 예를 들어 딱 한 단어로 치환되는 연기가 있지 않나. 분노, 빙의 같은 건 연기하는 입장에서도 보는 사람도 단순하고 밋밋하다. 시놉시스 읽었을 때 열정은 있는데 수사에 끼워주지 않아 나름 혼자 조사하는 윤나영이라는 캐릭터가 너무 귀여웠다. 처음부터 매력 있다고 생각했다. 답답했던 시대의 인물이지만 귀엽게 표현할 수 있겠다 싶어서. 감독님과 첫 미팅 때 이 캐릭터가 여자 경찰의 미래라는 말씀을 해주셨는데, 그 말도 와닿았다.
캐릭터를 맞이하는 고아성만의 의식은 무엇인가?
자기 캐릭터에 대해 무조건 호감이어야 한다. 나영에 대한 첫인상이 너무 귀엽고 마음이 아파서 쉽게 끌렸다. 연기할 때 나는 ‘길을 찾는다’고 하는데, 그 길을 찾는 방법이 어렵지 않았다. 당시에 읽던 책이나 주변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을 때도 있다. 예를 들어 같이 ‘팀플’했던 한 여학생한테 깊이 감명받은 적이 있는데, 그 사람을 통해서 <자체발광 오피스> 캐릭터를 완성했다.
일상의 달인, 정경호
박성웅은 배역을 위해 몸무게를 10kg가량 늘렸다. 의문의 사고로 1988년에 깨어난 형사 한태주 역할을 위해 비주얼적으로 한 고민이 있다면?
이정효 감독님이 나를 선택한 이유가 잘 어울려서다. 한태주라는 캐릭터가 나약하면서 뚝심은 있고, 혼란을 느끼는 상태이기 때문에 좀 예민하다. 외적인 부분이 잘 맞아서 감독님이 ‘딱 너다’라고 말했던 것 같다. 이정효 감독님과 <무정도시> 이후에도 계속 친하게 지내서 대본도 안 읽고 한다고 했다. 여태까지 많은 작품을 하진 않았지만 똑같은 감독님과 하는 건 처음이다. 나도 성격이 남성스럽진 않은데 감독님도 그렇다. 서로 헐뜯고 단점만 얘기하는 스타일도 잘 맞는다. 현장에서는 지금 둘 다 서로 자기 스타일 아니라고 하고 있다.(웃음)
반면 박성웅은 사나이 스타일이다.
지내보니 그냥 동네 아저씨 같다. 앞집에 사는 기 센 아저씨들 있지 않나? 분리수거 확실히 하고 집 앞 골목에 눈 안 쌓이게 하는 스타일. 정말 너무 좋다.
고아성과의 연기 호흡은 어떤가?
선배님이셔서 제가 감히….(웃음) 개인적으로 너무 팬이다. 똑같은 대사라도 상대방을 되게 기분 좋게 하는 연기를 한다. ‘아이셔’ 같은 상큼한 면이 있다. 같이 있으면 기분이 좋다.
드라마 배경이 1988년이다. 당시의 패션, 문화, 감성이 어떻게 표현되었을지 기대된다.
한번은 기자와 형사가 120여 명 출동하는 장면을 찍었는데, 나중에 보니 나를 비롯해 100여 명이 모두 바바리코트를 입고 있더라. 당시엔 기자나 형사들이다 그 옷을 입었던 모양이다. 그게 좀 신기하고 웃겼다.
혹시 원작 봤나? 리메이크 작품에 들어갈 때 배우들 대부분이 원작을 잘 안 보려고 하더라.
영향을 받으면 좋지 뭘, 우리가 그 사람도 아닌데. 나는 책도 다 보고 비슷한 영화도 다 찾아 본다. 그리고 딱 하나, ‘저렇게만 하지 말아야겠다’라는 생각을 한다. 그걸 위해서 본다. <라이프 온 마스> 역시 다 챙겨 봤다.
처음 캐릭터를 만나면 어떤 작업을 하나?
