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카 무리조
젊은 작가 오스카 무리조는 스스로를 기꺼이 변화의 촉매로 쓰며, 세상의 부조리와 충돌할 때 발생하는
무질서의 상태를 다시 에너지로 전환시킨다. 현대미술계를 놀라게 한 이른바 ‘오스카 법칙’.
이스트 런던, 스튜디오 근처 오스카 무리조(Oscar Murillo)가 매일 들르다시피 했다는 콜롬비아 식당이 어디에 있는지, 반데하 파이사(Bandeja Paisa)가 정말 맛있는지 묻고 싶었지만 그럴 겨를이 없었다. 블랙 팬츠에 화이트 셔츠를 말끔하게 차려입고 나타나 쉴 새 없이 작품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다. “2014년쯤 이사 왔어요. 여기서 대형 캔버스 작품 ‘Signaling Devices in Now Bastard Territory’(2015)를 만들었고 2015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출품했으니, 내 기억이 정확할 거예요.” 나도 정확히 기억한다. 이탈리아 스타일의 햇볕이 쏟아지던 5월의 베니스. 자르디니의 전시장 입구, 도축된 가축처럼 길게 늘어져 있던 거대한 검은 캔버스. ‘모든 세계의 미래’라는 장엄한 주제를 압도적 물성으로 대변하던 불길한 깃발. 제3세계의 사회·정치적 이슈가 들끓는 가운데 천과 천을 잇는 솔기의 경계가 유난히 긴장감을 증폭시키던 작품의 도발. 그 당시의 무리조가 총감독 오쿠이 엔위저(Okwui Enwezor)의 존재감을 넘어설 도리는 없었기에 이름은 기억하지 못했지만, 3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문제작이 탄생한 예의 그 공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스튜디오는 작품 크기뿐 아니라 작업의 확장적인 성질에 대해 재고하게 했어요. 여기서는 많은 일이 일어나고 있고, 모두가 ‘상호 오염’시켜요. 그래요, 그게 이 공간의 DNA죠. 다른 걸 위해 존재하며 굴러다니던 재료가 변형되고, 지형적으로나 개념적으로 다채로운 제 작업의 다양성이 시작되는 곳이라는 점에서. 그러므로 스튜디오는 제게 모선(Mother Boat)이에요. 수년 전, 어쩌면 훨씬 전부터 존재하던 사유와 경험이 드디어 도착하고, 축적되는 중심 공간이죠.”
1986년생인 오스카 무리조는 페인팅, 드로잉, 비디오, 설치, 영상, 행위 예술 등을 아우르는 현대미술가다. ‘아우른다’는 모든 걸 동시다발적으로 시도한다는 의미도 갖지만, “형식적인 절차와 경계를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붕괴하여” 작업 세계를 관통한다는 편이 더 정확하다. 이 과정에서 무리조만의 진가가 드러난다. 예컨대 그의 그림은 숭고하고 아름답기만 한 완성작이 아니라 제스처(“퍼포먼스라는 단어가 시시하다”고 했다)와 설치의 에너지가 활개 치는 장으로 변모하는 식이다. 그는 재봉틀로 캔버스를 이어 붙이고, 다리미로 캔버스를 펴고, 스틱을 활용해 표면을 칠한다. 특히 붓을 쓰지 않는 건 “물리적인 에너지를 충전하기 위한 방식”인데, 그렇게 덧칠하고, 휘갈기고, 긁어낸 것들은 짜깁기된 캔버스 위에서 춤을 춘다.
“처음부터 내 작품은 내면의 에너지를 신체적, 물리적으로 어떻게 발현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었어요. 회화 혹은 작품을 만드는 일은 내면의 에너지 장과 주파를 발생시키는, 가장 급진적이고도 광활하고 총체적인 방식이죠.” 그에게 회화와 드로잉이 중요한 이유도 단순하고도 직접적으로 자신을 격동의 역사 한가운데 둘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캔버스, 유화물감, 종이, 펜, 연필 같은 재료가 미술 역사에서 획득해온 의미를 완전히 묵살하고 무시하는 게 중요해요.”
그러므로 오는 11월 29일부터 국제갤러리에서 선보일 한국에서의 첫 번째 개인전은 오스카 무리조의 작품 20여 점을 단서로 작가가 의도적으로 세상에 생산하는 일종의 무질서, 정교한 엔트로피의 정체를 탐구하는 자리가 될 것이다. 교란의 에너지가 그를 그 세대에서 가장 역동적인 예술가로 만든 게 맞는지 의심해볼 수도 있다. 운이 좋다면 “현대미술가로서의 재능 중 결정적인 건 무엇이라 생각하나”라는 질문에 “대담함과 용기로 하나에 매진하는 점”이라 답한 작가의 ‘대담함’과 ‘용기’의 예술적 실체를 확인할 수도 있다.
