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무게 줄이기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삶 속에서 크고 작은 변화 를 만들어내는 방법 세 가지.
Rethinking Home
2009년에 우리 가족은 메인주로 이사를 했다. 이런 결정을 내린 이유는 너무 바쁘게 돌아가지 않는 세계에서 자연과 더불어 조화롭게 살면서 미래의 자녀들을 키우는 혜택을 누리고 싶어서였다. 남편과 나는 나무 사이로 파도가 부서지며 은빛으로 반짝이는 모습을 볼 수 있는 1840년대에 지은 농가를 매입해 주변의 오래된 자원을 최대한 활용했다. 채소밭을 제대로 꾸몄고, 꿀벌로 가득한 벌통에 경탄했으며, 점점 쌓여가는 퇴비 더미를 보며 자랑스러워하기도 했다.
수고스럽지만 그만큼 매력적인 이런 삶의 방식에는 한 가지 작은 문제가 있었다. 메인주에서는 겨울이 최소 7개월간 지속된다는 점이었다. 나는 시카고에서 성장기를 보냈고 뉴욕에서 수년 동안 거주한 경험이 있어 혹독한 겨울이 어떤지 제대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 북위에 자리한 시골의 겨울은 전혀 달랐다.
강한 바람에 밀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커튼을 뚫고 들어와 우리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고 마룻바닥은 완전 얼음판 같았다. 이사 첫해에 나는 스웨터를 잔뜩 껴입었고 심지어 한두 번은 털모자를 쓰고 잤다. 어느 이웃의 딸은 자신이 어릴때 이야기를 들려줬다. 유난히 춥던 어느 겨울밤에 부모님의 오래된 농가에서 자고 일어나보니 테디 베어가 벽에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고 말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내가 겪는 이런 일이 메인주에서는 일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지금은 숲으로 둘러싸인 우리 집은 2000년대 초쯤에는 나무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 벌거숭이 언덕 꼭대기에 황량하게 서 있었다. 당시 사람들처럼 겨울철마다 숲속 땔감을 모조리 태우거나 야생동물의 수리권을 침해하는 수력 자원을 사용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화석연료를 꾸준히 쓰지 않고도 추위를 이겨내는 법을 굳이 찾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 방법을 찾을 때까지 우리는 아름다운 옛사랑을 떠오르게 하는 전통 가옥을 부수고 철저히 모던한 집을 짓기로 결정했다. 넷제로 하우스(Net-zero House)와 패시브 하우스(Passive House)를 짓기 위한 최신 기술을 찾아 읽었고, 태양 전지판과 열 취득에 대해 조사했다. 뭔가 특별하게 혁신적인 것처럼 들리지는 않는다 해도 어떤 점에서는 매우 혁신적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친구도 이곳에 사는데, 그녀는 매일 아침 날씨가 어떻든 상관없이 손수 지은 집 문밖으로 나와 펌프까지 걸어가 가족이 사용할 물을 몇 통 퍼 올린다. 그녀는 아주 오래된 동화 속 로맨틱한 여주인공처럼 보이는데, 이 같은 고루한 작업을 완벽히 해내곤 한다. 이 일대에서는 폭풍우로 나뭇가지가 전봇대 위로 떨어질 때마다 전기가 나가는데 그녀의 가족은 전기가 나가도 거의 알아차리지 못한다. “스토브 위에 달린 디지털 시계가 꺼져요. 그러면 우리는 냉장고를 계속 살펴봐야 하죠”라고 그녀는 말한다.