인생 스토리를 짠다거나 자료 조사를 한다거나… 아직은 훌륭한 선배님들처럼 몰입하는 연기는 잘 모르겠다. 지금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건 내 나잇대에 맞게 솔직한 정경호스러운 연기다. 아직 부족해서 좀 더 솔직하게 접근하려고 한다. 어떤 역할이든 ‘나였으면 어땠을까’ 생각하고, 가장 잘하는 게 뭔지, 제일 자연스러운 표현이 뭔지 생각한다.
생활 연기를 참 능글맞게 잘한다. 어디에서도 영향을 받지 않는 연기를 한다.
그동안 보지 못했던 걸 찾으려고 애쓰는 것 같긴 하다. 계속 뭔가를 새롭게 해보려고 한다. 그런데 유일하게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작품이 <무정도시>와 <라이프 온 마스>다. 사실 한태주는 스탠더드한 역할이라 배우로서 캐릭터를 만들어가는 재미가 크지는 않다.
<롤러코스터>를 기점으로 연기 스타일이 바뀐 것 같다. 그동안 출연한 작품 중 연기의 전환점이 된 작품은 무엇인가?
전환점이라기보다는 독이 한창 올라 있었다. <무정도시> <롤러코스터> 두 작품 모두 제대하자마자 연기에 악이 받쳤을 때 한 작품들이라 그렇지 않나 싶다. 그런데 <롤러코스터>의 역할은 나랑 너무 정반대 캐릭터라서…. 욕도 너무 많이 했고 또라이고.
연기할 것도 없네 그랬는데….
무슨 말인가! 예의도 없고 함부로 하는 캐릭터라서 힘들었다.
반면 꽃미남 시절은 지나갔고, 중견 연기파 배우도 아니다. 배우로서 자신의 포지셔닝에 대해 고민한 적 있나?
어떤 배우든 가장 크게 고민해야 할 부분인 것 같다. 잘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나같이 한없이 부족한 사람은 자기가 잘할 수 있는 게 뭔지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래서 지금 내 위치에 대해 고민하기보다 어떤 역할을 맡았을 때 정경호가 제일 잘할 수 있을지 생각한다. 항상 많은 사람에게 공감을 주고 같이 웃고 울고가 되면 다른 고민을 하겠지만, 일단 나를 잘 아는 연기를 하고싶은 생각이 있다. 내가 뭘 잘할 수 있는지를 알아가는 단계다.
매 작품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연기 철학이 있다고 했다. <라이프 온 마스>도 비슷한 맥락에서 선택했나?
나는 한번 연을 맺으면 친하게 지낸다. 이정효 감독이 <굿와이프>를 연출했는데 거기 전도연과 유지태가 나오지 않나. 도연이와 <무뢰한>을 같이했고, 지태와는 <꾼>을 같이했다. 다 친하니까 자기들 회식 자리에 날 불렀다. 그렇게 회식 자리에서만 두 번 만났고 이번에 일로 만났다. 이정효 감독한테 왜 이 역할을 내게 제안했느냐고 물으니 ‘선배님 요즘 실험 많이 하시잖아요’ 하면서 나를 꿰뚫고 있더라.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된다고도 했다. 촬영한 지 거의 한 달 반 정도 지났는데 ‘이렇게까지 웃겨도 돼?’ 할 정도로 잘 찍고 있다.
뻔뻔하고 무식하고 욕지거리가 일상인 형사 강동철을 연기하는 재미는 어떤가?
내안에 있을지언정 평상시 모습은 아니지 않나. 그래서 스트레스가 날아가는 느낌이다. 그리고 강동철 캐릭터가 표현을 안 해서 그렇지 속은 따뜻하다. 실제로 경호랑 나도 그러고 있고. 현장이 물 흐르듯 잘 흘러가고 있으니 실험적이지만 기념비적 작품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 연기 경력 22년째인데 요즘 들어 대장 역할이 들어온다. 실제로 현장에서도 그렇게 해야 할 나이가 됐고. 촬영 들어가기 전에 부산 가서 파이팅하며 회식했는데, 그 자리에서도 내가 현장을 잘 이끌어줘야 잘 돌아갈것 같다는 얘기가 나왔다. 연기하기도 바쁘다고 말은 했지만 현장 가면 또 ‘으쌰으쌰’한다. 그런데 그게 힘들지 않다. 2시간 자고 나와도 카메라 돌면 연기하는 맛이난다. 게다가 <라이프 온 마스> 현장 공기는 되게 따뜻하거든.