“존 발데사리(John Baldessari)는 매일 아침 작업에 대한 생각을 접고 청소만 한다고 했어요. 바닥을 쓸면서 이목을 사로잡는 어떤 것에 대해서만 생각한다고요. 나도 비슷한 과정을 겪는데, 스스로 촉매(Catalyst)라 불러요. 준비운동 같은 거죠. 무의식적으로 선이든 뭐든 자동적으로 그리면서 ‘마크 메이킹(Mark-making)’ 하는 거예요. 그 과정은 저로 하여금 생각을 거듭하도록 하고, 대담해지도록 용기를 주며, 본격적인 작업에 깊이 들어가도록 이끕니다.”
‘촉매’라는 단어는 오스카 무리조의 모든 작업에 내재된 본질적인 개념이다. 촉매의 사전적 의미는 ‘화학 반응에 참여하여 반응 속도를 변화시키지만, 그 자신은 반응 전후에 원래대로 남는 물질’이다. 무언가를 변화시키되 정작 자신은 변치 않는 것. 이를 작가는 에너지 상태의 변형으로 활용한다. “많은 경우 내가 바로 촉매예요. 이동하는 에너지의 주 보유자죠. 하지만 언젠가는 촉매인 나도 변할 거예요. 또한 촉매는 곧 작품이기도, 작업 상태이기도 해요.” 그림 구석의 작은 티끌도 작품으로 발전하는 촉매가 되고, 촉매 자체로만 완성된 작품도 있다. “촉매는 시작점의 역할을 해요. 흔적을 만드는 행위를 통해, 저 자신에서 시작해 에너지를 갖고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요. 그게 제 작품, 제 작업이에요.” 개인전의 제목 ‘Catalyst’에는 전시를 통해 자기 세상은 물론 우리의 그것 역시 변화시키길 바라는 야심과 ‘누군가의 과거, 현재, 미래와 화해 사이의 촉매인 예술의 가능성’에 대한 포부가 엿보인다.
어쨌든 오스카 무리조가 어엿한 제 스튜디오를 갖게 된 2014년은 그의 작품이 예술 시장에서 추정가의 몇 배를 넘었다는 뉴스가 쏟아진 시점과도 일치한다. ‘불세출의 앙팡 테리블’로 언급된 그는 불과 2년여 만에 ‘현대미술이 낳은 최고의 스타’로 급부상했다. 누구에게나 출발은 존재한다는 점에서, 그를 둘러싼 신데렐라 스토리는 과한 면이 없지 않다. 아마 청소부로, 미술 교사로 일한 과거도 한몫했을 테고, 그 와중에 생산한 작품이 마이애미의 전설적 컬렉터 루벨(Rubell) 부부로부터 “바스키아 이후 이런 에너지는 처음이다”라는 감탄을 얻었다는 일화도 거들었을 것이다. 정작 무리조는 자신을 바스키아와 비교하는 미술계의 호사꾼들에게 진력이 난 듯 입을 다물어버렸지만 말이다.
특히 “오스카 무리조는 자신의 부모처럼 새벽 4시에 일어나 청소를 했다” 같은 몇몇 기사 문장은 성공담의 ‘촉매’ 역할을 했다. 어린 시절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그의 스토리 중심에는 예술가적 감성의 원형이자 고향인 콜롬비아의 작은 마을 라파일라(La Paila)와 설탕 공장에서 일한 부모가 있다. 그의 아버지는 노동조합원이자 활동가였다. 1980년대부터 동료들이 살해당하는 현실을 목격한 아버지는 실직 후 돌연 영국 이민을 결정했고, 2년 후 아들이 열 살 되던 해에 정말 고향을 떠났다. 오스카 무리조는 영어를 한마디도 못했고, 밤마다 콜롬비아 친구들 꿈을 꿨다. 어린 이방인이 문화적, 물리적 간극의 균열을 메우는 방법은 예술뿐이었다. 물론 미술이 곧 언어인 건 그가 열 살 때나, 영국왕립예술대학을 졸업한 후나 마찬가지였다.
이민자 출신 예술가의 진부한 성공담은 클리셰에 머물지 않았다. “설탕 공장 노동자였던 부모님 덕분에 우리는 ‘달콤한 삶’을 살았어요”라는 식의 자조적인 발언을 하던 그는 2014년 뉴욕에서 열린 개인전에서 남미의 유명 사탕 공장을 전시장에 재현했다. 콜롬비아의 노동자 13명을 실제 고용했으며, 이들이 화이트 큐브 공장에서 일하는 광경은 전시 기간 동안 실시간으로 인터넷에 생중계됐다. 과거를 팔아먹은 신파 기획이라는 혹평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건 그가 이 한 장면에 가족의 노동, 노동자의 노동, 예술가의 노동, 세계화된 노동에 대한 공감을 함축한 동시에 이는 자신의 과거에도 그럴듯한 명분을 제공했다는 사실이다.