분명히 지속 가능하고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삶이지만, 나는 21세기를 완전히 등지고 살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다. 그녀의 집에 비해 우리 집은 첨단을 달린다. 독일식 3중 유리창이 있고 다락방 내부에 지하 묘지처럼 닫히는 현관문이 달려 있어서 마치 우주선 같다. 그래도 우리는 이 공간의 외적인 스타일을 결정할 때 규모나 심미적 지침을 얻기 위해 주변의 오래된 농가 현관을 살펴봤고 외부에 검정 나무타르를 착색해 우리 집 너머에 있는 숲과 조화를 이루도록 했다. 거대한 창문 밖으로는 눈보라가 휘몰아치는데 실내에서 정글처럼 무성하게 자란 열대식물 아래 아주 따뜻하게 있다 보면, 우리가 아주 초현실적인 거대한 스노볼 안에서 살고 있는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나는 늘 햇살 좋은 날을 사랑했지만, 지금은 어느 때보다 그런 날을 더 사랑한다. 우리가 고안한 생태 난방 시스템은 실제로 사용하는 것보다 더 많은 양의 전기를 생산하기 때문에 일부를 전기회사에 판매할 수도 있다(다음 목표는 전기차 테슬라를 구입해 집에서 충전하는 것이다). 조그마한 나무 심벌로 얼마나 많은 전력을 생산했는지 킬로와트(kW)로 말해주는 앱이 있다. 우리는 겨울마다 기분 좋게 앱을 열고 “우리는 어제 나무 세 그루의 전력을 얻었어!”라고 말한다. —제시카 커윈 젠킨스(, < Encyclopedia of the Exquisite> 저자)
Who Needs A Trash Bag?
뉴욕에 살면 누구나 자신이 수고하지 않은 것도 자기 것처럼 사용할 수 있다. 당신은 센트럴 파크에 튤립을 심는다거나 세계 전역에서 뉴욕으로 온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주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편하게 집에 앉아서 이 도시의 활력과 다양성을 소유할 수 있다.
당신이 지구를 구하기 위해 직접 그리 많은 일을 하지 않을지라도 여전히 뉴요커 한명은 젖먹이 한 명의 탄소 발자국을 거만하게 자기 권리인 양 요구할 수 있다. 거저얻는 지속 가능성. 그게 바로 엄격한 채식주의자인 덕분에 정결해지는 것과 같이 도시 생활이 주는 커다란 특혜 가운데 하나다. 이를테면 나는 자동차 유지비가 너무 비싸기 때문에 자동차를 소유하지 않는다. 내가 사는 건물에 중앙 냉방장치가 없어 에어컨 없이 산다. 어디든 걸어 다니는데, 그게 좋은 운동이 된다. 또 재활용을 한다. 그게 쉽기도 하고 내 건물 관리인이 상당히 무섭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구를 위해 일관성 있게 행동하는 흔치 않은 희생이 하나 있다. 뉴욕에 거의 20년 살면서 쓰레기봉투를 단 한 장도 사본 적 없다. 물론 멋대가리 없이 거대한 용역업체의 아파트 이사용 봉투를 한두 장 구입한 적은 있지만 그 외에는 전무하다. 이 도시에 새로 이사 온 젊은이들이 갖는 대부분의 습관처럼 이 또한 근검절약을 하기 위해 시작했다.
나는 그때 대학을 갓 졸업해 저작권 대리인의 어시스턴트로 일하며 연간 2만 3,000달러를 벌고 있었다. 외식으로 저녁을 먹을 여유도 없어 최대한 저렴한 식료품을 구해 근근이 먹고살았다. 그 때문에 부엌 싱크대 밑에는 슈퍼마켓 비닐봉지가 가득 쌓였는데, 나는 그것을 쓰레기봉투로 꾸준히 재활용했다. 상관없지 않나? 튼튼한 손잡이가 달린 약국 봉투나 ‘Thank you’라고 적힌 구두 수선 가방, 달걀 샌드위치를 넣기에 딱 맞는 반투명 식품 잡화점 봉투나 내용물이 보이지 않도록 한 검은색 주류 판매점 봉투는 말할 것도 없다. 다만 와인 봉투는 폭이 너무 좁아 재활용하기가 쉽지 않다.