대중에게 처음 각인된 역할 때문에 악역 이미지가 강했지만 꾸준히 다양한 역할을 맡고 있다.
<신세계> 이후 1년 동안 건달 역할만 들어왔다. 그리고 작년 한 해는 모험의 연속이었다. 영화 <메소드>는 전광석화 같은 속도로 결정하고 찍은 영화다. 배우로서 정말 각성하는 느낌이었다. 내가 좀 약자들에게 약하다. 저예산 영화였고 3주 만에 촬영을 끝내야 했다. 방은진 감독이 한없이 약한 척해서 상대 배우 오승훈도 추천하고 많이 끌고 갔는데, 사실 방은진 감독이 다 할 줄 알면서도 안 한거였다.(웃음) 영화가 끝내주진 않은데 캐릭터가 끝내준다거나, 내가 보여줄 건 없는데 영화가 끝내준다 싶으면 또 들어간다.
특별 출연도 많다. 사람들 사이의 의리로 이어지는 작품 활동도 보이고.
<으라차차 와이키키>는 반강제로 했고, 얼마 전에는 <공작> 특별 출연 때문에 대만까지 3박 4일 일정으로 다녀왔다.(웃음) 의리를 지켜야 하는 사람을 캐치하고 솎아내는 걸 5년째 하고 있는데 잘하고 있는 것 같다. 의리를 지키면 내 기분이 좋아진다. 사실 나에게는 끌어주는 선배가 없었다. 왜냐하면 첫인상이… 무명 때 사실 어떻게 웃나. 무표정으로 있으면 주변에 사람이 없는 거다. 그때 잘되면 후배들에게도 잘하리라 생각했다. 이번에도 영화 <롤러코스터>에서 눈여겨본 배우를 <라이프 온 마스>에 추천했는데 경호도 똑같이 생각했던 거다! 술자리에서 이정효 감독에게 밀어붙여 결국 캐스팅이 됐다. 한번은 모 대표님 추천으로 중소기업 가구 광고까지 찍었다. 거기서 내가 아이디어 내서 연출까지 해버렸다.(웃음)
2017년에 출연한 작품만 7개다. 충무로에서 소로 불리는 배우가 여럿인데 박성웅에 비하면 모두 송아지다. 에너지가 달리진 않나?
보통 동시에 3개씩 했다. 가장 바빴을 때는 <꾼>을 찍으면서 드라마 <맨투맨>을 하고 <보디가드>라는 뮤지컬까지 했다. 캐릭터가 극명하게 달라서 연기에는 도움이 됐다. 2000년대 대학로 뒷골목에서 공연하고 15년 만에 뮤지컬 무대에 오르니 오히려 에너지를 받았다. 지금 <라이프 온 마스>에 올인하고 있는데 비교 대상이 없으니 초반에 오히려 힘들었다.
연극 무대의 단역부터 시작해 성실히 쌓아온 경력 덕분에 가능한가 보다.
단역들은 주인공보다 일찍 죽는다. 항상 바닥에 깔려 있어야 하고. 그러면 주인공이 또 대사하고. 바닥에 깔려서 ‘내가 더 잘할 수 있는데’ 생각했었다. 주인공 대사 외워 집에가서 연습하던 시절도 있는데 지금은 판이 깔려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가.
<넘버 3>의 ‘건달 3’으로 시작했다. 어떤 역할이었는지 기억나나?
대사까지 있었다. 아직도 대사를 외운다. ‘난 말이야 체질적으로 쪽바리 새끼들이 싫어, 이런 시발놈들이 남의 땅을 지네 땅이라고 우긴단 말이야.’ 그 영화가 정말 말도 안 되게 3억인가 4억으로 찍은 영화라 리허설 한 번 하고 테이크 가면 무조건 오케이였다. 일당 3만5천원짜리 엑스트라였다. 7년 동안 건달 3, 상점 주인 같은 역할만 하다가 <케이티>라는 일본 영화에서 처음으로 이름이 생겼다. 일본 배우 반, 한국 배우 반 나오는 영화였는데 감독님이 내 비주얼을 좋아했던 거다. 일본 에이전시 쪽에서 제안이 왔는데 그 당시 한국 에이전시에서 반대하는 일도 있었다.