“내가 청소부로 일한 이유는 정상의 상태를 탈피하고자 함이었어요. 노동은 사람을 비인간화시켜요. 당신도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그곳에 있는 거죠. 대부분의 직업이 그래요. 하지만 비인간적이라는 게 마냥 부정적인 의미는 아니에요. 저는 오히려 비인간화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청소부로 일한다는 건 존재하지 않고도 실리적인 이유로 그저 그곳에 있을 수 있게 했어요. 그런 맥락에서 청소는 상징적인 행위예요.” 물론 그가청소하며 생계를 챙긴 ‘인간적’인 이유는 그의 딸 때문이다. “그녀가 태어나면서 저라는 사람이 특징지어졌어요. 딸과의 관계를 포함한 숱한 관계 너머로 나를 집중적으로 ‘노동하는 몸’으로 만들었죠.”
무리조의 회화에서 날것의 자유보다는 노동의 뉘앙스가 먼저 감지되는 이유도, 단순히 그가 이번 인터뷰를 “난 추상표현주의 같은 서구적 맥락에는 관심 없어요”라는 문장으로 시작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노동의 강렬함을 표현하고 싶어요. 알리샤 키스의 목소리나 줄리어스 이스트먼(Julius Eastman)의 능수능란함을 떠올려보세요.” 인간으로서의 본질을 유지하는 동시에 아티스트로서 활동하는 것의 역학 사이, 유일한 공통점 역시 노동이다. “비행기에서 맥퀸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봤어요. 그는 천재로 여겨졌지만, 동시에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아름다운 사람이었어요. 그는 노동자로 살았어요. 저는 그런 예시를 따르고 싶어요. 그와 공감할 수 있거든요.” 그리고 느닷없이 “아무래도 맥퀸에게 빠진 것 같다”고 고백했다.
현재 콜롬비아 보고타의 미술관, 인스티투토 데 비시온(Instituto de Visión)은 오스카 무리조의 2인전을 개최하고 있다. 전 세계를 다니는 그는 6페이지에 달하는 질문지 일부를 비행 중에 마저 답하겠다며 양해를 구했고, 며칠 후 이런 선문답을 보내왔다. “지금 3만9,087피트 상공에서 588mph의 속도로, 15시간에 걸쳐 뉴욕에서 홍콩으로 이동하고 있어요. 방금 당신의 질문에서 깨달음을 얻었어요.” 질문은 “다양한 시공간의 에너지가 축적된 캔버스 작품이 진공상태의 화이트 큐브에 걸리면 어떤 풍경이 연출될까?”였다. “비행과 비행에 대한 추상적인 개념이 답의 보편적인 예시가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밤새 하는 이동, 다양한 지리와 그것들의 에너지 장을 가로지르는 현실을요. 아, 지금 비행기가 러시아로 막 진입했어요.” 그간 오스카 무리조는 비행기에서 흥미로운 작업을 해왔다. 생각해보면, 속수무책으로 갇힌 비행의 시공간은 초현실적 질서와 에너지로 구성되어 있다. 날짜변경선 등 시간의 룰을 거스르는 동시에 물리적으로 세상과 동떨어져 독립적인 공간. 나는 “현대판 계급으로 점철된 곳”이라고 주장했지만 그는 “근본적으로 종이와 펜만 남는 무중력의 시공간”이라고 반박했다. 오스카 무리조는 비행기를 탈 때마다 고도, 대지, 속도, 지역 등을 기록하는데, 이로써 현실 세계를 관조적이며 추상적으로 인식한다. 이번에 선보이는 드로잉 연작 ‘Flight’는 비행기에서 그려낸 무의식의 흔적이며, 같은 맥락에서 ‘Artificial Intelligence’의 뜻을 담은 작품은 ‘인공지능’ 같은 제3의 주체, 오스카 안의 다른 무언가가 만들어낸 결과물인 셈이다. “맞아요. 내가 생각하는 작업, 에너지 장과 주파를 전송 받는 것에 관해서 특히. 한편 비행기 안에서 만든 ‘Them’은 가족들의 사진 및 기록과 드로잉을 위해 비워둔 페이지로 구성된 책인데, 그의 가족의 내러티브와 작가가 비행마다 그린 그림과 만나 시공간의 파편이 뒤섞인 ‘다른 차원의 존재함’을 정의한다.