식료품점을 둘러볼 여유가 생길 무렵, 비닐봉지 사용 습관은 필요를 넘어 하나의 개인적 도전 과제가 되었다. 나는 빈 비닐봉지를 절대 버리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엄청난 효율성을 발휘해 마지막 비닐봉지 하나까지 재활용했다. 내용물이 너무 커서 지퍼를 잠그기 힘든 베개처럼 될 때까지 나는 비닐봉지에 욕실 쓰레기와 부엌 쓰레기를 꽉꽉 눌러 담았다. 이런 나의 모습을 본 남자 친구들은 내가 레스토랑 카운터에서 설탕 통을 슬쩍한 것과 똑같다는 듯 나를 미심쩍게 보곤 했다. 어느날 한 친구가 상태가 좋은 테이크아웃 봉지를 버리길래 내가 나무랐더니 민망해했다. 그러나 개의치 않았다. 개인적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으니까. 여러 해가 지나고 미국의 환경 영향 주도성이 조금씩 증가하자, 내 행동은 뭔가 특별한 것, 그러니까 지속 가능성을 보여주는 위대한 행동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하는 행동이 ‘유행’이 됐다는 것이다.
물론 지속 가능한 생활 방식과 일관성 있는 생활 방식은 서로 다른 것이다. 어느 뉴요커는 비닐봉지를 모두 차곡차곡 모아두고 전기 플러그를 모두 뽑아놓으면서도, 담배꽁초를 던지거나 소다수병을 엉뚱한 쓰레기통에 넣기도 한다. 완벽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나는 냅킨 한 겹을 영국 런던의 샌드위치 전문점 프레 타 망제의 대류권 정도 두께로만 사용하기 위해 나의 키친타월 사용량을 아주 꼼꼼히 모니터링할 것이다. 또 내가 ‘지속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부정적 문맥에서 그 단어를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알아차렸다. 예컨대 “일주일에 80시간씩 일하는 것은 지속 불가능하다”라거나 “로스앤젤레스에서 누군가와 데이트를 하는것은 지속 불가능하다”라는 식이다.
이 모든 것은 지속 가능한 삶을 일상화하고 자연을 습관적으로 염두에 두며 살아가기 위해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아직도 멀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대기업 대신 의사 결정을 내릴 일이 없는 개개인은 각자의 방식대로 살아가고 있다. 개개인의 노력이 실제로 미치는 효과를 가늠하기는 어렵지만, 믿음은 분명 어떤 결과를 만들어낸다. 그래서 내가 비닐봉지에 그렇게 집착하는 것이다. 쓰레기봉투를 구매하지 않는 한, 나는 측정 가능한 방식으로 이 도시의 쓰레기 증가량를 줄여주고 있다. 달리 말하자면, 지난 18년 동안 의도적으로 일주일에 평균 두 장의 쓰레기봉투를 얻어서 버렸다면, 쓰레기봉투는 모두 합해 1,872개가 된다. 나 때문에 쓰레기 매립지에 버려지지 않은 비닐봉지가 1,872개나 된다는 것이다. 이 문장을 적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다. 물론 늘 더 좋은 방법도 있다. 비닐봉지를 종이로 바꿀 수 있다. 그러나 한 번에 하나씩 실천해나갈 것이다. —슬론 크로슬리( 저자)
Eating Meat, Mindfully
지난 토요일 나는 여자 친구들과 함께 모여 소의 옆구리살을 도축했다. 우리는 모두 주방 슬리퍼 혹은 러닝 슈즈를 신고, 오래된 티셔츠, 낡은 청바지, 빛바랜 앞치마를 걸친 채 작업대 주변에 서 있었다. 톱과 나이프, 큰 식칼을 들고 어깨 부위에서 가슴살을, 그리고 티본에서 립아이를 분리해냈다. 선명한 노란색 쇠기름을 따로 떼어놓았고, 고기는 다지기용으로, 뼈는 비프 스톡용으로 따로 손질해뒀다. 도축 작업이 모두 끝나면 목초지에서 강아지풀과 페스큐류를 잔뜩 먹고 자란 소한테서 나온 335파운드짜리 소 옆구리살의 4분의 1에 상당하는 분량만큼을 각자 집으로 가져가게 될 것이었다.