20년 넘게 연기하면서 작품을 대하는 태도도 많이 변했을 것 같다. 작품 들어갈 때마다 어떤 생각을 하는지 궁금하다.
작년에 <메소드> 하면서 준비를 너무 많이 해도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것도 저것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과 몸 상태를 유지하라고 했던 선배들 말이 맞다. 지금은 욕심을 좀 버리고 들어가려고 한다. 민식 형님이 <신세계>에서 판을 깔아줘서 정민 형과 내가 툭탁거릴 수 있었던 거 아닌가. 들어갈 때와 나올 때를 아는 배우가 되어야겠구나 생각한다. 최선을 다하되 무엇이든 빨아들이는 스펀지 같은 상태를 유지하고 싶다. 이젠 마음에 안 들면 다시 갈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으니까 ‘NG’라는 무기를 딱 장착하고 들어간다. 지금의 모든 순간에 다 감사한다.
오랜 경력은 매너리즘을 낳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아들을 생각한다. 저놈에게 들어가는 돈이 많으니 도태되면 안 된다 하고.(웃음) 그리고 늘 상상 속 라이벌을 정해놓는다. 공부할 때도 내가 20등이면 15등을 라이벌로 삼았다. 근접한 라이벌을 상상하고 그 배우의 연기를 보며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연습해보기도 한다. 그리고 이순재 선생님을 떠올리면 아직 멀었다 싶어진다. 팔순 가까이 되셨는데 항상 대본을 놓지 않고 연구하신다. 이순재 선생님이 인정하시는 애가 (김)명민이다. ‘이순재 선배님께 칭찬받는 배우가 되자’도 목표다. 두 달 전부터는 보컬 트레이닝도 시작했다. 어차피 내 인생의 모티브는 도전이니까 도전한다.
출연작 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무엇인가?
아무래도 <신세계>를 빼놓을 수 없다. 배우 박성웅으로 들어간 작품이지만 지금 봐도 너무 재미있다. 30번 이상 본 것 같다. 갱스터 누아르의 교과서 같은 작품이고, 이제는 내가 출연했다는 생각도 들지 않을 정도다. <메소드> 때 배우 인생 두 번째 각성을 한 것 같다. 배우가 되어가는 느낌이었고, 인터뷰도 신들린 듯했던 것 같다. 그리고 지금 <라이프 온 마스>가 느낌이 이상하다. 끝날 때 주책맞게 우는 건 아닌지, 빨리 훌훌 털어버릴 수 있을지 걱정도 된다.
자신의 얼굴을 좋아하는 편인가?
연기 초반 때는 감독님, 특히 촬영감독님이 내 얼굴을 너무 싫어하셨다. 너같이 생긴 애들은 연기하면 안 된다고 했다. 22년 전에는 꽃미남 전성시대였거든. 지금은 이런 것도 할 수 있고 저런 것도 할 수 있어서 내 얼굴이 좋다. 연기 초년병 때 로버트 드니로처럼 선과 악이 공존하는 배우가 되고 싶었다. 내 얼굴도 그쪽에 최적화되어 있다. 가만히 있으면 무섭고 웃으면 ‘병맛’이 나오니까. 하하하.
박성웅과 영화 <오피스>, 예능 <나는 영화감독이다 2>에 이어 세 번째 호흡을 맞추고 있다. 둘 사이의 관계를 한마디로 설명해준다면?
글쎄, 잘 모르겠다. 이런 건 있다. 어제 성웅 오빠가 경찰서에서 범인들에게 짜증을 내는 장면을 찍었는데, 오빠가 되게 달라졌구나 생각했다. 오빠랑 안 지 4년 정도 됐는데 그동안 봐온 모습과 달랐다. 오빠가 나이 들어서 그렇다고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역할에 따라서 달라진 거다. 성웅 오빠를 오래 봤고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그 고정관념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오빠가 역할을 위해서 살도 많이 찌웠고, 신경질도 잘 내는 캐릭터라 그런지 평소 알던 모습보다 더 푸근하다. 히스테릭하지만 되게 귀엽다.