뭐니 뭐니 해도 비행기 안에서 만들어낸 가장 획기적인 작품은 오스카 무리조 자신이다. 지난 2016년 시드니 비엔날레에 가기 위해 비행기에 오른 그는 돌연 영국 여권을 찢어 변기에 버렸다. 그 결과 시드니에서 추방당했고, 싱가포르, 스페인, 콜롬비아를 거쳐 영국으로 돌아왔다. 그의 행동은 “서구 특권 의식에 대항하는 행동”으로 회자되었고, 나는 어느 젊은 아티스트가 영민한 정체성 정치로 스스로를 작품화한 센세이션 정도로 기억하고 있었다. 의도적인 트라우마에 스스로를 내던진 상황, ‘아티스트’ , ‘런더너’ , ‘콜롬비아 태생’이라는 다양한 정체성이 뒤엉켜 삭제된 상태에서 더 이상 오스카 무리조가 아닌 오스카 무리조는 과연 어떻게 ‘리부트’되었을까?
“완전한 절박함에서 나온 행동이었어요. 가능성의 부족에 대한 절박함 혹은 내가 완전히 쓸모없다는 느낌. 당시 큐레이터는 ‘미래는 여기 있지만 균등하게 배분되지 않는다’는 화두를 던졌어요. 나는 작가로서 그토록 중요한 질문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했어요. 어느 순간, 화두는 예술 너머, 너무 개인적인 질문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난 무언가를 해야만 했어요. 여권을 찢어버리는 행위는 작가로서의 실패와도 연결되어 있어요. 중요한 질문에 대해 시각예술가로서 응답하기에 실패함을 취한 셈인데, 오히려 그 속에서 엄청난 자유를 발견했어요. ‘나는 여기 있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를 발언하기 위해 막대기로 바닥에 흔적을 남긴(마크 메이킹) 혈거인처럼, 그렇게 내 인생에 드로잉한 거예요. 퍼포먼스라기보다는 드로잉이에요.”
오스카 무리조가 작가로서 가파른 상승 궤도에 올라섰을 무렵 모두들 지나치게 밝은 빛이 재능 있는 젊은 예술가의 영혼을 잠식할 거라 염려했지만, 그의 자유는 더욱 주체적으로 확장되고 있다. 올해 팔레스타인과 예루살렘의 긴장감이 가장 첨예한 동예루살렘 실완 지구는 물론 2016년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삼성산에도 한국 무속인과의 ‘이음의 순간’을 거쳐 완성한 캔버스 작품을 내걸었다. “영적 차원에서 다른 문화의 믿음 체계를 잇는” 오스카식 교류는 2013년부터 전 세계 20여 개국의 학교에 캔버스를 보내는 작업을 통해서도 실현되고 있다. 1년 동안 학생들의 책상에 놓여 그들의 모든 고민, 사유, 일상을 받아낸 캔버스는 그에게 돌아와 인간 존재에 대한 풍부한 지평을 제시하는 초국가적 아카이브가 된다.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 화합과 참여, 연대가 있기에 세계가 훨씬 다채롭고 강하다는 사실을, 그는 매 작품, 매 전시에서 확인하려 한다.
요즘도 36시간 동안 식음을 전폐하며 작업하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적어도 오스카 무리조는 성공에 대처할 줄 아는 인간이다. “작가로서의 성공은 곧 나의 캐릭터를 빚는 데 도움을 준 이들에 대한 책임감과 같은 말이에요. 나의 파트너, 전처, 아이들, 부모님, 친척들, 친구들, 동료들.” 이 스튜디오로 이사 온 덕분에 “처음으로 내 가족과 협동해 내 작업과 작품을 만들게 되었고” , 주변의 참여와 연대를 유도한 협동적인 제작 과정을 고수한다. 그는 여전히 두 딸에게 “세상의 무게를 어깨에 짊어져야 한다, 세상이 행복한 곳은 아니다”라고 얘기한다. 유명 평론가와 긴 인터뷰를 나누는 그는 “슬프게도 지금은 서양 특권의 시대”임을 인정하고 “미술계와 예술가가 만드는 제스처가 본질적인 변화를 큐레이팅하는 데는 미약할지언정, 이런 제스처를 통해 어떤 인식은 만들어낼 수 있다”고 선언한다.
나는 그가 부채 의식 없는 건강한 에너지로 인간과 예술가의 본질을 탐구 중이라는 증거를 가장 사소한 문장에서 찾았다. “당신에 대해 알아야 하는 단 하나의 진실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그의 대답은 이랬다. “저는 음식을 매우 좋아해요. 좋은 음식 말이에요.”
- 에디터
- 김나랑
- 포토그래퍼
- 윤송이
- 글
- 윤혜정(국제갤러리 에디토리얼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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