도축 작업이 반쯤 이뤄졌을 때 남편 앤드류가 생후 10개월 된 딸 주나와 함께 나타났다. 나는 나이프를 내려놓고, 손을 씻은 후 딸의 얼굴에 코를 비볐다. 딸의 젖비린내는 내 앞치마에 스며든 소고기 지방 특유의 톡 쏘는 듯한 흙 내음을 뚫고 지나갈 정도로 강렬했다. 그날 아침, 주나에게 젖을 먹인 후 나는 한쪽 어깨에는 나이프 가방을, 또 다른 쪽 어깨에는 유축기를 걸친 채 문밖을 나서면서 앤드류가 주나에게 “엄마가 도넛을 만들 때가 됐어”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딸을 두고 나가고 싶지 않았다. 정말 이럴 시간이 없었다. 요즘 누가 따로 시간을 들여 직접 소고기를 도축할까? 그러나 이것은 내가 우리 가족에게 소고기를 먹이기 위해 선택한 방식이었다. 나는 1년에 한 번 내가 신뢰하는 지역 농부에게서 동물(돼지일 때도 있고, 소일 때도 있으며, 때로는 양을 선택할 때도 있다)을 한 마리 구매한다. 그 동물을 직접 도축해 가공육으로 바꾸지 않은 고기라면 뭐든 우리집 지하실 냉동고에 가득 채워둔다. 사실 진심으로 내가 소 사체에 팔을 집어넣는 모습을 내 딸이 보게 하고 싶다. 언젠가 내 딸이 코코뱅을 요리하기 위해 닭을 죽이는 방법을 배웠으면 좋겠다. 그동안 내가 하던 일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두고 살아있는 동물 한 마리를 저녁 식사로 만드는 법을 배우기 위해 프랑스로 떠났을 때 이런 복잡한 일을 받아들였다. 내 딸도 그랬으면 좋겠다.
10년 전, 나는 결혼까지 생각하던 남자를 떠났다. 그리고 대공황 상황에서 하루 12시간씩 쉼 없이 일하던 잡지사에서 해고됐다. 해고 이후 몇 주 동안 잠옷 차림으로 집에서 뒹굴면서 ‘이제 끝이다!’라고 생각했다. 편집 일이나 글쓰기는 더 이상 없었다. 잡지사에서 일하는 동안 음식 관련 글을 쓰면서 내가 설명하는 스테이크가 대체 어디서 온 것인지 한 번도 제대로 알아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린 시절 아빠가 우리가 잡은 물고기의 머리를 작은 야구 방망이로 세게 내리치던 모습도 떠올랐다. 당시 아빠는 그걸로 내리쳐야 물고기가 고통스럽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나는 사춘기에 채식주의자가 되었다. 그러다 20대 후반에 음식 평론가가 되면서 다시 고기를 먹기 시작했고 고기가 우리 식탁에 올려지기까지의 과정에서 어두운 면을 거의 무시하며 살았다. 자기 배설물 위에 서 있는 소, 조그마한 닭장에 빼곡히 들어찬 닭, 일이나 사람과의 관계에서 내가 얼마나 불행했는지와 같은 많은 것을 무시하는 삶을 선택했다. ‘나 자신의 저녁 식사를 위해 누군가를 죽이는 법을 다시 배웠다면 어땠을까?’라고도 생각해봤다. 그랬다면 아마 그것을 무시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한 달 후 나는 프랑스 남서부에 있는 가스코뉴에서 아내들과 함께 돼지 공장을 운영하던 샤폴러드 형제와 함께 일하고 있었다. 최근에는 현대 산업에서 식용으로 키운 동물의 99%가 공장식 축산 방식으로 사육된다는 글을 읽은 적 있다. 샤폴러드가의 돼지는 나머지 1%에 속하는 돼지였다. 그들은 돼지에게 먹일 곡물을 재배하는 일부터 돼지를 살찌워 소시지를 만들어내는 과정까지 모두 직접 관여하고 운영했다. 그리고 불에 태워 퇴비로 만들어 사용하는 뼈를 제외한 돼지의 모든 부위를 매주 시장 네 군데에 내다 팔았다.