한 인터뷰에서 지나온 시간을 작품으로 나눈다는 얘기가 흥미로웠다. 최근 몇 년을 고아성의 방식대로 설명해준다면?
얼마 전에 <설국열차>를 같이 촬영했던 스태프를 만났는데, 그때보다 밝아진 것 같다고 하더라. <설국열차>의 전반적 분위기를 생각해보면 무척 다크하고 건조한 느낌인데, 어떻게 보면 나도 그런 작품의 분위기를 따라간 게 아닐까 싶다. <우아한 거짓말> 촬영을 생각해보면 햇빛이 전부였다고 기억된다. 낮에만 촬영을 해서 햇살이 주는 느낌이 강했다.
작년 <복면가왕>에 ‘야구소녀’로 출연했다. 이후 그보다 더 강력했던 일상의 이벤트도 있었나?
정말 강력한 ‘이벤트’ 같은 거였다. 얼마 전에 부산의 작은 마을에서 촬영하고 있는데 옥상에서 주민들이 나누는 말이 들렸다. “드라마 찍는대.” “누가 나온대?” “정경호랑 박성웅이랑 <복면가왕>에서 ‘외로운~’을 불렀던 애.” 나는 이벤트라고 생각했는데 나를 기억하는 사람에게도 작은 이벤트일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정말 상대적인 것 같다.
당시에 “걸 그룹 좋아하는 26세 여자아이”로 자기소개를 했다.
한창 여자친구의 ‘시간을 달려서’에 빠져 있었다. 이것도 어떻게 보면 컨셉에 열광하는 것 중 하나다. 우리 세대는 <카드캡터 체리>나 <세일러문>, 말하자면 청순 파워 같은 게 추억 속에 있다. ‘시간을 달려서’는 어렸을 때 본 만화 영화 느낌이었다.
<설국열차> 이후 해외로 진출할 줄 알았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심야식당 : 도쿄 스토리>를 제외하곤 오히려 국내 활동에 주력한다. 해외 활동 계획은 없나?
늘 열려 있다. <설국열차>를 찍기 전에는 인터내셔널한 프로젝트가 이렇게 재미있는 줄 몰랐다. 세계 각국에서 오는 스태프들에게는 원칙이 없다는 말이 정말 맞는 것 같다. ‘우리는 원래 이렇게 해’라는 식의 환경이 없는 게 너무 재미있다. 아, 물론 시리즈 중 한 에피소드에 출연한 <심야식당>은 좀 달랐다. 그런데 아무리 기회가 많더라도 본업은 항상 한국에서 하고 싶다.
고아성에게 연기란 천직이라기보다 하나의 감성 표현 수단같이 보이기도 한다. 어떤 마음가짐으로 연기하고 있나?
천직이라는 생각은 안 한다. 제일 잘하는 일이 맞나 하는 생각은 20년째 하고 있는데,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같은 영화를 만나면 제일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구나 싶다. 보는 것도, 연기하는 것도.
요즘도 매일 일기 쓰나? 어젯밤에는 어떤 내용을 썼는지 궁금하다.
비밀이다. 아무한테도 보여주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쓰고 있다. 얼마 전에 <고등래퍼>에 명상을 하는 출연자가 나왔는데 명상에 대한 믿음이 있더라. 분야는 다르지만 자기를 표현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은 솔직한 자기 모습과 만나는 훈련이 필요한 것 같다. 그 사람은 명상이고 나에게는 일기가 그런 것이다.
2018년을 살던 사람에게 1988년은 화성 같은 곳일 거다. 이 세상이 화성처럼 생경하게 느껴진 순간은 없었을까?
오랜만에 집에 올 때 그런 생각을 많이 한다. 예를 들어 외국에 오래 있다가 집에 오면 샤워기 그립감이 되려 생경하게 느껴진다. 이곳이 내가 익숙했던 곳이지, 하는 느낌이다.
그동안 조금이라도 자신에 대해 알게 된 게 있다면?