도축장에서 자크 샤폴러드는 고압 전류로 돼지를 기절시켜 죽기 전에 고통을 전혀 느낄 수 없게 하는 방법을 내게 보여줬다. 절단실에서 마크는 돼지 피 한 통을 고기 분쇄기에 넣어 소시지를 만드는 방법을 시연했다. 허벅지가 프로슈토 햄만큼 거대한 도미니크는 정육점 주인이 입는 흰색 코트를 걸친 채 옆에 서서 나를 지켜보더니 상냥하게 미소 지으며 “식용으로 동물을 죽일 거라면 당신은 모든 부위를 기꺼이 먹을 수 먹어야 해요”라고 말했다. 브루노는 큰 식칼을 돼지머리 쪽으로 가져가 손으로 직접 돼지의 양쪽 골을 부드럽게 끄집어냈다. “우리는 수요일에 시장에서 이것들을 다 팔아치울 겁니다”라고 브루노가 내게 말했다. 만일 고향 집에서 돼지머리가 나의 일상의 한 부분이었다면 어땠을지 궁금했다. 보다 책임감 있는 고기생산 시스템을 요구할 수 있을까? 우리 모두는 그만큼 고기를 먹게 될까? 아니면 고기를 전혀 먹지 않게 될까?
오늘날 나는 ‘포틀랜드 미트 컬렉티브’라는 사업체와 ‘굿 미트 프로젝트’라는 비영리 국가기관을 운영하고 있다. 굿 미트 프로젝트는 ‘인도적 닭 도축’과 ‘완전 도축’같은 주제로 체험 수업을 제공한다. 학생들에게 나이프를 주고 동물 한 마리를 통째로 먹는 게 어떤 의미인지 가르치고, 갈비살과 구운 고기 그리고 그들이 직접 자른 뼈와 가죽을 집에 가져가도록 한다. 인도적으로 사육한 돼지를 지역 농부로부터 통째로 구매하는 법을 가르쳐주고 어떤 종류의 소시지 분쇄기를 구매해야 하는지와 같은 질문에 대해 조언한다. 그러나 모두가 내 말을 다 이해하지는 못한다. 많은 사람들이 “너무 어려운 것 같아요. 왜 그렇게 해야 하는 거죠?”라고 반문한다. 나는 어려운 일이라고 대답한다. 도축장에 서 있는 것도 힘들고, 내 자동차 뒷좌석에 돼지 사체를 싣고 고속도로를 오가는 것도 힘들고, 살아 있는 토끼를 두 눈으로 직접 본 후에 저녁 식사용으로 죽이는 것도 힘들다. 나는 이 모든 경험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내가 직접 터득한 바를 그들에게 말해준다.
나는 그들에게 이 방식은 나만의 조용한 반항 행위라고 말한다. 내가 직접 도축한 돼지의 다리 부위 전체에 소금을 뿌리고 나서 그것을 말려 프로슈토 햄을 만들기 위해 차고에 걸어둔다. 아니면 하루 날을 잡아 소 도축을 위해 친구들을 끌어모은다. 우리는 모두 알고 싶다고 마음먹었다. 내 딸은 식탁 위에 있던 소고기 한쪽을 가리키며 “이건 뭐야?”라고 하는 듯이 말한다. 조만간, 장담컨대, 나는 당신에게 말할 것이고, 그때는 당신 또한 알게 될 것이다. —카마스 데이비스( 저자)
- 에디터
- 조소현, 필리스 포니스닉(Phyllis Posnick)
- 포토그래퍼
- 알렉스 프레이저(Alex Prager)
- 모델
- 캐롤린 머피(Carolyn Murphy)
- 작가
- 제시카 커윈 젠킨스(Jessica Kerwin Jenkins), 슬론 크로슬리(Sloane Crosley), 카마스 데이비스(Camas Dav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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