어느 순간부터 작품이 끝나면 그 역할이 나를 만족시켰다거나 시청자 혹은 관객에게 어떻게 느껴졌는지 따지기보다는 ‘또 좋은 사람 하나를 만들었구나’를 더 생각하게 된다. 어제도 느끼고 그저께도 느꼈지만 이 작품 끝나고 다른 현장에 가면 얼마나 서운할까를 생각했다. 내가 또 이런 현장에 자리할 수 있을까, 나한테는 이게 가장 큰 행복이구나 싶었다. 그러다 보면 좋은 역할이 만들어질 테고 시청자나 관객이 알아줄 거라 생각한다.
<라이프 온 마스>를 비롯해 <미씽나인> <슬기로운 감빵생활> 모두 몇몇 배우의 연기력에 치중하기보다 매력적인 여러 캐릭터가 함께 어우러지는 작품이다.
그게 마음이 편하다. 어떤 역할을 맡는지도 물론 중요하지만 누구랑 같이 일하는지가 무척 중요한 것 같다.
<슬기로운 감빵생활>은 정경호에게 어떤 의미를 가진 작품이었나?
영광이었다. 내 일생에 신원호 감독님과 한 번은 일할 수 있을까 생각했었다. 지금 활동하는 배우들이 그렇지 않다는 건 아니지만 정말 절실하게 연기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다. 그분들에게 기회를 주고 날개를 달아주는 점이 존경스럽다. 감독님의 그런 생각과 단호함을 존경한다. 그래서 내 역할의 크기는 조금도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한 인터뷰에서 판타지를 주는 배우가 아닌 게 장점이라고 말했다.
감사하게도 연기 시작한 지 16년 됐는데 뭐만 하면 ‘정경호의 재발견’이라는 기사가 뜬다.(웃음) 옆집 형이나 동생 혹은 오빠가 판타지는 아니니까 그렇게 말한 것 같다.
스스로 욕심을 가지고 있는데 들어오지 않는 역할이 있다면 뭔가?
아직은 없다. 그런데 평범한 역할은 하고 싶지 않다. 생각해보면 제대하고 했던 작품에 장르물이 많았다. <무정도시> <슬기로운 감빵생활> <미씽나인> 모두 장르물이었고, <순정에 반하다>는 로맨틱 코미디였고, <데자뷰>에서 살인마 역할도 했다. 장르물을 선호하는 것 같긴 하다.
<미씽나인> <슬기로운 감빵생활>을 보면서 정경호만의 리듬과 유머 코드가 있지 않나 생각했다. 자신의 머릿속 의식의 흐름을 박자로 비유한다면?
정박자는 아닌 것 같고 약간 야매스러움? 규칙적이지 않은 독특함을 많이 생각하는 것 같다. 누구나 봐온 것들을 선호하지 않는다. 뭘 할 때든.
정경호가 생각하기에 가장 웃기는 사람은 누구인가?
옆에 계속 붙어 있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오대환 배우다. 장담하는데 대환 형은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배우가 될 거다. 아, 정말 정상은 아니다.(웃음)
<라이프 온 마스> 설정처럼 갑자기 다른 시간대에 깨어난다면?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웃음) 지금이 제일 좋다.
요즘 드라마에서 범죄, 수사 등 특정 소재가 반복되는 것 같지 않나?
그렇게 치면 일일 드라마나 주말 드라마에서 일하고 사랑하고 싸우고 결혼하는 건 반복 아닌가. 다 똑같은 얘기지 안 똑같은 얘기가 어디 있나. 세상에 완전히 새로운 얘기는 없고, 누구와 하는가가 제일 중요하다.
매일 규칙적으로 하는 일이 있다면?
강아지 두 마리를 키우고 있다. 똥 싸면 치우고 밥 먹이고 놀아주고 나도 좀 쉬고 산책 나가고 하다 보면 하루가 금방 간다. 순간순간 ‘체력적으로 안 되는구나’라는 생각이 수시로 들어서 이번에 드라마 끝나면 운동을 열심히 하려고 한다.
- 에디터
- 조소현
- 포토그래퍼
- 안상미
- 패션 에디터
- 손은영
- 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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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이크업
- 이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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